식민지 근대화론, 대한제국 자력에 의한 근대화 성과 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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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 특강 〈끝〉 조선의 근대화 어떻게 볼 것인가
‘근현대사 특강’을 마무리하면서 1945년 광복 후 역사 가운데 무엇을 담을까 고심했다. 필자는 ‘근대’가 없는 현대사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주장해 왔다. 요즈음 언론에 오르내리는 ‘식민지 근대화론’이나 ‘뉴라이트’ 문제는 근대를 어떻게 보느냐와 직결되는 현대사적 현상이다. 필자가 피해 갈 수 없는 주제이다.
최근 식민지 시기 ‘국적’ 문제가 불거졌다. 식민지 근대화론 쪽에서는 이 시기 나라가 일본제국에 합쳐졌으므로 우리 국적은 당연히 일본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과연 대한제국의 국권을 빼앗은 일본제국은 조선인을 일본인으로 간주했을까?
1909년 통감부는 조선에 민적법을 시행한다. 민적법이란 주민등록 시스템으로 일본 메이지 시대에 두 가지 분류가 있었다. (1)인민의 신분과 속적(屬籍)을 함께 부르는 총칭. 즉 황족, 화족(華族), 사족, 평민의 적(籍)을 말한다. (2)경찰 행정에서 사용하는 국적과 호적의 총칭. 1909년 시행의 조선 민적법은 후자로 1915년 개정 때까지 경찰이 업무를 주관했다. 대한제국의 호적은 과세와 과역(課役) 목적으로 작성되었다. 통감부 휘하 경찰은 이 호적을 일본식 민적으로 간주해 사찰용으로 사용했다. 1915년 총독부는 민적 업무를 사법 쪽으로 옮겨 행정조직의 면장 소관으로 바꾸었다. 이때는 조선의 동화(同化)를 내세워 일본식의 ‘이에(家)’를 도입하여 일본과의 통일성을 기하려 했다. 그러나 행정 당국은 시행에서 조선의 호적 관습을 허용하여 조선인 식별용으로 남겼다. (李英美, 2004: 吉川美華, 2008, 『동양문화연구』. 일문) (1)의 ‘속적’을 조선에 적용하지 않는 한 조선인은 일본인이 될 수 없었다. 조선인은 일본으로의 귀화도 금지되었다.
1910년 8월 강제 병합 과정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대(大)아시아주의 운동을 편 일본의 민간 조직은 ‘합방’이란 용어를 썼다. 이 용어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처럼 대한제국의 몫이 살아남을 수 있으므로 당국은 이를 금지하고 흡수 통합의 의미인 ‘병합’만 사용하게 했다. 제3대 통감으로 부임해 ‘한국 병합’을 주관한 육군대신 데라우치 마사다케는 대한제국 총리대신 이완용에게 한국의 황제는 ‘공작’급으로 대우하겠다고 통고했다. 이에 이완용이 놀라 왕, 왕가의 호칭을 사용하게 해 줄 것을 간청해 데라우치가 선심 쓰듯 이태왕·이왕·이왕가 등의 호칭이 생겼다.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차별이 현실이었다. 조선인은 어디까지나 ‘조센징’이었다.
1940년대 초반 서울에서 근무한 한 소련 외교관의 부인은 기자였다. 그는 새로 태어나는 영아 10중 2명만 살아남는다는 글로 서울 사람들의 궁핍을 전하고 있다. 산모의 영양실조로 영아의 대부분이 사산(死産)했다는 뜻이다. 1937년 중일전쟁 준비부터 일본은 국가 예산의 대부분을 전쟁 비용으로 돌리고 공출을 일상화했다. 그 속에서 빚어진 조선인 가정의 ‘노예적’ 참상이었다.
일본제국은 1894~1902년 사이 역사 교과서를 일신했다. 책 이름이 제각각이던 것을 일본사·동양사·서양사 3과목 체제로 통일하고 문부성이 ‘집필 요목’을 준비해 이를 기준으로 서술하게 했다. 동양사는 지나사(중국사)에 주변 민족사를 합쳤다. 한국사는 당연히 동양사에 포함되어야 했다. 그러나 한국사는 일본사에 들어갔다. 『일본서기』의 4세기 진고(神功) 황후 신라정벌을 사실로 간주하여 조선은 이때 일본에 복속되었는데 이후 언젠가 조공을 바치지 않는 무례의 나라가 되었다고 했다. 이를 바로 잡기 위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정벌이 있었고 지금은 조선을 청나라의 그늘에서 일본 천황의 품으로 오게 하려 하고 있다고 했다. 나라를 통째로 병합하기 전에 역사부터 병합했다. (이태진, 2022, 사회비평아카데미)
식민지 근대화론이나 일본 국적 주장은 침략주의를 용인하는 역사관이다. 1919년 고종황제의 국장을 계기로 일어난 전 국민 만세운동의 힘으로 상하이에서 출범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황도 파시즘의 침략주의에 맞서 싸웠다. 1948년 8월 15일 이승만 대통령의 대한민국 ‘정식’ 정부 출범은 36년간의 항일투쟁 공로에 대해 보내는 전 국민 지지였다. 이승만 박사는 항일투쟁의 경력으로 ‘임시’와 ‘정식’ 정부 모두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그런데 최근 ‘뉴라이트’ 쪽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정식’ 정부 수립을 ‘건국절’로 삼기를 주장한다. 임시정부를 인정할 수 없는 식민지 근대화론이 스스로 들어선 왜곡의 골짜기가 깊어지는 형국이다. 1980년대 민주화 운동 시절 운동권의 좌파 역사학을 비판하면서 내세운 ‘뉴라이트’의 기치는 신선한 면이 없지 않았다. 왜 지금 자책점을 보태는 억설을 더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필자는 1894년 이후의 조선·대한제국을 근왕(勤王) 국민 의식 위에 선 근대국가로 규정했다, 그리고 이를 1948년 이후 국가원수 선출 시대의 국민국가와 구별할 것을 제안했다. 전통적인 왕조 국가가 입헌군주제로 발전하여 선진성을 과시하고 있는 예는 영국을 비롯해 한둘이 아니다. 근왕 의식 위에 선 대한제국은 이 유형에 속하는 우리의 초기 근대 국민국가다. 통감부가 ‘시정개선’ 명목으로 우리 정부에 고의로 일본 은행 돈 1300만 원의 빚을 지우자 1907년 2월 대구에서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 전국적으로 퍼졌다. 금연운동까지 등장한 의연금 모으기는 1년 이상 지속되며 수십만이 모금운동에 참여한 것은 세계 역사에도 유례가 없는 일이다. 당시 일본이 정부에 부당하게 지운 빚을 갚는 것은 ‘국민의 의무’라고 한 것이다. ‘국민의 의무’란 용어가 사용되었고 근대국가 ‘국민’으로서의 인식을 갖고 있었다는 의미다.
광복 후 국가원수 선출제 아래서 이뤄진 역사 가운데 이승만 대통령의 자유민주 수호,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개발 공로는 그 과정에 과(過)가 있었다고 해도 역사에 남긴 공(功)은 누구도 깎을 수 없다. 1987년 민주화의 공로도 살려가야 할 역사다. 그런데 특히 최근에 벌어지고 있는 우리 사회의 모습은 ‘통합’을 부숴야 할 과제처럼 여기고 있다.
1751년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총알만 한 작은 나라”에 당론이 여럿으로 갈라져 싸우는 현실을 탄식했다. 우리는 조선시대 당쟁을 망국의 원인처럼 알고 규탄했다. 지금 우리 스스로 그 당쟁의 주역이 된 것은 아닐까? 조선의 정쟁도 타협할 때 좋은 역사를 남겼다. 나라를 더 어렵게 하는 형국이 오기 전에 ‘합리적 화합’ 지향의 정치 문화를 일궈 우리 시대의 과제 민주화를 속히 완성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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