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자전쟁 1년, 불바다가 된 중동

이승원 국제 칼럼니스트 2024. 10. 25.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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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7일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공격한 지 1년이 지났다. 이스라엘-하마스 간 분쟁은 1년 사이 범위를 넓혀 중동 분쟁으로 이어지고 있다. 

2023년 10월 31일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 중부 누세이라트 난민촌 주민들이 이스라엘군의 공습으로 무너져 내린 건물 잔해 속에서 생존자를 찾고 있다.
4만1965명. 이 숫자는 기억돼야 한다. 2023년 10월 7일 시작된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발발 이후 1년 동안 발생한 사망자 수다. 이 가운데 70%는 여성과 어린이고 한 살 생일을 맞기 전에 사망한 아이들만 700명이 넘는다(10월 8일 가자 지구 보건부 발표). 9만 7590명. 이 숫자도 기억하자. 지난 1년 동안 부상당한 사람의 수다.

같은 기간 이스라엘군 사망자는 728명(하마스 기습 공격 당시 381명 포함)이고 이스라엘 민간인 사망자는 많지 않다. 숫자 면에서도, 사망한 사람들의 배경(군인 혹은 민간인) 면에서도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희생이 압도적이다. 국제인권법의 핵심인 '구별의 원칙(민간인이 아닌 전투원만 공격한다)’과 '비례의 원칙(과도한 민간인 피해가 예상되면 공격하지 않는다)’은 온데간데없다. 전쟁 중이어도 지켜야 할 금도와 국제법이 존재하지만 이스라엘은 이 모두를 철저히 무시하며 4만 명 이상의 목숨을 앗아갔다.

지난해 10·7전쟁 초기에 국내 한 원로 학자는 이런 얘기를 했다. "사람들이 '충분히 죽어야’ 전쟁이 끝날 수 있다." 당시 이 기사를 보고 "잔인하지만 현실적인 말일 수도…"라고 혼자 읊조렸건만 지금 보니 반만 맞는 얘기가 됐다. 가자 지구에서 무려 4만 명 이상의 주검이 실려나갔지만(다시 말해 충분히 죽었지만) 전쟁은 현재진행형이며, 레바논의 무장 정파 헤즈볼라와 교전은 물론 이란으로까지 확전 가능성만 높아지고 있다. 항상 인간은 바닥 저 밑으로 기어이 내려간다.

하마스가 전쟁을 시작한 이유

8월 1일 이란 수도 테헤란에서 이스라엘의 소행으로 추정되는 공격으로 숨진 하마스 정치 지도자 이스마일 하니예의 장례식이 열렸다.
10·7전쟁의 시작은 분명 하마스였다. 안식일을 즐기고 있던 무고한 이스라엘 민간인을 살해하고 인질로 잡아가고 성폭행까지 자행했다. 어떤 이유로도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이런 만행이 저질러지자 사람들은 '왜 이 시기에, 어떤 이유로 이스라엘을 급습했나’라는 질문을 쏟아냈다. 사실 이유는 모두 알고 있었다. 수십 년간 비참한 삶을 버텨온 그들의 복수심이다. 다만 시기가 문제였다. 개전 당일 오사마 함단 하마스 대변인이 이미 답을 했다. "이스라엘과의 관계 정상화를 고려하는 아랍 국가들에 보내는 메시지"라고.

이 대목에서 약간의 설명이 필요해 보인다. 앞서 미국 도널드 트럼프 정부 당시 체결된 '아브라함 협정’에 대해 하마스는 거세게 반발해왔다. 아브라함 협정은 원수처럼 지내던 이스라엘과 일부 아랍 국가들이 국교 정상화를 약속한 역사적인 사건이다. 아랍과 무려 4차례나 전쟁을 치러온 이스라엘이 아랍에미리트, 바레인 등과 완전한 관계 정상화(full normalization of relations)를 합의한 것이다. 이는 아랍 국가 사이에서 '아픈 손가락’인 팔레스타인과 이제는 거리를 두고, 각자 자국 안보와 경제 이익을 중시하는 쪽으로 힘을 싣는다는 메시지로 매우 정치적이고 상징적인 결정이었다.

이스라엘 측에 대대손손 살던 터전을 뺏기고 쫓겨나간 팔레스타인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다. "형제라 믿었던 이들이 나의 적(이스라엘)과 손을 잡다니!" 그야말로 엄청난 배신감이었을 것이다. 이게 하마스가 전 세계적인 비난을 감수하면서 이스라엘을 공격한 이유다. 팔레스타인 관점으로 한 발 더 나간다면 16년 동안 거대한 감옥이라 불리는 가자 지구에서 물과 식량, 전기도 없이 굶어 죽으나 이스라엘과 맞서다 죽으나 매한가지일 거라는 절박함에서 시작된 전쟁으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이후 '최소’ 수만 명의 무고한 팔레스타인 사람이 서안과 가자 지구에서 조용히 죽어 나갔다(최대 13만 명 이상이라는 팔레스타인 중앙통계국의 보고도 있다). 너무 오랫동안,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이유로 국내외 언론도 국제사회도 사실상 외면해온 불편한 진실이다. 그러다 지난해 10월 이스라엘이 '피해자’가 되자 국제사회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상황에 새삼 주목하기 시작했다.

네타냐후의 놀이터가 된 중동

5월 12일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 최남단 라파를 떠나 피란민들이 머물고 있는 지구 내 데이르알발라 임시 천막촌 전경. 유엔에 따르면 이스라엘군이 5월 6일 라파 지상전을 앞두고 첫 대피령을 발령한 이후 최소 30만 명이 라파를 떠났다.
전쟁 발발 1년이 지난 10월 9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30분간 통화한다. 약 일주일 뒤인 15일, 이스라엘 총리실은 이른 오전 짤막한 성명에서 "우리는 미국 정부의 생각을 경청하지만 이스라엘의 국가 안보적 필요에 근거해 최종 결정을 내릴 것"이라고 밝혔다. 양 정상 사이 구체적으로 어떤 얘기가 나왔는지 알 수 없지만 이미 진행 중인 하마스, 헤즈볼라와의 전쟁은 물론 이란에 대한 향후 공격 수위 등에 대해 논의됐을 것이다.
이에 대해 '워싱턴포스트’는 "이란 핵과 정유 시설이 아닌 군사 시설만 공격하겠다"는 네타냐후의 언급이 있었다고 보도했다. 얘기를 종합하면 네타냐후가 바이든과 일부 계획을 논의한 건 사실이지만 성명을 보면 결국 상황 봐서 내 맘대로 하겠다는 의미다. 2024년 10월 현재 더 많은 피를 원하는 쪽은 단 한 곳, 이스라엘이다.

그렇다면 네타냐후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대략 3가지 짐작이 가능하다. 1번, 이 기회에 하마스를 궤멸하고 레바논 무장 정파 헤즈볼라의 역량을 상당히 침식한다. 2번, 이란을 전쟁으로 유도해 핵, 군사시설 등 중요 기반을 파괴한다. 3번, 미국 대선 전에 가능하면 모두 해치운다.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저항의 축’을 이 기회에 궤멸하고 싶을 것이다. 헤즈볼라, 예멘의 후티, 시리아의 시아파 민병대, 이라크의 친이란 무장 세력들을 말한다.

역내 힘의 균형을 바꾼다는 의미에서 '새로운 중동’이라는 표현을 써온 네타냐후는 실제 지난 9월 말 유엔 총회에 2장의 지도를 준비해왔다. 한쪽은 시커멓게 색칠한 '저주의 땅(저항의 축)’, 다른 한쪽은 초록색으로 칠한 '축복의 땅’이었다. 유엔이라는 무대에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피아 구분이자, 지극히 노골적으로 자기 생각을 드러낸 장면이다.

이 가운데 가장 고민이 깊어진 곳은 이란이다. 시아파 세력의 종주국으로 하마스, 헤즈볼라 등을 후방 지원하며 일명 '그림자 전쟁’을 벌여온 이란은 말 그대로 딜레마에 빠졌다. 오랜 경제 제재로 인해 경제 상황이 나빠져 먹고살기도 바쁜 상황이다. 하지만 이란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한 하마스 수장(이스마일 하니예)이 피살되고, 형제 관계였던 헤즈볼라의 수장(하산 나스랄라) 피살까지 이어지며 마냥 손놓고 있을 수도 없는 상황이다. 서방과의 관계 개선을 공약으로 내세운 마수드 페제시키안이 7월 대통령에 취임했지만 협력자들의 죽음과 함께 이란 내 보수세력의 눈치를 동시에 봐야 하는 처지다. 특히 혁명 수비대의 젊은 세대는 보복을 원한다. 이란이 지난 10월 1일 이스라엘 본토를 향해 180여 발의 미사일을 발사한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대선 앞두고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미국 리더십

석유에 필요성이 사라지자 슬금슬금 중동에서 빠져나와 '대중국 견제’에 올인하던 미국. 중동 지역의 대혼란 속에서 가장 큰 '루저’는 결국 미국이 되고 말았다. 11월 5일 대선을 앞에 두고 극단적으로 갈라진 국내 여론 속에서 '이스라엘의 방어권’과 '팔레스타인의 생존권’을 동시에 챙겨야만 하는 바이든 정부는 급기야 "이스라엘을 제어할 수 없다"고 변명 중이다. 최근 공개된 밥 우드워드 '워싱턴포스트’ 부편집인의 책에 따르면, 지난 4월 바이든은 이스라엘이 가자 지구 최남단 도시 라파에까지 군을 진입시키자 격분해 욕설("That son of a bitch, BibiNetanyahu, He’sa bad fucking guy")을 한 것으로 전해졌다. 온갖 무기와 자금을 지원하면서도 이스라엘이 제어가 안 되자 화가 난 바이든이 내뱉은 말이다.

미국의 현 상황을 한 줄로 정리하면 '욕하면서 퍼주기’다. 미국은 그동안 이스라엘에 매년 약 38억 달러(약 5조 원)에 달하는 군사원조를 제공해왔고 올해 4월에는 143억 달러(약 20조 원) 규모의 긴급 안보 지원까지 승인했다. 하마스와의 전쟁 이후 1년간 이스라엘에 제공한 공격용 살상 무기는 200억 달러(약 27조 원)로 알려졌다. 대선 승리를 위해서는 필수적인 유대인 표(무엇보다 돈)를 의식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속에서 미국의 리더십은 다시 한번 흔들리고 있다. 10월 13일, 이스라엘은 헤즈볼라 공격을 이유로 레바논 남부에 있는 유엔 평화유지군 기지까지 부수고 들어간 상황이다.

1년 전 하마스의 도발은 중동 전체를 흔들어 놨다. 그렇다면 향후 중동은 어떻게 그려질까. 이스라엘의 일방적인 무력행사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 요르단 등은 이스라엘과 협력하는 모양새다. 이란이 너무 싫기 때문이다. 팔레스타인은 더욱 고립된 상황이다. 2021년 9·11테러 이후 20년간 전쟁을 벌인 아프가니스탄에서 급히 빠져나온 미국은 다시 한번 힘 빠진 모습을 보이고 있다.

확실해 보이는 건 이스라엘이 전 세계의 적이 됐다는 점이다. 홀로코스트라는 비극을 딛고 일어섰던 그들의 도덕적 우위는 완전히 사라졌다. 유엔 결의안으로 나라를 세운 이스라엘은 이제 유엔 평화유지군 기지를 부수고 있다. 특히 권력을 잃으면 곧바로 재판받게 되는 네타냐후는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로 학살을 계속하고 있고, 그의 곁에는 '지구의 중심은 이스라엘’이라고 믿는 극우 세력들이 포진돼 있다. 벼랑 끝 싸움이다.

홀로코스트와 제노사이드 연구를 해온 해외 석학 16명은 지난해 11월 공개 서한에서 "악은 무력으로 궤멸해야 한다는 홀로코스트 서사를 활용하는 것은 오로지 이미 너무 오랫동안 지속된 억압적 상황을 영구화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이스라엘은 전투에서 이겼을지 몰라도 전쟁에서 졌다. 도덕적, 정치적 우위를 완전히 상실하고 이제 중동에는 혼란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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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뉴스1

이승원 국제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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