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귀족사회의 화려함을 담았다 ...뮤지컬 ‘안나 카레니나’

구정근 기자(koo.junggeun@mk.co.kr) 2026. 3. 17.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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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만에 돌아온 러시아 뮤지컬
스케이트장·경마장·오페라극장
당시 귀족 사회 화려하게 구현해
“사람은 사람을 심판할 수 없다”
사랑이 파멸로 이끄는 사회 그려
뮤지컬 ‘안나 카레니나’의 1부를 여는 아이스 스케이팅 장면. 마스트 인터내셔널
“모든 행복한 가정은 서로 닮았고, 불행한 가정은 제각각 나름으로 불행하다.”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의 걸작 ‘안나 카레니나’는 전 세계 소설 중 가장 유명한 첫 문장을 가졌지만, 정작 그 결말을 아는 이는 흔치 않다. 1800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 탓이다. 세계 최대 도서 리뷰 사이트 굿리즈(Goodreads)는 이 작품을 ‘시작했으나 끝을 맺지 못한 사람이 많은 책’ 9위로 꼽기도 했다. 마음속으로만 완독을 꿈꿔온 이들에게 뮤지컬로 이 이야기를 만날 기회가 찾아왔다. 러시아 뮤지컬 ‘안나 카레니나’가 7년 만에 돌아온 것이다. 지난달 20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막을 올린 이번 공연은 러시아 ‘모스크바 오페레타 시어터’의 오리지널 프로덕션을 바탕으로 한 라이선스 공연으로, 2018년 초연·2019년 재연에 이은 세 번째 시즌이다.

뮤지컬 ‘안나 카레니나’에서 안나 역을 맡은 배우 옥주현과 브론스키 격의 문유강이 함꼐 연기를 펼치고 있다. 마스트 인터내셔널
흔히 ‘안나 카레니나’를 불륜극으로 기억하지만, 원작이 불멸의 고전으로 남은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다. 작품은 1860년대 농노제 폐지 이후 급변하던 제정 러시아를 배경으로,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귀족 사회부터 시골 농촌까지 당대 러시아의 방대한 시공간을 촘촘하게 담아냈다. 농노제 폐지 이후 러시아 사회에는 자유와 행복을 향한 어렴풋한 지향이 번져갔지만, 제도와 관습은 좀처럼 따라가지 못했다. 안나는 그 균열 속에서 기존의 결혼 제도를 벗어나 사랑을 택하지만, 끝내 보수적인 귀족 사회의 따가운 시선 속에서 파멸에 이른다.

뮤지컬 역시 이 지점에 주목한다. 러시아 오리지널 프로덕션의 알리나 체비크 연출은 “‘사람은 사람을 심판할 수 없다. 그것은 오직 신만이 할 수 있다’는 성경 구절을 작품에 인용했다”며 “오늘날에도 개인의 잘못을 집단으로 비난하는 현상이 있는데, 그래서 이 작품은 마냥 사랑 이야기라고 볼 수 없다”고 설명했다.

뮤지컬 ‘안나 카레니나’의 경마장 장면. 뮤지컬은 당시 귀족사회의 다양한 장소를 무대로 구현했다. 마스트 인터내셔널
작품은 안나가 직면해야 했던 사회적 시선과 고통을 무대미술로 화려하고 장대하게 그려낸다. 당시 귀족 사회가 작동했던 스케이트장과 대저택 사교 파티, 경마장과 오페라 극장 등의 공간이 차례로 펼쳐지고, 공간이 바뀔 때마다 앙상블의 의상도 화려하게 전환된다. 대규모 앙상블은 사회적 압박을 입체적으로 표현하는 장치로 기능하며, 안나가 등장할 때마다 무대를 에워싸며 냉혹한 시선을 몸으로 표현해낸다. 격자무늬 조명으로 구현한 빛의 감옥, 시선의 감옥 이미지도 인상적이다. 러시아 귀족들이 모이고 사회가 이뤄지던 장소들을 무대 위에서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 공연의 큰 매력이다.

1부가 안나가 기존의 결혼 관계를 이탈하는 과정을 그린다면, 2부는 그녀가 브론스키와 함께 가정을 떠난 뒤에도 행복을 누리거나 자유롭다고 느끼지 못하는 과정을 처절하리만치 상세하게 그려내며 주제의식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뮤지컬 ‘안나 카레니나’의 오페라 장면. 소프라노 강혜정의 패티 연기는 관객석으로부터 박수갈채를 받았다. 마스트 인터내셔널
가장 많은 박수를 받은 장면은 2부의 오페라 극장 씬이다. 소프라노 강혜정·한경미가 극 중 전설적인 소프라노 패티로 분해 아리아 ‘오, 나의 사랑하는 이여’를 부르는 대목으로, 뮤지컬과는 다른 발성과 성량으로 객석을 압도한다. 사교계에서 외면당한 채 홀로 극장에 남겨진 안나의 처지와 맞물리며 비극이 절정에 달하는 순간이다.

다만 역설적으로 이 장면에 가장 큰 호응이 쏟아졌다는 것은, 뮤지컬 본연의 넘버들이 그만큼의 인상을 남기지 못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방대한 원작을 150분에 압축하는 과정에서 서사의 흐름이 다소 급박하게 전개되고, 2부로 갈수록 긴장감이 느슨해진다는 점도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럼에도 이 작품이 7년 만에 다시 무대에 오른 이유는 분명하다. 규칙을 강요하는 사회가 한 인간을 어떻게 파괴하는지, 그 과정을 이토록 화려하고 장대하게 눈앞에 펼쳐 보이는 공연은 흔치 않다. 안나의 사랑이 왜 자유가 아닌 파멸로 끝날 수밖에 없었는지, 사랑이라는 감정이 사회의 구조와 의식과 어떻게 관계를 맺는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게 한다. 안나 역에는 옥주현·김소향·이지혜가, 브론스키 역에는 윤형렬·문유강·정승원이, 카레닌 역에는 이건명·민영기가 출연한다. 오는 3월 29일까지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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