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에 아로새겨진 이념 대립 상처 깊은 계곡 되어 흐르고

 계곡미가 빼어난 뱀사골. /김석환

람천은 실상사 부근에서 만수천과 합류한다. 만수천은 칠선계곡, 뱀사골, 달궁 등 우리 귀에 익숙한 계곡물들이 모여 만든 하천이다. 지리산의 수많은 물길이 모였다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는데, 정작 행정지명은 만수천(萬水川)이 아닌 만수천(萬壽川)이다. 만수천은 지리산 노고단 분수계에서 발원한다.

만수천의 최상류는 반선에서 지리산 반야봉까지 14㎞에 이르는 뱀사골이다. 뱀사골은 크게 보면 만수천 계곡 전체라고 할 수도 있을 정도이다.

뱀사골을 따라가면 해발 800m의 고지대에 구름도 누워 간다는 와운(臥雲)마을이 있다. 임진왜란을 피해 들어온 사람들이 처음 마을을 이루었지만, 여순사건 때 마을 전체가 불타버렸다. 한국전쟁 때는 빨치산과 토벌대가 전투를 벌이면서 주민들은 모두 생사의 갈림길에 서기도 했다. 천년송으로 불리는 마을의 당산나무는 이 모든 아픔과 상처를 지켜보고 보듬고 있다. 산비탈에 자생한 소나무인 천년송의 실제 나이는 500년 이상으로 추정된다. 높이는 20m, 사방으로 뻗은 가지의 폭은 18m로 마을의 풍상을 위로하는 것처럼 우아한 품격을 보여준다.

만수천의 또 다른 갈래는 달궁계곡이다. 조선 숙종 때 발간된 남원 읍지인 <용성지(龍城誌)>는 서산대사의 글을 인용해 기원전 84년 마한 왕이 달궁계곡으로 피난 와서 도성을 쌓았다는 전설을 기록하고 있다. 마한은 단일 국가가 아니라 54개 부족 국가의 연맹체이다. 달궁계곡에는 마한의 54개 부족 국가 가운데 한 곳이 실제 있었을 것 같은 유적도 남아 있다.

◇한국의 3대 계곡 칠선계곡 = 실상사 부근에서 만수천을 받아들인 람천은 함양 마천면과 휴천면을 향해 1시 방향으로 흐른다. 마천(馬川)이라는 이름은 '물살이 말처럼 빠름'을, 휴천(休川)은 '물살이 쉬어감'을 의미한다. 마천에서 물살이 빨라지는 것은 지리산 가장 깊은 계곡인 칠선계곡 물줄기와 합류하기 때문이다. 지리산 최후의 원시림을 낀 칠선계곡은 한라산 탐라계곡, 설악산 천불동계곡과 함께 한국의 3대 계곡으로 불린다. 칠선계곡의 입구에 '벽송사(碧松寺)'와 '서암정사(瑞巖精舍)'가 있다. 벽송(碧松)은 '푸른 소나무'다. 1520년(중종 15)에 벽송지엄 선사가 절집을 중창했다. 서산(西山)과 제자 사명(四溟)이 수행하여 도를 깨친 곳이고 구한말 선지식(善知識)인 경허(鏡虛)와 구하(九河)가 수행했던 곳이기도 하다. 벽송사는 이병주의 소설 <지리산>의 주요 무대이다. <지리산>은 해방 전후의 격동기를 온몸으로 밀고 나갔던 아나키스트와 빨치산들의 파란만장한 인생 역정 이야기이다. 2017년 박근혜 전 대통령이 수감 중에 읽은 책으로 알려지면서 다시 관심이 쏠렸다. 소설에 나오는 하준규는 작가 이병주의 친구인 함양 출신 하준수가 모델이다. 하준수는 나중에 빨치산 남도부(南到釜)로 알려진 인물이다. 하준수는 함양 천석꾼의 아들로 1943년, 일본 유학 중에 징병을 피해 지리산으로 숨어들고 벽송사를 찾는다.

벽송사 뒤편 축대 아래 곧게 뻗은 도인송. /김석환 

그는 지리산에서 비슷한 처지의 징병 거부자들을 모아 '보광당(普光黨)'을 만들고 경찰 주재소의 총기를 탈취해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다. 일제 말 조선에 있던 젊은이들에게는 박정희·백선엽처럼 일왕에 충성을 맹세하고 일본군이 되거나, 징용·징병에 끌려가거나, 산속에 작은 해방구를 만들어 무장투쟁을 벌이는 길밖에 국내 선택지가 없었다. 보광당은 1945년 봄에는 150명 정도까지 인원이 늘었다. 그들은 체포하러 오는 일본 경찰 토벌대를 격퇴한 것은 물론 7월에는 함양경찰서를 공격해 잡혀 있던 동지들을 구출했다고 한다.

해방 이후 당수 고수이기도 했던 하준수는 이승만의 경호대장이 된다. 하지만, 그는 친일파를 감싸는 이승만에 실망해 곧 낙향한다. 고향에서 그를 기다리는 것은 일제강점기 그와 교전까지 벌였던, 이제는 함양경찰서 고위 간부가 된 친일 경찰들이었다. 박헌영의 조선 공산당 입당 요청을 거부했던 그는 체질적으로 공산주의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를 체포하려는 친일 경찰에 쫓겨 다시 산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고 마침내 빨치산 '남도부'가 되어 최후를 맞았다.

◇치열했던 빨치산 토벌 = 1946년 10월 굶주린 시민들의 시위로 봉기가 발생한 이후 공산당 활동이 불법화되자 남로당 계열이 초보적인 게릴라전을 벌인 것이 한국 빨치산의 시작이다.

1948년 10월, 여수에 주둔 중이었던 조선 국방경비대 14연대 소속 장병들이 제주 4.3 사건을 진압하라는 이승만 정부의 출병 명령을 거부하고 이른바 '여순사건'을 일으킨다. 일제강점기 6.10 만세 운동 주도자 이현상이 이 패잔병들을 규합해, 본격적으로 무장세력화한 것이 '조선인민유격대'로 자칭했던 빨치산이다.

빨치산은 기본적으로 활동 공간과 보급 지원, 주민들의 지지 등 세 가지가 필요하다. 좁은 한반도는 그런 면에서 빨치산이 아예 불가능한 지역이다. 손호철의 <키워드 한국 현대사 기행>에 따르면 체 게바라는 정글 오지에 있어서 정부군과의 교전 자체가 실제는 별로 없었고, 마오쩌둥 역시 '대장정(大長征)'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을 내걸고 교전을 피해 오지로 도망 다녔다. 반면 지리산 빨치산은 좁은 공간에서 5년 동안 1만 717회를 교전해 군경은 6333명, 빨치산은 1만 1000여 명이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가장 치열했던 교전 장소는 지리산과 벽송사 일대였다. 이 부근에서만 양측 합쳐 7300여 명이 희생되었고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이 사살된 빗점골도 이곳에서 멀지 않다. 그의 시신은 '빨치산의 종말'을 선전할 목적으로 방부 처리되어, 서울 창경원에서 2주 동안 전시되었다. 이현상의 시신은 친척들마저 인수를 거부했다. <남부군>의 저자 이태의 표현처럼, 이현상은 '그 주검조차도 모든 것으로부터 버림받은' 비극적인 인물이었다. 그도 '돈키호테'처럼 "이룰 수 없는 꿈을 꾸고, 싸워 이길 수 없는 적과 싸움하고,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견디며, 잡을 수 없는 저 밤하늘의 별을 잡으려" 했던 것일까.

한국전쟁 당시 빨치산이 야전병원으로 활용했던 함양 벽송사.  /김석환

모두가 인수를 거부하면서 그의 시신은 다시 지리산으로 돌아왔고, 그를 토벌했던 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 총경이 약식 장례식을 치러주었다. 차일혁은 조선의용대 출신으로 일제와 싸우다 해방 이후 경찰로 특채된 인물이다. 그는 "빨치산들이 절을 은신처로 사용하니 구례 화엄사를 불 지르라"는 상부의 명령을 받고도 "절을 태우는 데는 반나절이면 충분하지만, 절을 세우는 데는 천 년의 세월도 부족하다. 문을 다 없애면, 빨치산들이 숨지 못할 것이다"며 화엄사의 문짝만 떼어내 태운 인물이기도 하다.

◇깨달음의 상징 벽송사 = 화엄사와 달리 벽송사에는 그런 행운이 없었다. 빨치산들의 야전병원으로 사용되었던 벽송사는 국군에 의해 전소했다. 방화에서 살아남은 것은 3층 석탑과 도인송, 미인송으로 불리는 소나무 두 그루였다. 현재의 벽송사는 1960년에 원래 자리보다 50m 정도 아래에 다시 지어진 것이다. 벽송사는 '선방 문고리만 잡아도 성불한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로 한국 선불교의 종찰이다. 벽송사는 2025년 완공 예정으로 무문관(無門關)을 짓고 있다. 선가에서는 깨달음의 길을 문 없는 문, 무문(無門)으로 부른다. 무문관은 깨달음을 얻지 못하면 차라리 문 바깥으로 나오지 않겠다는 수행의 결기가 서린 이름이다.

서암정사 입구의 사천왕 부조.  /김석환

108명의 조사를 배출했다는 벽송사는 다시 새로운 선지식을 배출할 수 있을까?

벽송사 부근에는 이념 대결 속에 비극적으로 죽어간, 모든 영혼을 위로하겠다는 발원으로 지어진 서암정사가 있다. 커다란 바위 옆의 대웅전과 천왕문 대신 입구 암벽에 양각으로 새긴 사천왕상이 예사롭지 않다.

"태양에 바래면 역사가 되고, 월광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 이병주의 소설 <산하>의 아포리즘이다. 지리산은 어느 시절이나 '시대와의 불화'로 숨어드는 이들의 마지막 피난처였다. 지리산에서 죽어간 넋들은 역사가 되었을까, 신화가 되었을까?

그 질문에 서암정사 일주문의 글귀는 이렇게 대답한다.

 '백천강하만계류(百千江河萬溪流) 동귀대해일미수(同歸大海一味水)'

 '수많은 강물과 개울이 흘러, 함께 바다로 돌아가니 한 물맛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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