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의 하늘 [이상하지 않은 나라의 알렉스]
10월의 하늘은 유독 높아보인다. 더위에 지쳐 더는 못 견디겠다 싶을 때 쯤, 아침 저녁으로 서늘해지기 시작하고, 문득 올려다 본 하늘이 무척 푸르고 광활해 보이기 시작한다. 가을이다. 그렇게 높아보이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문득, ‘어려서부터 가을 하늘은 높고 푸르다는 말을 하도 듣고 자라서 높아보이는 걸까’ 하는 생각을 뜬금없이 해본다.
10월의 어느 토요일, 아침 일찍 일어나 준비를 하고 속초로 이동한다. 요 며칠 하늘에 두껍게 구름이 낀 흐린 날씨였는데 오늘은 ‘한국의 가을 하늘은 이런 거지!’ 싶게 맑고 푸르고 시원한 느낌이 드는 푸른 하늘이다. 차를 타고 이동하는 내내 기분이 좋고 설레인다. 마음 속에 하늘의 파란 빛이 베어들어 청량해지는 느낌이다.
오늘의 과학자가 내일의 과학자를 만나다
오늘은 속초의 한 도서관에서 어린이들을 위한 강연을 한다. ‘10월의 하늘’이라는 제목의 강연회다. 벌써 15번째가 된 이 행사는 매년 10월 마지막 토요일에 과학자들이 전국의 도서관으로 어린이들을 찾아가 하는 과학 강연이다. 인구 20만 명 이하의 작은 도시나 읍면 단위의 도서관을 중심으로 열리는 무료 과학 강연 나눔이다. 행사의 준비부터 포스터 디자인, 강연, 참여하는 도서관까지 모두 자발적인 참여와 재능 기부로 이루어진다. 유명한 뇌과학자인 정재승 교수가 오래 전 충남 서산의 한 도서관에서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강연회를 했는데, 지방의 어린이들이 과학자를 볼 기회가 너무 적다는 것을 알게 되어, 어린이들에게 과학을 소개하고 과학자의 꿈을 꿀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자는 제안을 하고 이 행사를 시작하게 되었다.
“어린 시절에 과학이 주는 경이로움을 체험한 청소년은 우주와 자연, 생명을 존중하고 그것을 탐구하는 삶을 가치 있게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인구 20만 명 이하의 작은 도시나 읍면에선 이러한 체험을 할 수 있는 기회조차 거의 없습니다. 과학을 꿈꾸고 그 꿈을 향한 절실함을 갖추고, 그 길을 치열하게 걸어가는 노력은 꿈꾸는 각자의 몫일겁니다. 하지만 과학이 무엇인지에 대해, 과학이 주는 경이로움에 대해 느껴볼 기회 조차 없는 이들에게, 꿈꿀 수 있는 계기를 주는 것은 너무나 시급하고 중요한 일입니다.” - 정재승 교수님
나는 작년에 이 행사를 알게 되어 강연자로 신청을 했지만, 작년에는 신청이 너무 늦어 강연에 참여하지 못 했다. 올해는 꼭 참가하고 싶어서 공지가 뜨는 날만 기다렸고 마침내(!) 강연자로 등록하는데 성공했다. 전국에서 50개의 도서관이 참여 하고 한 도서관마다 두 번의 강연이 있어서 총 100명의 강연자가 강연을 하게 되는데도, 경쟁이 제법 치열하여 서울이나 경기도는 일찌감치 등록이 마감되고 내가 조회 했을 때는 세종시, 충청도, 강원도가 내가 이동하기 괜찮은 지역이었다.
울산이나 칠곡, 안동처럼 이동에 시간이 많이 걸려 마지막까지 자리가 남는 지역을 신청할까도 잠깐 생각 했지만, 결국은 내가 좋아하는 도시이고 가끔 바람쐬러 다녀오곤 해서 익숙한 도시인 속초로 신청했다. 바다도 볼 수 있고 산도 볼 수 있고 맛있는 것도 많이 먹을 수 있어 다녀오면 기분 전환이 되곤 했던 도시에서 이제 또 하나의 좋은 기억을 만들 수 있겠다 싶어 기뻤다.
강연 제목은 ‘AI 과학자가 하는 일’
강연 주제를 정하고 발표 내용을 정리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과학 강연이고 나는 20년이 넘는 경력 기간 내내 데이터와 AI 분야에서 일을 해왔기 때문에 AI에 대해 발표하는 것은 행사 신청 전부터 거의 정해져있었다. 또 AI가 세상을 바꾸는 속도에 많은 사람들이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에 관심을 얻게 되는 주제이기도 했다.
강의는 크게 세 덩어리로 구성했다. 첫번째는 AI가 무엇인지 같이 생각해보는 것. 그리고 우리가 일상에서 이미 AI를 많이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어린이들에게 알려주는 것이었다. 두번째는 AI를 만드는 방법에 대한 개략적인 설명이었다. 정확하게 설명하려면 전문 지식과 배경 지식이 필요하고 시간이 많이 필요하기 때문에 동화처럼 간접적인 방식 설명하고, AI가 실제 작동하는 모습을 chapGPT와 영상으로 시연해서 보여주기로 했다. 마지막은 AI과학자가 되기 위해 우리 어린이들이 어떤 준비를 하면 좋을지 정리했다.
강연 내용 자체는 준비하는데 어려움은 없었고 시간도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다만 어린이들이 어느 정도의 반응을 해줄 지, 30분이 넘는 시간 동안 집중을 할 수 있을지, 내 설명을 이해 할 수 있을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해온 일 특성 상 강연이나 발표, 세미나를 자주 했다. 아마 수 백 번은 충분히 될 것이다. 그런데 그 많은 강의는 거의 대부분 성인 대상이었고, 한 두 번 고등학생을 위한 진로 세미나 정도가 있었다. 사전에 전달 받은 정보에 따르면 이번 강연은 33명의 신청자 대부분이 초등학생이고 중학생이 몇 명 있는 정도라고 했다. 특히 초등학교 저학년 학생이 다수 참석한다고 했다. 나는 아이도 없고 평소 어린이를 접할 기회가 많지 않은데, 더우기 이렇게 다수의 어린이들을 나 혼자 상대하는 것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결국 뇌물을 준비하기로 했다. 아이들에게 젤리가 제일 반응이 좋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마트로 달려가 젤리를 잔뜩 샀다. 참석한 어린이들이 두 개 씩 먹을 수 있을 만큼의 젤리를 준비하고, 질문을 한 어린이에게 선물로 줄 과자봉투도 따로 준비했다. 마음이 무척 든든해졌다. 강의 내용 전달이 잘 안 되더라도 우린 즐거운 시간을 보낼 준비가 되었다.
우리 어린이들은 나를 놀라게 했다
내 강연은 두 번째 순서였다. 앞 강연이 한 시간을 조금 넘을 정도로 살짝 길어져서 내 강의를 시작할 무렵에는 아이들이 조금 기운이 떨어져 보였다. 모두 자리에 앉아 강연을 시작할 준비가 되자 우리는 젤리를 하나씩 나눠 먹고 당을 충전했다. 새콤달콤한 것을 먹으니 아이들의 기운이 쑥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걱정 반 설렘 반으로 준비한 강연 내용을 하나 씩 이야기 하기 시작했다. 어려울 것 같은 생각이 들었던지 강의 초반에는 아이들이 긴장한 표정으로 내 입과 손짓만을 바라보기만 했는데, 한 페이지 두 페이지 넘어갈 수록 아이들의 표정이 풀리기 시작했다. 까르르 웃기도 하고 서로 질세라 손을 들고 질문도 참 많이 했다. 아이들의 반응에 강연을 하는 나도 긴장이 조금 가라앉으며 흥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우리 어린이들은 강연에 집중도 잘하고 내용도 잘 이해 했다. 질문의 수준도 무척 높아서 초등학교 3~4학년 정도 되어 보이는 어린이들도 ‘AI를 나쁜 목적으로 사용하면 어쩌죠?’, ‘인공지능을 규제하는 법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등 전문가인 나도 깜짝 놀랄만한 질문도 했다.
강연 동안 질문을 한 번도 안 한 어린이가 거의 없었고, 3~4번에 걸쳐 질문을 한 어린이도 많았다. 강연 시간 내내 매우 활발하게 소통했고 어린이들이 강연에 흠뻑 빠져서 재미있어 하는 게 느껴졌다. 무척 감사했다. 강연의 마지막은 AI과학자가 되기 위해 세 가지를 제안 했다. 과학자가 되기 위해 벌써부터 수학, 과학을 공부하고 준비할 필요는 없다고 이야기 해주었다. 여러분은 앞으로 10년에서 20년 이상 길게 공부를 할 거고, 그 시간 동안 여러 과정에 따라 필요한 공부를 충분히 하게 될 것이니 공부와 관련해서 초등학교 저학년부터 미리 준비할 필요는 없다고. 다만 세 가지를 하면 좋은데, 첫번째는 책을 많이 읽기 두번째는 AI로 사람들의 삶을 어떻게 나아지게 만들지 매일 생각해보기 세번째는 나만의 관점을 만들기라고 설명했다.
첫번째와 두번째는 다른 곳에서도 쉽게 들을 수 있는 조언이었을텐데, 세번째는 어린이들이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꼭 이야기 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여러분이 지금은 이게 무슨 말인지 모를 수 있지만, 이해가 안 되더라도 이 말을 잘 기억해두고, 나만의 관점을 만드는 게 무엇일까? 나만의 관점을 만들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고민을 계속하다 보면 언젠가 그 답을 찾게 될 것’이라고 설명 해주었다. 또 하나 ‘나만의 관점을 만든다는 것은 남과 다른 결과를 얻는 것이 아니다, 남과 다른 삶을 살으라는 것이 아니다, 결과적으로는 남과 같은 선택을 하게 되더라도 그 선택에 이르는 과정이 온전히 나의 생각으로 채워지는 것 그것이 나만의 관점을 갖는 것이다’라고도 이야기 해주고 싶었는데, 이건 까먹고 이야기 해주지 못하고 강연을 마쳤다. 아이들이 듣고 이해하기에는 너무 추상적이라 이야기 하지 않은 것이 차라리 잘 되었다 싶기도 하다.
강의를 마치고 나온 하늘은 여전히 푸르고 높았다. 10월의 이렇게 맑고 아름다운 날에 우리 어린이들의 맑고 밝은 모습, 그리고 끝도 없이 넓은 하늘처럼 무한한 가능성을 만나게 되어서 내가 큰 선물을 받은 것 같다.
* 이상하지 않은 나라의 알렉스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는 토끼굴에 쏙 빠지면서 이상한 나라로 떠나 신기한 모험을 하게 된다. 알렉스는 최근 여유 시간이 많다 보니, 이전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띄고, 이전에 느끼지 못했던 감각을 느끼게 되면서 문득, 엘리스의 이상한 나라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둘러싼 이상하지 않은 나라 속에 교묘하게 섞여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상하지는 않지만 일상적이지 않은 순간들, 평범한 일상 속에 숨어있는 특별한 순간들을 글로 남겨보기로 했다.
* 글쓴이 - 알렉스
외국계 기업을 다니며 회사에서 쓰던 영어 이름이다. 20년 넘게 직장 생활을 했고, 최근 건강 문제로 일을 그만두고 시골에서 백수이자 동네 아줌마로 제2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해당 글은 뉴스레터 <세상의 모든 문화>에 연재되고 있는 글입니다. <세상의 모든 문화>는 총 20여명의 작가들이 매일(주중) 다양한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리는 뉴스레터로, 다양한 분야의 작가들이 자발적으로 만들어가는 무료 레터 콘텐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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