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기차 시대에도 '포르쉐다움'을 지키기 위한 집념이 배터리 개발 전략 곳곳에 녹아들고 있다. 스포츠카에 최적화된 성능과 충전 속도, 효율, 경량화까지 고려한 포르쉐의 배터리 연구개발(R&D)은 단순한 기술 진보가 아닌 브랜드 철학의 구현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포르쉐는 지난 15일 독일 슈투트가르트 외곽 작은 마을 바이작에 위치한 연구개발(R&D) 센터에서 '2025 포르쉐 전기차 글로벌 워크숍'을 개최했다. 이번 워크숍에서는 스포츠카 브랜드인 포르쉐의 전기차와 배터리 전략에 대한 심도 깊은 내용이 다뤄졌다.
포르쉐 측은 배터리 전략에 대해 기술적 접근보다 더 깊은 차원의 원칙을 강조했다. 마티아스 골드쉐 포르쉐 배터리 개발 총괄 박사는 "최고의 전기 스포츠카를 만들기 위해선 배터리 자체가 고객 경험을 좌우하는 핵심이 된다"며 "주행 역학, 충전시간, 무게, 내구성 등 다양한 요소를 조화롭게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실제 1.5세대 타이칸은 배터리 용량을 105kWh로 키우면서도 무게는 9kg 줄이고, 고속충전 시간은 기존 21.5분에서 18분으로 단축시켰다.

포르쉐는 초기부터 적정 배터리 용량을 100~110kWh로 설정했다. 이는 테슬라 모델 S, BMW i7, 메르세데스-벤츠 EQS 등 경쟁 모델과 유사하거나 약간 높은 수준이지만, 충전 속도와 전체 시스템 효율의 균형 속에서 이 수치를 정했다. 배터리 용량이 지나치게 커지면 차체 무게 증가로 주행 역학이 저해될 수 있다는 점에서, '적정 용량'을 설정하는 것이 곧 퍼포먼스 유지의 전략이기도 하다.
벤자민 파센베르크 포르쉐 배터리 시스템 셀·제어 디렉터는 "우리는 무조건 많은 캐파시티를 넣는 방향이 아니라, 스포츠카에 적합한 무게 중심과 주행 특성을 유지할 수 있는 최적의 용량을 설정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며 "특히 중국 시장에서는 장거리보다 고속충전에 대한 수요가 높다는 조사 결과도 반영했다"고 말했다.
고객의 실제 운전 행태를 반영한 데이터 기반 설계는 포르쉐 배터리 전략의 핵심이다. 포르쉐 분석에 따르면 85%의 고객은 500~600km 수준의 주행거리를 원하지만, 실제 95%는 하루 200km 미만을 주행한다. 포르쉐는 이를 근거로 배터리 용량을 무작정 늘리는 대신, 에너지 밀도와 충전 속도, 전체 시스템 효율을 균형 있게 조율하고 있다.

특히 타이칸에 적용된 실리콘 음극재는 포르쉐의 배터리 고속충전 전략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실리콘은 흑연보다 최대 10배 높은 용량을 제공하지만, 충방전 시 300%에 가까운 팽창 특성으로 인해 구조 안정성 확보가 관건이다. 포르쉐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셀 내 바인더 조성, 열 제어 시스템, 전류 분산 설계까지 자체 개발에 관여했다. 파센베르크 디렉터는 "충전 성능 개선을 위해 실리콘 음극재를 사용하고, 셀 내부 구조와 쿨링을 함께 설계했다"고 말했다.
포르쉐는 단순 부품 조달형 OEM이 아니라, 셀·모듈 설계 단계부터 셀 공급사와 공동 개발을 진행한다. LG에너지솔루션, CATL 등과 협업해 전류 밀도, 열관리 효율, 수명 예측 정밀도 등에서 최적화를 시도하고 있다. 또 플랫폼에 맞춘 셀 맞춤화 설계 역량이 경쟁사 대비 강점이다. 타이칸은 33개 모듈로 구성된 구조를 갖고 있으며, 각 모듈은 고장 시 개별 교체가 가능하다.
현재 포르쉐는 고성능과 경량화를 동시에 만족시킬 수 있는 상용 셀이 부족한 만큼, 우선 NCM 기반 셀을 적용하고 있다. 파센베르크 디렉터는 "기존 LFP 대비 높은 에너지 밀도를 확보할 수 있으면서도 스포츠카 주행 특성에 맞는 출력을 낼 수 있는 조합"이라며 "NCM 배터리가 현재 포르쉐에 가장 적합한 해법"이라고 강조했다.

높은 에너지 밀도와 경량화 패키징이 가능한 전고체 배터리도 이 같은 기술 로드맵에서 차세대 후보로 검토되고 있다. 파센베르크 디렉터는 "2030년 전후에는 스포츠카 전용 전고체 셀을 기대해볼 수 있을 것"이라며 "다만 고속충전과 고출력 운행 조건을 동시에 만족하는 수준에 이르려면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포르쉐는 최근 배터리 개발에 인공지능(AI) 기술도 도입했다 AI 기술은 배터리 시스템 설계와 성능 예측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에릭 박사 등 데이터 사이언티스트 팀은 "포르쉐는 설명 가능한 AI를 통해 배터리 충방전 패턴, 전압 편차, 온도 이력 등의 플릿 데이터를 분석하며 셀 수명 저하 패턴을 모델링하고 있다"며 "특히 고속 충전 사용 비율이 높은 운전자의 셀 에이징 속도를 예측해 셀 설계와 BMS 로직 개선에 활용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처럼 배터리 기술의 모든 결정은 포르쉐가 전기차 시대에도 '스포츠카다움'을 지켜내기 위한 철학에서 비롯된다. 배터리는 단순한 에너지 저장 장치를 넘어, 차체 구성과 주행 감각까지 영향을 주는 핵심 구조로 작용한다. 하이코 마이어 포르쉐 에너지 시스템 부사장은 "배터리는 스포츠카의 심장이며, 전동화 시대에도 포르쉐가 추구하는 운전의 본질을 지켜주는 철학적 기반"이라며 "이는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포르쉐가 지켜야 할 정체성 그 자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