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 무관의 설움 딛고 우승 감독으로

최창환 2025. 7. 5. 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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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프볼=최창환 기자]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이 있다. 1등만 기억하는 프로의 세계에서 쓴맛을 보며 야인이 됐지만, 포기하지 않고 문을 두드린 끝에 ‘우승 감독’이 된 이들에게 더없이 어울리는 표현 아닐까. “강한 자가 오래가는 게 아니라 오래가는 게 강한 자다”라는 영화 속 명대사를 실천으로 옮겼던 감독들을 돌아봤다.
※ 본 기사는 농구전문 매거진 점프볼 7월호에 게재됐습니다.

불명예 퇴진한 SK 창단 감독, 삼성 역대 최고의 감독으로
우승 경력이 없는 상태에서 팀을 옮긴 후 우승 감독이 된 최초의 인물은 김동광 전 서울 삼성 감독이다. 안양 SBS(현 정관장) 창단 감독을 맡아 1997-1998시즌까지 지휘봉을 잡았던 김동광 감독은 1998년 삼성 감독으로 자리를 옮겼다. 삼성을 꾸준히 플레이오프에 올려놓았던 그는 2000-2001시즌에 주희정, 아티머스 맥클래리를 앞세워 통합우승을 안기며 우승의 한을 풀었다.

2호 사례는 유재학 전 울산 현대모비스 감독(현 KBL 경기본부장)이다. 인천 대우의 2대 감독으로 임명된 후 신세기-SK 빅스를 거치며 인천 연고 팀에서만 감독 커리어를 쌓았던 유재학 감독은 2003-2004시즌 전자랜드(현 대구 한국가스공사)를 4강으로 이끈 직후 계약이 만료돼 현대모비스로 자리를 옮겼다. 이후 스토리는 독자들이 알고 있는 그대로다. 현대모비스에 6차례 챔피언결정전 우승을 안기며 역대 최고의 명장 반열에 올랐다.

다만, 김동광 감독과 유재학 감독은 두 번째 팀으로 자리를 옮기는 동안 별다른 공백기를 거치지 않았다. ‘백수’였던 시절없이 우승 감독이 됐다는 의미다. 야인을 거쳐 무관의 한을 푼 최초의 인물은 안준호 현 남자대표팀 감독이다.

실업 시절 10년 동안 코오롱 여자농구단 코치-감독을 맡았던 안준호 감독은 여자대표팀 코치를 거쳐 1996년 청주 진로의 창단 감독으로 KBL 지도자 커리어를 시작했다. 다만, 진로는 세상의 빛을 보지 못했다. ‘청주 진로 맥카스’라는 팀명을 발표하며 경남 LG(현 창원 LG)와 함께 신생 구단으로 리그에 참가할 준비를 마쳤지만, 1997년 IMF 외환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며 농구단을 매각했다.

진로를 인수한 팀이 바로 SK다. SK는 진로의 코칭스태프, 선수단을 모두 승계하며 막내 구단으로 뛰어들었다. 여자대표팀 차기 감독 후보로 꼽히는 등 여자농구에서 인정받은 지도자였지만, 안준호 감독에게 SK 시절은 흑역사였다.

창단 첫 시즌이었던 1997-1998시즌 최하위(13승 32패)는 전력상 어느 정도 예견된 성적이었지만, 1998-1999시즌은 큰 기대 속에 맞이한 시즌이었다. 스카우트 과정에서 진통을 겪었던 서장훈, 1998 신인 드래프트 1순위 현주엽이 나란히 데뷔한 시즌인 만큼 플레이오프 이상을 목표로 내걸었다.

기대와 달리 SK는 시즌 개막 후 6경기에서 1승에 그쳤다. 서장훈과 현주엽이 2경기 만에 1998 방콕 아시안게임 대표팀에 차출된 여파를 극복하지 못했고, SK는 1라운드도 끝나지 않은 시점에 안준호 감독을 경질하며 새판을 짰다.

“서장훈, 현주엽이 팀 전력의 전부나 다름없었는데 대표팀에 차출되니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었다. 어쨌든 프로의 세계고, 감독은 책임을 져야 하는 자리다. 6경기 만의 경질이라 충격이 컸지만, 기대에 못 미쳤으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안준호 감독의 회고다.

이후 한국스포츠TV 해설위원, UCLA 객원 코치를 거쳤던 안준호 감독은 코치부터 다시 시작했다. 2000년 수원 삼성(현 서울 삼성) 코치로 선임됐고, 김동광 감독을 보좌하며 삼성의 창단 첫 통합우승을 함께했다. 2002-2003시즌을 끝으로 삼성 코치에서 물러나며 다시 자리를 비웠지만, 그가 KBL로 돌아오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2004년 김동광 감독의 뒤를 잇는 3대 감독으로 임명되며 삼성에 돌아왔다.

삼성전자 출신 최초로 삼성 감독에 오른 인물이 된 안준호 감독은 이후 2010-2011시즌까지 7시즌 동안 삼성을 이끌었다. 성적도 훌륭했다. 7시즌 모두 플레이오프로 이끄는 등 삼성에서 203승 174패를 기록했다.

안준호 감독은 삼성에서만 200승 이상을 거둔 유일한 감독이며, 2005-2006시즌에는 챔피언결정전 우승까지 안겼다. 당시 삼성은 챔피언결정전에서 울산 모비스(현 현대모비스)를 4승 무패로 꺾었으며, 이는 KBL 역대 최초의 챔피언결정전 스윕이었다. SK에서 불명예 퇴진했지만, 삼성에서는 역대 최고의 성과를 거둔 감독으로 이름을 남긴 것이다.

안준호 감독은 “세상만사가 그렇겠지만, 잃는 게 있으면 얻는 것도 있다. 유학을 다녀온 게 많은 공부가 됐고, 삼성 구단도 전폭적으로 지원을 해준 시기였다. 삼성에서는 즐겁게 지도자 생활을 했기 때문에 물러날 때도 미련이 없었다. 다만, 이후 삼성이 오랫동안 침체기에 빠져 마음 아픈 부분은 있었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연세대, 고려대를 나오지 않은 사람이 더 많은 세상에 살고 있다”
매니저-구단 사무국을 거쳐 감독까지. 나열한 코스를 보면 떠오르는 인물 2명이 있다. 전창진 전 KCC 감독과 추일승 전 남자대표팀 감독이다. 전창진 감독이 청소년 대표-명문 고려대를 거친 반면, 추일승 감독은 소위 말하는 ‘비주류’였다. 지금은 해체된 홍익대 농구부 출신으로 실업팀 기아자동차에 입단했지만, 벤치만 달구다 24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은퇴했다.

그래도 ‘황소’라는 별명답게 뚝심이 있었다. 기아자동차 공장노무관리팀을 시작으로 농구단 매니저-사무국을 거치며 안정적인 길을 걷는 듯했지만, 추일승 감독은 1997년 상무 코치 제의를 받은 후 주저 없이 사표를 던졌다. 1990년대 후반 5000만 원 이상의 연봉을 받는 대기업 과장에서 6급 군무원이 된 그의 연봉은 기아 시절에 비하면 1/3에 불과했지만, 지도자라는 꿈 앞에서 돈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기아에서 매니저 생활을 하며 최인선 감독님을 모셨는데 그땐 이상하게도 코치가 따로 없었다. 그래서 실질적으로 코치 겸 매니저 역할을 했고, 최인선 감독님의 말동무가 돼 농구에 관한 얘기를 많이 나눴다. 그러면서 ‘나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할까?’라는 생각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지도자에 관심이 생겼다.” 추일승 감독의 말이다.

상무 코치-감독을 거친 추일승 감독에게 2003년, 일생일대의 기회가 찾아왔다. 모기업의 부도로 구단 운영이 불투명한 상황에서도 ‘4강 신화’를 이룬 이상윤 감독대행이 SK 신임 감독으로 자리를 옮기자, 코리아텐더는 추일승 감독에게 러브콜을 보냈다.

사실 추일승 감독은 상무 감독 시절 복수의 프로팀으로부터 코치 제의를 받았지만, 모두 거절한 터였다. 비주류였던 만큼 코치가 아닌 감독으로 자신의 농구를 보여줄 수 있는 기회가 오길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추일승 감독은 “남들은 실패해도 또 기회가 오지만, 나에게 실패는 곧 죽음이었다. 비주류라는 프레임 속에 차별도 받았고, 끌어줄 선배도 없었다. 예를 들어 모시고 있는 감독님이 경질된다면, 코치들은 모두 짐을 싸야 한다. 그러면 비주류인 나에게 다음 기회가 올까. 내가 추구하는 농구를 보여주지도 못하고 끝나면 억울할 것 같았다”라고 회상했다.

추일승 감독은 프로 감독이 된 후 능력을 발휘했다. 시즌 준비가 원활하지 않았던 2003-2004시즌은 8위에 그쳤지만, KTF(현 KT)가 코리아텐더를 인수한 후 치른 두 번째 시즌이었던 2004-2005시즌에 플레이오프로 이끌며 지도력을 인정받았다. 2005-2006시즌은 FA 현주엽이 떠났으나 FA 신기성을 영입했고, SK와 방성윤이 포함된 3대3 빅딜까지 단행하며 새판을 짰다. 이를 토대로 또다시 플레이오프에 오른 것은 물론, 2006-2007시즌에는 팀 창단 첫 챔피언결정전 진출까지 이끌었다.

지도자가 된 후 쉼 없이 달려왔던 추일승 감독은 이후 잠시 쉼표를 찍었다. 트레이드, 외국선수 선발 실패로 두 시즌 연속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 2008-2009시즌을 끝으로 KTF를 떠났다. 농구를 멀리한 건 아니었다. MBC스포츠 플러스 해설위원을 맡아 견문을 넓혔고, 2009년 농구 전문 웹사이트 ‘바스켓코리아’ 대표를 맡아 패턴을 비롯해 다양한 분석 글을 게재하며 끊임없이 연구했다.

그러자 명예 회복의 기회가 찾아왔다. 2011년 고양 오리온의 신임 감독으로 임명되며 KBL로 돌아왔다. 2011-2012시즌만 8위에 그쳤을 뿐, 오리온은 추일승 감독 부임 후 강팀의 면모를 되찾았다. 2012-2013시즌 5위에 오르며 김승현 시대 이후 처음으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고, 이후 2016-2017시즌까지 플레이오프에 개근했다.

이 기간에 지도자 역사상 최고의 시즌도 만들었다. 2015-2016시즌 정규리그 3위에 그쳤지만, 4강에서 모비스에 스윕을 따낸 데 이어 챔피언결정전에서는 정규리그 우승팀 KCC를 꺾으며 감독 부임 후 첫 우승의 기쁨을 맛봤다.

시리즈 전적은 4승 2패였지만, 3승이 20점 차 이상의 완승이었을 정도로 추일승 감독이 내세운 포워드 기반의 농구는 KCC를 압도했다. 허일영, 김동욱, 장재석, 이승현 등 꾸준히 포워드를 수집한 가운데 문태종과 애런 헤인즈를 영입하며 화룡점정을 찍었고, 시즌 초반 퇴출 여론이 들끓었던 조 잭슨은 화려한 백조가 됐다. 6차전에서 기록한 120점은 여전히 챔피언결정전 1경기 최다득점 타이기록으로 남아있으며, 34점 차(120-86)는 챔피언결정전 역대 최다 점수 차 공동 2위다.

“우승하면 울 줄 알았는데 점수 차가 커서 눈물이 나오진 않는다”라며 머쓱하게 웃은 추일승 감독에게 비주류 출신 감독의 첫 우승이라는 질문이 전달됐다. 그러자 “내가 원래 술을 싫어한다”라는 ‘아재 개그’를 남긴 추일승 감독은 이내 취재진에게 깊은 울림을 남겼다.

“비주류, 우승 못 한 감독이라는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지만 내가 어느 학교를 나왔는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연세대, 고려대를 나오지 않은 사람이 더 많은 세상에 살고 있다. 그럼 연세대, 고려대를 나오지 않은 사람이 주류 아닌가. 내가 부끄럽지 않게 노력한다면 죽을 때까지 우승 못 하더라도 부끄럽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팀을 이끌어왔다.” KBL 출범 초기 또는 2000년대는 모르지만, 적어도 내가 기자가 된 2010년 이후 들은 우승팀 감독 코멘트 중에선 가장 깊은 여운이 남은 소감이었다.

대행의 아이콘, 와이어 투 와이어로 보상받았다
KBL 출범 후 수많은 감독, 감독대행이 팀을 이끌었다. 김지홍 SK 코치는 김진 감독이 물러난 후 신선우 신임 감독이 부임하기 전까지 감독대행으로 3경기를 이끌었는데 모두 패했다. 감독, 감독대행 통틀어 유일하게 승을 거두지 못한 사례다.

김병철 코치는 2019-2020시즌 막판 추일승 감독이 자진사퇴하며 감독대행이 됐다. 2경기에서 1승 1패를 기록한 후 코로나19 여파로 시즌이 조기종료돼 가장 적은 경기를 치른 감독 또는 감독대행으로 남아있다.

사연 없는 감독이 있겠냐만, 김상식 감독처럼 산전수전 다 겪은 감독이 또 있을까. SBS에서 은퇴한 후 SBS-KT&G를 거치며 코치로 지도자 경력을 쌓았던 김상식 감독은 2006-2007시즌 초반 김동광 감독이 경질된 직후 감독대행으로 임명됐다.

성적은 무난했다. 김동광 감독 체제에서 6승 10패에 그쳤던 KT&G는 김상식 감독대행 임명 후 10승 9패를 기록했다. 2006-2007시즌 막판 유도훈 감독이 부임, 김상식 감독은 본업인 코치로 돌아가 시즌을 마쳤다.

이후 대구 오리온스 수석코치로 자리를 옮겨 지도자 커리어를 이어갔다. 이충희 감독이 2007-2008시즌 성적 부진을 이유로 지휘봉을 내려놓자, 김상식 감독은 다시 감독대행으로 팀을 수습했다. 이어 2008-2009시즌 오리온스의 5대 감독으로 부임했지만, 16승 29패에 그쳐 중도 하차했다.

코치-감독대행 경력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김상식 감독은 2012년 삼성 감독으로 돌아온 김동광 감독을 보좌하는 코치를 맡았다. 삼성은 2012-2013시즌 ‘네가 가라 6강’ 경쟁 속에 플레이오프 티켓을 따냈지만, 2013-2014시즌에 다시 익숙한 자리로 돌아갔다. 김동광 감독이 5라운드 초반 물러났고, 김상식 감독은 감독대행으로 막판 15경기를 치른 후 삼성을 떠났다. 한 번 하기도 힘든 KBL 감독대행을 세 차례나 경험한 것(심지어 남자대표팀에서도 자진 사퇴한 허재 감독의 뒤를 이어 감독대행을 맡은 바 있다). 이때까지 김상식 감독의 KBL 통산 전적은 107경기 39승 68패 승률 .364.

번번이 전력이 약했던 팀을 맡아 유의미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던 김상식 감독에게 생각지도 못한 기회가 찾아온 건 2022년이었다. 김승기 감독이 데이원 창단 감독으로 자리를 옮기며 공석이 생긴 KGC(현 정관장)가 김상식 감독에게 러브콜을 보냈다.

김상식 감독으로선 지도자 커리어를 시작했던 친정으로의 복귀였다. 그간 KBL 감독 커리어는 순탄치 않았지만, 탄탄한 전력을 지닌 KGC는 김상식 감독의 지도자 경력에 매우 큰 이정표로 남았다.

김상식 감독 부임 전에도 두 시즌 연속 챔피언결정전에 진출할 정도로 경쟁력을 보여줬던 KGC는 2022-2023시즌에 구단 역사상 최고의 성과를 거뒀다. 개막 4연승으로 시즌을 시작한 후 시즌 내내 1위를 놓치지 않으며 역대 3호 와이어 투 와이어를 달성했다. 이어 4강에서 캐롯을 3승 1패로 꺾었고, 챔피언결정전에서는 역대 최초 7차전 연장 사투 끝에 SK를 제압하며 V4까지 달성했다.

단순히 호화 전력이어서 거둔 성과는 아니었다. 김상식 감독은 호통 대신 소통, 칭찬으로 선수단을 지휘하며 ‘식버지’라는 별명을 얻었고, 대표팀 시절부터 즐겨 구사했던 얼리오펜스도 KGC에서 위력을 더했다. 앞서 언급한 안준호, 추일승 감독은 받지 못했던 감독상도 수상하며 불운했던 그간의 감독 커리어를 보상받았다.

‘우승 청부사’ 계보, 누가 있었나?
우승 경력 없이도 가치를 인정한 팀으로 옮겨 우승을 안긴 감독들이 있었듯, ‘우승 청부사’ 임무를 완수한 감독들도 있었다. 챔피언결정전 우승 경험이 있는 감독이 새로운 팀에도 우승을 안긴 사례는 단 2명에 불과했다.

최초의 인물은 최인선 전 감독이다. KBL 원년인 1997시즌 부산 기아(현 현대모비스)를 통합우승으로 이끌었던 최인선 감독은 1998-1999시즌 초반 물러난 안준호 감독의 뒤를 이어 SK 지휘봉을 잡았다.

최인선 감독은 SK 감독 부임 2년 차 시즌에 성과를 거뒀다. 구단 고위층의 만류에도 현주엽을 슈터 조상현과 맞바꾸는 빅딜을 단행했고, 이를 통해 포지션별 짜임새를 더해 ‘현대 천하’를 무너뜨렸다. SK는 정규리그 준우승에 이어 챔피언결정전에서 대전 현대(현 부산 KCC)를 4승 2패로 제압, 창단 3년 차 시즌에 V1을 달성했다.

두 번째 사례는 전창진 전 감독이다. 원주 TG-TG삼보-동부(현 DB)를 거치며 세 차례 챔피언결정전 우승을 경험했던 전창진 감독은 KT에서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 KCC에서 자존심을 회복했다. 최준용을 영입, ‘슈퍼팀’을 결성한 2023-2024시즌에 정규리그 5위 최초의 챔피언결정전 우승을 안겼다.

2024년 오프시즌 새롭게 지휘봉을 잡은 5명의 신임 감독 가운데 챔피언결정전 우승 경험이 있는 이는 문경은 수원 KT 감독이 유일하다. 문경은 감독이 역대 3호 2개 팀 우승 감독에 도전하는 가운데 이상민 KCC 감독은 김승기-전희철-조상현에 이어 선수, 코치, 감독으로 모두 우승한 역대 4호 사례를 노린다.

‘우승 청부사’로 임명됐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감독도 있었다. 앞서 언급한 KT 시절 전창진 감독을 비롯해 신선우, 김승기, 김진, 이상범 감독은 처음 감독을 맡았던 팀에서 챔피언결정전 우승을 이뤘으나 팀을 옮긴 후에는 우승 경력을 추가하지 못했다. 김동광 감독도 삼성에 첫 우승을 안긴 후 SBS로 금의환향했지만, 우승 횟수를 추가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사진_점프볼DB(문복주, 유용우, 박상혁 기자), KBL PHOT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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