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살의 기억에서 역전의 주인공까지… 김현수, 가을 사나이의 완성. FA 어디로 갈까?

가을의 무게를 버티는 법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김현수는 그 소수를 대표하는 얼굴이 됐다. 20년 전 신고선수로 시작해 “타격 기계”라는 별명을 얻기까지, 그리고 한때 “큰 경기에서 약하다”는 낙인을 등에 달았던 시간까지. 지난 10월 31일, 대전에서 열린 한국시리즈 5차전 종료와 함께 그는 그 모든 문장을 새로 썼다. 시리즈 타율 0.529(17타수 9안타) 1홈런 8타점, 출루와 장타를 합친 OPS 1.342. 기자단 표 68.5%를 쓸어 담은 한국시리즈 MVP. 통산 세 번째 우승 반지. 숫자도 화려하지만, 정작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 건 장면이었다. 4차전 9회, 두 점을 쓸어 담은 역전 적시타. 5차전 1회 선취타점과 6회 쐐기타. 필요할 때 필요만큼, 한 번도 서두르지 않고 가장 정확한 답을 꺼내 놓는 노장의 타석. 그게 바로 ‘가을 사나이’의 본문이다.

김현수의 한국시리즈 서사는 2008년 5차전 9회 1사 만루, 끝내기 병살타에서 시작한다. 타율 0.048. 어린 타자는 울었고, 팀은 고개를 숙였다. 그 기억은 길었다. 이후에도 준우승이 두 번 더 쌓였다. 그러다 2015년, 그는 타율 0.421로 첫 우승을 품었다. “못해도 괜찮다, 배울 게 있다”는 태도가 몸에 붙은 뒤였다. 올해 가을, 그는 같은 질문에 더 간결하게 답했다. “그때의 배움이 지금을 만들었다.”

4차전 9회 2사 2·3루, 박상원의 148㎞ 직구를 우전으로 밀어 의도를 꺾었다. 한 박자 빠른 힘대힘이 아니라, 공의 궤적이 완성되는 지점까지 기다린 뒤 손목으로 마무리한 스윙. 5차전 1회 선제 적시타는 이닝 톤을, 6회 추가타는 시리즈의 방향을 바꾸었다. 남들이 드라마라고 부르는 순간을, 그는 루틴으로 풀어냈다.

김현수는 늘 우승이란 결과를 “좋은 팀, 좋은 후배, 좋은 선배와 함께 탄 버스”의 산물로 돌려왔다. 겸손이기도 하지만 사실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 시리즈만큼은 그가 운전대를 잡았다 해도 과하지 않다. 오스틴이 침묵하고 타선의 일부 톱니가 덜그럭댈 때, 김현수는 매 이닝의 ‘문지기’였다. 1회 첫 타점을 만들면 경기는 LG의 템포로 내려앉았고, 승부처마다 볼카운트를 유리하게 설계해 상대 배터리를 지치게 했다. 37세의 방망이는 거꾸로 갔다. 더 정확해졌고, 더 단단해졌다.

이번 가을 동안 그는 포스트시즌 통산 최다 안타 기록을 경신했다(101개를 넘어 100개대 초반까지). 루타 149개로 역대 공동 1위, 타점(63), 볼넷(51) 역시 1위 기록을 더 늘렸다. 하지만 그 모든 기록을 묶는 문장은 따로 있다. “결정적 순간에 믿을 수 있는 타자.”

가을은 초구의 스트라이크 하나가 바늘구멍이 되는 계절이다. 김현수는 그 구멍을 넓힌다. 존을 좁혀 초구에 억지로 방망이를 내지 않고, 1-1로 맞추고, 실투가 들어오면 스피드 대신 궤적을 친다. 이 단순한 답을 20년 내내 반복하기란 쉽지 않다. 그래도 그는 한다. 그래서 감독은 타순을 쉽게 바꾸지 못하고, 상대 덕아웃은 ‘그 타자’의 타석을 계산하며 불펜을 움직인다. 이게 베테랑이 팀에 주는 가장 큰 가치다. 점수판에 찍히지 않는, 그러나 흐름을 바꾸는 힘.

올해 LG가 다시 정상에 선 건 ‘선발의 힘’과 ‘수비의 완성도’ 덕분이었다. 하지만 어느 시점이 되면 경기는 결국 타석으로 돌아온다. 1·2차전, LG가 잠실에서 흐름을 잡을 수 있었던 이유, 4차전 대역전극의 중심, 5차전 어웨이에서의 침착한 마무리—세 문장의 주어는 같았다. 김현수.

그의 타격은 스윙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더그아웃에서의 톤, 루틴을 나누는 방식, 어려운 후배에게 건네는 짧은 말. “오늘은 못해도 내일은 있다”는 말이 과감한 승부를 가능하게 하고, “지금은 이 공 하나만 치자”는 주문이 팀 전술을 단순하게 만든다. 20년 차의 야구는 결국 사람을 움직이는 일에 가깝다. 그는 그걸 안다.

우승 세리머니 뒤, 대전 외야에서 들려온 함성은 한 문장으로 모였다. “재계약!” 김현수는 “앞으로도 계속 봤으면 좋겠다”는 인사를 남기며 “이번 주까지는 즐기고, 에이전트와 상의하겠다”고 했다. 이제 시장의 시선이 그에게 모인다.

계약의 액수나 기간은 구단의 예산과 팀 구성, 보상 규정, 선수의 의지라는 여러 변수로 정해진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그는 단지 ‘타격 좋은 좌익수’가 아니라, 포스트시즌 구조를 이해하고 클럽하우스의 공기를 안정시키는 ‘문화의 축’이라는 점이다. LG가 ‘왕조의 길목’에 서려면, 성적표를 넘어선 이런 축이 필요하다. 젊은 코어가 성장하고 외국인 에이스가 바뀌어도, 가을이라는 좁은 문 앞에서 팀을 통과시킬 사람이 한 명은 있어야 한다. 지금 LG에서 그 이름을 다른 누구로 바꾸기 어렵다.

나이는 숫자지만, 팀은 숫자를 경영한다. 그래서 FA 협상은 냉정해진다. 그럼에도 김현수의 다음 2~3년은 단순한 곡선으로 그릴 수 없다. 올 시즌 그는 “유지”를 최우선 목표로 놓았고, 실제로 출전·컨디션·성적의 세 축을 균형 있게 채웠다. 하체를 먼저 쓰고 손목으로 마감하는 ‘짧은 결론’은 구속이 빨라져도, 변화구가 깊어져도, 시차가 생겨도 통하는 해법이었다.

현실적으로는 120경기 안팎의 출전과 휴식 설계를 병행하고, 좌완 파워피처 상대로는 타순·매치업을 유연하게 조정하는 그림이 합리적이다. 단, 가을만큼은 건강하기만 하다면 그를 빼기 어렵다. 가을야구의 공격 설계에서 ‘좌타 베테랑의 컨택+결정력’은 리그가 변해도 여전히 금값이다.

김현수는 늘 “버스를 잘 탔다”고 말한다. 하지만 버스에는 기사도 필요하다. 2023년과 2025년, LG의 버스는 그가 방향을 정했고, 톨허스트·임찬규·손주영 같은 선발이 속도를 올렸고, 오지환·문보경이 길목을 지켰고, 박동원·신민재가 승객을 태웠다. 그 구조가 깨지지 않는 한, LG는 계속 먼 곳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그림 속에 김현수가 자연스럽게 들어 있다. 그는 말한다. “반지 목표는 다섯 개.” 허황해 보이지 않는다. 팀이 그를 필요로 하고, 그는 아직 스스로를 이길 준비가 돼 있다.

가을이 알려준 건 단순했다. 어떤 타자는 기회를 만들고, 어떤 타자는 기회를 마무리한다. 김현수는 두 가지를 모두 할 줄 안다. 그래서 그는 ‘이제는’이 아니라 ‘원래’ 가을 사나이였는지도 모른다. 다만 우리가 그걸 확신하게 된 게 올해일 뿐. 시즌의 마지막 밤, MVP 트로피를 안고도 그는 조용히 말했다. “앞으로도 계속 봤으면.” 팬들이 그 문장을, 오래도록 야구장에서 다시 듣게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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