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의 공간>'성장통' 잔혹했던 그곳.. 여유 잃은 욕망이 달린다




유하 감독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의 배경 양재동
영동 개발 ‘말죽거리 신화’탄생
78년 78번 버스 다니던곳 배경
폭력난무 정문고로 주인공 전학
꼴찌반 교실은 조폭 아지트같아
영화속 학교 - 독서실 옥상 장면
액션 활극·첫사랑 멜로‘대조적’
광역버스만 50여개 노선 경유
환승객들 가득찬 교통 요충지
부동산 투기 ‘황금땅’ 떠올라
말죽거리에 나타난 희한한 무법자들의 별천지 세상! 황금 땅으로 변모한 말죽거리를 (중략)… 천하의 복부인들의 놀이터가 바로 이곳의 예전 풍경이며 울고 웃는 희비애락의 말죽거리올시다.”
1970년에 개봉한 한국영화 ‘당나귀 무법자 1970’(감독 안일남)의 포스터에 적힌 카피다. 구봉서, 서영춘 등 1970년대 코미디언이 출연한 한국판 서부극인 영화는 엔리오 모리코네의 음악에, 시가를 문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폼 나게 망토를 걸치고 나오는 마카로니 웨스턴 ‘황야의 무법자’(감독 세르지오 레오네)를 패러디한 영화다.
영화 포스터에서 지목한 ‘황금 땅, 복부인들의 놀이터’인 말죽거리가 바로 지금의 서울 양재역 일대다. 행정구역상 서울시 서초구 양재동 양재역 사거리 일대를 가리킨다. 어질고 재주 있는 사람이 많이 살던 곳이라 양재역(良才驛)이다.
말죽거리는 조선 시대 말(馬)에게 죽을 끓여 먹였던 장소다. 양재역 사거리에 위치한 말죽거리 표지석엔 “양재역은 한양도성에서 충청도·전라도·경상도 등으로 나가고 들어오는 교통상의 요충지였다. 관리들은 역에서 대기하고 있는 말을 징발하거나 삼십 리마다 설치된 역에서 말을 바꿔 탈 수 있었으며 일반 백성은 먼 길을 가는 경우 역 부근 주막에서 여장을 풀고 말도 쉬게 하였다”고 적고 있다. 인조가 이괄의 난으로 충남 공주로 피란 갈 때 말 위에서 죽을 마셨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도 있다. 한자로 마죽거리(馬粥巨理)라고도 한다.
2018년 3월 현재, 양재 사거리에 세워진 말죽거리 표지석에서 바라본 풍경은 거리가 교차하고 환승하려는 사람들로 만원이었다. 이곳은 지하철 3호선·신분당선, 서울 주요 간선 도로인 강남대로·남부순환로가 교차하는 지역으로 광역버스만 50여 개 노선이 경유하는 곳이다. 경기 과천시, 성남시 등지로 가는 버스로 붐빈다. 수도권에 있는 대학에 가는 대형버스들이 유독 많이 보인다. 예나 지금이나 많은 여행자로 붐비는 교통 요충지임엔 틀림없어 보인다.
양재 사거리가 앞서 얘기한 영화 포스터처럼 ‘복부인들의 놀이터, 황금 땅으로 변모한’ 것은 1960년대 말 서울 강남이 대한민국 부동산 투기의 진원지가 되면서부터다. 영동(영등포 동쪽) 개발이 시작될 무렵 일어난 말죽거리 신화는 부동산 투기 붐의 서막이었다.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의 공간은 말죽거리다. 1978년, 강남 말죽거리의 정문고를 중심으로 시내버스 78번 서울여객(서울역-한남동-말죽거리) 노선이 다니는 지역이다.
영화 내용은 영어 제목 ‘스피리트 오브 절권도-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하이 스쿨, Spirit Of Jeet Keun Do-Once upon a Time in High School’에서 알 수 있듯이 미국 갱스터 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Once Upon A Time In America)에서 반쯤, 신상옥 감독의 ‘이조여인 잔혹사(李朝女人 殘酷史)’에서 반쯤 차용한 듯하다. 그래서 ‘옛날 옛적 1970년대 말, 고딩들이 겪었던 잔인하고 혹독한 이야기’쯤 된다.
주인공 현수(권상우)가 말죽거리로 이사 온 것은 강남 땅값이 크게 오를 거라는 엄마의 선견지명(?) 같은 결정 때문이다. 이사 온 현수 눈에 비친 당시 1978년 부동산 투기가 일던 말죽거리는 아직 구획 정리가 안 된 주택단지에, 짓다 남은 건축자재들이 한쪽에 방치돼 있고 군데군데 빈터엔 농작물들이 심긴 미완의 동네였다. 황무지 벌판에 이제 막 통나무집들을 지어 가는 서부 개척사의 웨스턴 거리처럼 조금은 황량한 곳이었다. 그러나 속내를 들춰보면 죽 한 그릇 먹을 여유도 없이 앞만 보고 달려가는 물욕(物慾)이 가득 찬 동네였다. ‘길이 정해졌으면 앞으로 나아갈 뿐’이라는 이소룡의 절권도를 닮은 동네였다.
현수의 공부방엔 이소룡이 있다. 책상 앞 벽엔 이소룡의 큰 브로마이드들이 붙어 있으며, 책꽂이에도 ‘수학1의 정석’ 옆엔 이소룡의 ‘절권도의 길’이란 책이 꽂혀 있다. 틈만 나면 어설프게 쌍절곤을 휘둘러 보는 현수의 유일한 꿈은 이소룡처럼 되는 것이다. 현수는 “사는 동안, 누구나 인생에서 제일 기억에 남는 시절이 있을 것이다. 내겐 1978년이 그런 해였다”고 말한다. 현수가 1978년에 만난 사람은 학교 ‘짱’인 우식(이정진), 78번 버스 안에서 만난 올리비아 핫세를 꼭 빼닮은 은주(한가인), 학교 짱 자리를 놓고 우식과 일전을 치른 선도부장 종훈(이종혁)과 포르노 잡지를 파는 햄버거(박효준) 등 친구들과, 폭력적인 선생님들과 교관, 교장 등이다. 이들 캐릭터 대부분은 현수에게 시련과 아픔을 준다. 열등감, 분노, 좌절, 고통 그리고 첫사랑의 설렘과 아픔을 준다.
현수가 전학 온 정문고는 악명 높기로 소문 났다.(현수 자신도 소문이 사실이 아니길 바랐던) ‘구국의 유신으로 새 역사를 창조하자’는 구호가 적힌 교문 밑으로 등교하는 학생들은 장병처럼 큰 소리로 ‘충성’을 외치며 경례를 올려붙여야 한다. 교복 호크를 풀어놓거나 칼라가 없거나 장발이면 완장 찬 선도부에 지적당하고, 바로 엎드려뻗친 상태에서 대걸레 몽둥이가 엉덩이에 사정없이 꽂히는 것을 감내해야 한다. 정문 통과가 이만저만 어려운 것이 아니다.
2학년 4반 현수가 배정받은 교실은 더 가관이다. 전교에서 꼴찌반이다. 그래서 담임 선생은 ‘똘팍 쌔끼들’이라고 대놓고 말한다. 현수의 짝은 전교 꼴찌인 함재복(햄버거)인데 담임이 ‘평균점수 깎아 먹는 쌔끼’라고 해도 히죽 웃는다. 책을 보는 학생은 거의 없다. 도시락 까먹고는 추리닝 차림으로 7∼8명이 모여 괴성을 질러대며 이소룡의 영화 ‘사망유희’를 직접 시연해 보이거나, 짤짤이 노름판에, 입만 열면 쌍욕에 은어, 비속어다. 외양만 교실일 뿐 조폭 아지트와 다름없다.
정문고 옥상은 ‘짱’을 가리는 장소다. 영화 ‘비트’ ‘방과후 옥상’ 등 학원물 옥상의 전형이다. 교실에서의 알력과 갈등, 사소한 폭력이 그 안에서 풀리지 못하고 한꺼번에 분출되는 곳이다. 싸움의 결과에 따라 서열이 완성되는 곳이기도 하다.
영화의 클라이맥스인 현수와 종훈의 옥상 대결은 같은 학원물 ‘비트’의 민(정우성)과 환규(임창정)가 벌이는 1대1 맞짱보다 훨씬 소란스럽게 공개적이다. 1대1 싸움이 아니라 1대5 개싸움이다. 교실에서 옥상으로 이동 중 현수의 선방으로 시작한 싸움은 수십 명의 ‘갤러리’를 몰고 다니며 6명이 엉켜 쌍절곤으로 머리, 얼굴을 닥치는 대로 가격하고 의자를 집어 던지고 창틀을 휘두르고 바닥에 눕혀 죽어라 때리는 그런 싸움이다. 한바탕 액션 활극이 된다.
사실 옥상만큼 ‘짱’을 가리는 데 안성맞춤인 곳도 없다. 우선 하늘이 있고 넓다. 탁 트인 공간이다. 주먹과 발길질도 크게 할 수 있어 실력 발휘를 제대로 할 수 있다. 그래서 깨끗이 승복할 수도 있다. “한판 붙자!” 해서 올라간 옥상은 둘 중 한 명이 쓰러지기 전까진 내려갈 수 없다. 이기든 지든 한 명은 대개 학교를 떠난다. 1978년 정문고 옥상에선 두 번의 맞짱이 있었는데 한 번은 종훈과 우식, 또 한 번은 종훈과 현수의 대결이었다. 종훈과 맞짱을 떠, 진 우식은 ‘쪽’ 팔려서 학교를 떠났고 종훈을 이긴 현수도 “대한민국 학교, ×까라 그래!”라고 외치며 떠났다. 현수의 자퇴는 웨스턴에서 검은 옷을 입은 악당을 처치하고 떠나는 흰색 모자를 쓴 정의의 사나이를 닮았다.
하지만 동네 독서실의 옥상은 정문고의 그것과는 다르다. 현수가 은주와 같이 음악을 들을 수 있는 밤하늘에 별이 보이는 옥상이다. 은주가 신청한 감미로운 선율의 모리스 알버트의 ‘필링(Feelings)’을 들을 수 있는 곳이며, 현수가 은주를 생각하며 듣던 진추하의 ‘원 서머 나이트(One summer night)’를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은주와 옥탑방이라도 마련하고픈 멜로 드라마의 클리셰인 옥상이다. 은주와 함께 밤하늘을 보며 날씨를 점쳐 보는 그런 곳이다.
옥상은 현수와 은주의 가슴 시린 첫사랑을 키워준 곳이자 아픔을 주는 장소다. 은주를 짝사랑했던 현수는 우식이 쉽게 얻는 사랑도 어렵기만 하다. 맨날 끙끙 앓다 말 한마디 못 한다. 우식과 헤어져 현수에게 어렵사리 찾아온 사랑이지만 그 역시 우식의 가출로 사라진다.(헤어진 줄 알았던 우식과 은주는 함께 잠적한다.) 큰 슬픔에 빠져 옥상을 찾아간 현수는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여고생이 뛰어내려 자살하는 ‘여고괴담’의 옥상으로 생각도 해 보지만 그마저 용기가 없어 못 한다.
현수에게 이동 공간인 버스도 각별하다. 은주를 처음 본 곳이고 그녀를 마지막으로 보낸 곳도 78번 버스다. 버스에서 은주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몰래 키워온 현수는 은주가 ‘하늘 같은’ 고3 형들한테 성희롱당하는 위기의 순간에 대담하게 나타나는 수호 기사였다.
하지만 1년 후 78번 버스에서 재회한 현수와 은주는 재수생이다. 하긴 현수는 제 발로 학교를 걸어 나왔고, 은주 역시 고3 때 고고장에 가고, 땡땡이치고 남이섬에 가 연애를 했으니 대학에 들어갔다면 그게 이상할 것이다. 현수는 은주에게 힘없이 웃으며 말한다. “나 학원 다녀… 대학은 가야지.” 실패하고 좌절하며 성장통을 겪은 두 청춘이 뒤늦게 현실과 다시 조응하려는 마음이 더 잔혹해 보이는 대목이다. 두 재수생은 멜로 전쟁영화 ‘닥터 지바고’의 남녀 주인공 의사 지바고와 라라처럼 떠나가는 버스를 사이에 두고 헤어진다. 이와 함께 78번 버스 백미러에 비친 1978년 말죽거리도 한 점이 될 때까지 멀어져 간다.
김병재 영화평론가· 시나리오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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