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 연산군은 살결이 희고 호리호리한 '아이돌 스타일'
[고전으로 읽는 우리역사-42] "연산의 얼굴을 쳐다보니 빛은 희고 수염은 적으며 키가 크고 눈에는 붉은 기운에 있었습니다."
조선 제10대 왕 연산군(1476~1506·재위 1494~1506)을 직접 본 목격자는 폭군의 얼굴을 이렇게 묘사했다. 조선의 임금들은 어진, 기록 등을 종합해 볼 때 대체로 수염이 풍성하지 않으며 연산군 역시 그런 특징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대신 왕들은 영양상태가 좋고 운동량이 적어 비만형이 많았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연산군은 그와 달리 키가 크다고 느낄 만큼 마른 체형이었던 것으로 목격자는 언급한다.
인조 때 우찬성을 지낸 이덕형의 수필집 '죽창한화'에 나오는 얘기다. 여기서 이덕형은 오성과 한음 설화의 주인공 중 한 명인 이덕형과는 다른 인물이다. 이덕형은 임진왜란 이듬해인 1593년(선조 26) 난리를 피해 전라도 진안에 머물렀다. 그곳에서 97세 노인과 만났다. 노인은 7세 때부터 군역이 부과돼 서울에서 향군(鄕軍)으로 근무하면서 연산군을 만났다고 했다. 노인은 조금도 떠듬거리지 않고 연산군의 인상을 얘기했으며 당시 상황도 정확히 떠올렸다.
"연산이 전교(중랑천 살곶이다리)에 거동할 때 역군으로 따라갔다. 화양정(성동구 살곶이목장 내에 있던 정자) 앞에 목책을 세우고 각읍에 예치했던 암말 수백 마리를 가둔 다음 연산이 정자에 자리를 잡으니 수많은 기생만이 앞에 가득했고 신하들은 물리쳤다. 마관(馬官)이 수말 수백 마리를 이 목책 안으로 몰아넣어서 그들의 교접하는 것을 구경하였다. 여러 말이 발로 차고 이로 물면서 서로 쫓아다니는 그 소리가 산골짜기를 진동했다. 그해 가을 반정이 일어났다."
흥미롭게도 실록에서도 연산군 외모에 대한 기술이 발견된다. 1504년(연산군 10) 음력 2월 7일 기록에 따르면 전라도 부안현 소속 군사인 김수명은 잠깐 서울에 올라와 있으면서 연산군을 잠시 봤다. 그는 이웃집 사람에게 "인정전(창덕군 정전)에서 호위하며 명나라 사신 접견식을 보니 사신은 우뚝 서서 잠시 읍만 하고 주상은 몸을 굽혀 예를 표시하는데 허리와 몸이 매우 가늘어 그다지 웅장하고 위대하지 못하더라"고 자랑했다가 고발당했다. 역시 이덕형이 만났던 노인의 주장과 별반 다르지 않다. 이를 종합해볼 때 연산군의 모습은 살색이 희고 키가 크며 호리호리한 미남형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책은 저자 자신이 겪은 풍속, 제도, 당쟁, 인재, 풍수 등을 주제에 제약 없이 기술한다. 학문을 익히다는 의미의 공부(功夫)라는 단어에 왜 지아비 부(夫)자가 쓰인 것일까. 공부라는 말의 유래는 지금까지도 전해지는 바가 없다. 명종도 이를 궁금해했다. "명묘(明廟) 때 참찬(정2품) 조언수가 특진관으로 경연에 들어가 모셨다. 상이 묻기를 '공부(功夫)라는 두 자의 뜻이 무엇이오' 하니 좌우 사람들이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이때 조공이 앞으로 나가 말하기를 '공은 여공(女功)이요, 부는 전부(田夫)입니다. 이 말은 선비가 부지런히 배우는 것은 마치 여자가 길쌈을 부지런히 하고 농부가 농사를 부지런히 하는 것과 같이 하라는 뜻이옵니다' 하니 상은 이 말을 아름답게 여겼다."

"이산해가 처음 났을 적에 토정이 그 우는 소리를 듣고 맏형에게 말하기를 '이 아이가 기이하니 잘 기르도록 하십시오. 우리 집이 이제부터 다시 일어날 것입니다' 하였다. 다섯 살이 되자 처음 병풍 글씨를 쓰는데 붓 움직이는 것이 신과 같고 글자 획이 완연히 용과 뱀이 달려가는 것 같았으므로 신동이라고 명성이 자자하여 당시의 고관들이 와서 보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일찍이 먹물을 발바닥에 칠하고 종이 끝에 찍어 어린 아이의 발자국임을 표시했으며 인가에서 지금도 전해오면서 보고 있다."

효령대군 손자의 사위 현석규(1430~1480)는 1460년(세조 6)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벼슬이 정2품 우참찬에 이르렀다. 성품이 정직하고 청렴했고 공사처리가 명석했다. 이덕형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세종이 백 보 밖에서 우연히 한 번 바라보고서 통달한 사람과 귀한 손님을 알아봤으니 대성인의 식견이란 남보다 훨씬 뛰어난 법이다. 효령은 바로 나의 외가의 선조이고 찬성 이직언은 효령의 직계 자손이어서 늘 이 일을 말하면서 감탄하였다."
세태 고발도 빠지지 않는다. 과거시험은 조선 중기부터 부패하기 시작했다. 이미 그 시절 부정행위는 고질적 병폐였다. "우리나라에서 공정한 것은 오직 과거뿐이었다. 그러나 임진년 병란이 있은 후에 풍조가 크게 변하고 법기강이 해이해져서 한두 시험관이 과거 시험장에서 부정행위를 행한 것이 시초가 되어 그 폐단이 점점 만연되어 폐조(廢朝·광해군) 때에 이르러 가장 심했으니 큰 둑이 한 번 무너지자 염치가 모두 없어져서 돈에 환장한 사람보다도 심하였다."

퇴계 이황의 서울 집은 서소문동에 있었다. 퇴계의 집에 오래된 소나무가 있었다. 이 나무는 임진왜란 때도 무사했지만 공교롭게도 당쟁의 과정에서 그만 죽어버렸다. "퇴계 선생의 옛집은 서울 서소문동에 있었다. 뜰에 늙은 노송나무가 있는데 길이가 수십 길이나 되었다. 난리를 치른 뒤 서울 안에 있던 큰 나무들이 남은 것 없이 다 없어졌건만 유독 이 나무만은 그대로 있어 푸른빛이 하늘에 닿으므로 원근에서 모두 쳐다볼 수 있었다. 이 나무가 1611년(광해군 3) 봄에 갑자기 꺾어지자 사람들이 모두 괴상히 여겼다. 그해 여름에 정인홍(이황과 대립했던 조식의 수제자이며 북인의 영수)이 박여량, 박건갑 등을 시켜서 상소를 올려 퇴계를 헐뜯었다. 그러자 8도 유생들이 모두 대전 아래에 모여들어 상소해 이를 비판했으니 이 어찌 유학자들의 큰 불행이 아니겠는가. 노송나무가 꺾인 것은 그 징조였던 것이다."
조선시대 감사(관찰사)는 도내 군사와 민사를 지휘·통제하고 관리들을 규찰할 수 있었다. 이덕형은 막강한 권력을 악용해 힘없는 기생들을 골탕 먹이는 황해감사의 엽기 행각도 소개한다. 이 감사는 이웃의 수령과 기생들을 불러 유두놀이(여름철 민속놀이)를 열었다. 그런데 장난기가 발동해 기생 중 튼튼한 10명을 골라 설사약을 소주에 타서 연거푸 마시게 한 뒤 한 방에 몰아넣고 문을 굳게 잠갔다. 기생들은 일시에 설사가 났고 결국 참지 못하고 방 안에다 연이어 실례를 했다. "똥 속에 누워서 원망하고 부르짖는 소리가 들려 나오고 고약한 냄새는 방에 가득하여 사람이 감히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 이때 감사는 수령과 함께 이것을 엿보고 손뼉을 치며 크게 웃었다. 날이 저물어 비로소 문밖으로 내놓으니 모두 똥이 몸에 묻고 발에 묻어서 모양이 귀신과 같았으므로 부끄러워 감히 얼굴을 들지 못하고 다만 울 뿐이었다. 그 감사는 짓궂은 일을 아무렇지 않게 하였다.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그 감사는 죄를 받았다고 한다."
▶이덕형(1566~1645) = 한음 이덕형과는 동명이인이다. 호는 죽천이며 1596년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했다. 도승지, 전라·황해감사, 예조판서, 판의금부사, 우찬성을 지냈다. 인조반정 때 인목대비에게 반정을 보고했고 한성부판윤으로 이괄의 난을 진압했다. 저서로는 죽창한화와 송도기이가 있다.
[배한철 영남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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