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등대로 본 해양문명사](12)보르도 와인 무역의 번영,그 길을 밝힌 '걸작'
[경향신문] ㆍ프랑스의 빛 - 중세 와인 등대와 근대 렌즈의 탄생

■ 와인무역을 위해 만들다
에스파냐 북부 바스크 지역의 항구도시 빌바오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대서양을 왼쪽으로 끼고 네 시간 정도 달려 도착한 곳은 프랑스 보르도의 보르도생장역 근처 터미널이다. 내리는 순간부터 와인 도시 특유의 번영과 축적된 부가 감지됐다. 코르두앙 등대(Phare de Cordouan)를 찾아온 것이다. 보르도 와인의 역사는 이곳에 최초의 포도원이 만들어졌을 약 2000년 전 로마 시대로 소급된다. 대서양 연안의 따뜻하면서도 강한 바닷바람과 변화무쌍한 날씨는 로마가 들여온 포도에 훌륭한 맛을 선사했다. 지롱드(Gironde)강 어귀는 바다를 건너 영국으로 가는 이상적인 무역로였다. 한때 보르도는 영국령이 됐으며, 와인이 영어권 시장으로 나아가는 창구가 됐다. 보르도 와인은 지롱드강을 따라 오늘날의 영국과 프랑스 북부로, 육로를 거쳐 지중해변으로 이동해 바르셀로나 등지로 수출됐다.
17세기에 들어 네덜란드 상인은 보르도의 북쪽에 있는 메도크(Medoc)를 눈여겨보았다. 그들은 메도크의 습지대를 배수하여 포도원 조성을 장려했다. 네덜란드는 부르주아지를 상대로 하는 새 유통 채널을 열어 번영의 두 번째 계기를 이끌어냈다. 이러한 절대적인 와인무역 루트를 보호하기 위해 지롱드강 하구의 등대 건설은 필연적이었으며, 그 출현 시기는 무려 9세기로 소급된다.
■ 세계 최초로 등대세 받은 지롱드강 길목
세계 곳곳에 등대는 흔하디흔하지만 코르두앙 등대는 역사적으로나 미학적으로 명품 반열에 오를 만하다. 지롱드강을 끼고 기차는 메도크반도를 86㎞가량 북상하여 마침내 르베르동(Le Verdon)역에 당도했다. 메도크 와인의 이름은 이곳 메도크반도 지명에서 유래한 것이다. 코르두앙 등대가 번창하던 시절, 이 일대는 중세 지롱드강변의 중요 항구였다. 많은 순례자가 로테르담 대성당을 거쳐 이곳에 당도했으며, 에스파냐의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로 순례길을 재촉했다.
베르동 포구에는 4층의 직사각형 등대가 서 있다. 그라브 등대(Phare de Grave)다. 흰색 등탑에 테두리가 짙은 회색이라 안정적이면서도 세련된 느낌이다. 코르두앙 등대는 포구에서 뱃길로 20여분 거리에 있다. 간조에는 해수면이 낮아져 섬과 육지가 연결된다. 지롱드강이 실어온 모래와 개흙이 쌓여서 이루어진 섬이라 모래톱이 곳곳에 있어 뱃길은 정말 위험천만하다.
샤를마뉴(Charlemagne) 가문은 880년 지롱드강 하구의 기수대에 성당을 세웠다. 강어귀에서 7㎞ 떨어진 위치다. 성당의 탑을 이용해 야간이나 안개 속에 항해하는 배를 향해 트럼펫을 불어 경고했다. 제대로 된 구조물은 1370년 흑태자 에드워드에 의해 세워졌는데, 당시 보르도는 영국령이었다. 15m 높이로 상단에는 플랫폼을 설치해 장작불을 지펴 불을 밝히게 설계했다. 등대는 수도승이 관리했다. 이곳을 통과하는 배는 세계 최초로 등대세를 내야 했다. 등대 옆에는 작은 성당도 마련했다. 중세에는 등대가 신앙과 견고하게 결부돼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등대는 여러 번 무너졌고 다시 세워야 했다. 코르두앙 등대는 어려운 자연 조건 속에서도 1612년까지 그 기능을 다했다.
■ 르네상스 시대의 걸작, 코르두앙 등대
정작 코르두앙 등대의 역사가 분명하게 드러나는 시점은 16세기다. 16세기 전반기에 등대는 복구가 불가능할 정도로 무너졌고, 이는 보르도의 와인무역에 위협이 됐다. 헨리 3세는 주민의 청원을 받아들여 궁정 건축가 루이 드 푸아(Louis de Foix)에게 등대 건축을 명한다.
푸아는 경험 많은 엔지니어로, 에스파냐 마드리드 근처의 에스코리알궁(Escorial Palace) 건축에 참여했으며, 프랑스는 물론이고 해외에서도 물과 관련된 일에 종사했다. 1584년 건축을 시작해 27년 만인 1611년 르네상스 시대의 걸작이 마침내 선보이게 된다.
코르두앙 등대가 건축되던 16세기 전반기부터 프랑스에는 르네상스 열풍이 불었다. 코르두앙 등대가 아름다운 르네상스풍이 된 것은 당연한 시대적 조류였다. 건축가는 국왕의 명령대로 화려하고 장엄한 장식의 최고급 건축을 지향하면서도 등대 건축의 안전성과 내구성을 고려해야 하는 고충이 있었을 것이다.
코르두앙 등대는 우선 규모가 크다. 높이가 68m에 이르는데, 전통 등대로서는 세계에서 열 번째 높이다. 푸아는 등대 둘레에 높이 2.4m, 직경 41m의 방어벽을 세워 바닷물이 등대 안쪽으로 넘어오지 못하게 했다.
등대는 총 4개층으로 설계됐다. 중앙에는 화려한 장식성이 돋보이는 홀을 배치했다. 나선형 계단이 안정적인 각도로 이어진다. 화려한 호텔의 로비를 보는 듯한 느낌이다. 2층은 옷방, 대기실, 거실 등으로 꾸며진 왕의 숙소다. 푸아는 왕과 주교가 방문할 것을 예상하고 그들의 입맛에 맞게 등대를 건축했다. 그러나 왕과 주교는 한 번도 방문하지 않았다. 3층은 모자이크로 장엄하게 마감한 돔 성당이다. 두 개의 사각 기둥을 세우고 가운데 성상(聖像)을 모셨다. 촛불과 꽃으로 장식한 성당은 코르두앙 등대가 종교적으로도 관련이 있음을 암시한다. 성당 위에 랜턴이 설치됐는데, 장작을 쇠 컨테이너에 넣어서 태우는 방식이었다.
결과적으로 코르두앙 등대는 세계 등대 역사에서 장식성이 강한 등대의 상징이 됐으며, 조형적 아름다움으로 극찬을 받는다. 왕궁, 성당, 요새의 기능을 두루 겸하는 복합적 성격을 창출해낸 것이다. 코르두앙 등대가 결정적으로 변화하게 된 것은 프랑스에서 개발된 프레넬 렌즈가 도입되면서부터다.
■ 근대 등대의 진정한 탄생, 프레넬 렌즈

프레넬 렌즈의 초기 원형(사진)을 보려면 파리 에펠탑 옆의 국립해양박물관을 찾아가면 된다. 프랑스 해양사를 중심으로 전쟁과 선박, 해군의 역사가 전시의 주종을 이루는 가운데 한 코너가 프레넬 렌즈로 채워져 있다. 프레넬(Augustin-Jean Fresnel)은 산업혁명 이후 출현한 ‘시민 엔지니어’이자 물리학자였다.
그는 1830년대부터 19세기 말까지 지배한 뉴턴의 ‘빛 입자론’을 배제하면서 ‘빛 파동설’을 지지했다. 뉴턴은 눈에 들어와 시각을 자극하는 빛을 광원에서 방출된 입자의 흐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빛이 파동이라는 여러 실험적 증거가 속속 등장했다.
프레넬은 이론가이면서 동시에 실용적 엔지니어였다. 반사·굴절 프레넬 렌즈를 발명하고 계단형 렌즈를 이용해 등대의 광달거리를 늘려서 바다에서 많은 생명을 구한 등대사의 획기적 인물이었다. 등대의 기술발달사는 어찌 보면 빛이 도달하는 ‘광달거리의 발달사’라 바꾸어 말해도 되기 때문이다.
굴절형 계단 렌즈가 실용화되려면 아직 시간이 필요했다. 마침내 영민한 천재 프레넬이 계단형 다단계 원형 렌즈를 발명했고, 등대에 적용할 수 있었다. 그가 등대의 역사를 바꾸었다. 선대의 여러 실패를 딛고서 독자적으로 재창조한 굴절형 계단 렌즈가 마침내 프랑스에 출현한 것이다. 1823년 프레넬 렌즈는 코르두앙 등대에 장착되어 마침내 점등했다.
프레넬 렌즈가 코르두앙 등대에서 작동하던 즈음, 프레넬은 결핵에 걸려 객혈을 하기 시작했다. 늘 가난에 쫓기던 이 불우한 천재는 병이 악화돼 1827년 사망했다. 그의 나이 39세였다. 파리의 페르 라셰즈 묘지에 가면 좀처럼 사람들이 찾지 않는 그의 안식처가 있다.
그의 사후 19세기를 풍미했던 파리엑스포에서는 프레넬 렌즈가 단골손님으로 전시됐다. 프레넬 렌즈는 전문 광학 회사가 생산해 전 세계로 팔려 나갔다. 그중 몇 개는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 조선에까지 팔렸다. 지금도 몇 개는 제 기능을 하고 있고, 몇 개는 포항 호미곶의 등대박물관에 보존, 전시되고 있다.
■ 다양한 등대가 밀집한 브르타뉴반도
보르도를 떠나 프랑스 대서양 연안에서 등대가 집중적으로 세워져 있는 북서부 서단의 브르타뉴(Bretagne)로 향했다. 대서양 쪽으로 크게 튀어나온 브르타뉴반도는 북쪽으로 영국해협, 남쪽으로 비스케이(Biscay)만과 접한다. 브르타뉴 해안은 프랑스 전체 해안의 3분의 1을 차지하며, 800여개의 섬을 안고 있다.
브르타뉴 지방의 중요 도시 브레스트(Brest)의 중세 역사는 ‘성의 역사’였다. 이 전통은 계속 이어져 도시는 해군과 무기고가 집중되는 군항도시로 발전했다. 브레스트 역사는 항상 바다와 연결된다. 해군기지 끝쯤에 등대가 있었다. 포르트지크 등대(Phare du Portzic)다. 화강암을 각이 지게 쌓아올리고 붉은 등롱을 머리에 얹었다. 등대에서 굽어보자니 왜 브레스트에 등대가 이런 식으로 튀어나온 곶이나 섬마다 집중적으로 존재하는지 알 수 있었다. 리아스식의 복잡한 해안과 벼랑, 섬과 암초가 많은 위험한 항로이기 때문일 것이다.
브르타뉴는 프랑스에서, 아니 전 세계에서도 등대를 사랑하기로 손꼽는 동네일 것이다. 등대는 브르타뉴반도를 둘러싸고 무려 50여개가 밀집 대형으로 분포한다. 워낙 다양하고 자유로운 생김새를 자랑할 뿐만 아니라 예술적으로도 높은 품격을 보여준다.

높은 해양예술창작 수준은 브르타뉴 지방이 뿜어내는 해양 및 등대에 관한 오랜 관심과 노력이 반영된 결과다. 또 이런 결과가 실제 등대 건설에 반영되어 브르타뉴의 등대가 다양성과 미학적 아름다움을 성취하게 되는 동력으로 작동했을 것이다. 현재 브르타뉴는 프랑스 땅이지만 문명사적으로는 ‘켈트의 땅’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도 들었다.
브레스트를 떠나기 전 도심 외곽에 있는 오세아노폴리스(Oceanopolis)라는 아쿠아리움에 들렀다. 야외의 거대한 입간판에 그려진 그림을 보니 고래와 돌고래, 물개, 바다사자, 거북을 비롯해 온갖 물고기가 앞을 향해 헤엄치고 있고, 그 선두에 한 소녀가 펭귄을 타고 파도 위를 날아가듯 서 있다. 브레스트 혹은 브르타뉴의 지난 역사와 다가올 미래를 웅변해주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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