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의 공간>'인생 철로'를 거슬러 순수했던 그때로.."나 다시 돌아갈래~"



영화 ‘박하사탕’의 배경… 제천시 백운면 진소마을
봉우회 사람들과 야유회 했던
철로 아래 개천, 관광지로 정비
이야기 결말·발단된 주요장소
5·18때 시민진압군 나선 청년
실수로 쏜 총알에 여학생 죽어
죄책감과 상처 속 살아가게돼
첫사랑 순임을 만났던 그곳서
철로위 올라 자살 비극적 선택
역사의 질곡속 파괴된 삶 그려
역순으로 진행된 스토리텔링
관객 스스로 재구성해야 이해
2000년 개봉당시 파격적 시도
서울에서 승용차로 두 시간 반을 넘게 달려 도착한 ‘박하사탕’(감독 이창동)의 촬영지는 안타깝게도 공사 중이었다. 보수공사 관계로 다리 주변에 구조물들이 세워져 있고, ‘공사 중’ 푯말이 산만하게 널려 있어 영화와 유사한 장면을 카메라에 담기는 불가능했다. 예전에는 들어가 볼 수 있었다는 철로도 지금은 주변에 철창이 생겨 출입이 금지돼 있다. 역시 안전문제 때문일 것이다. 충북 제천시 백운면 애련리 진소마을에 위치한 촬영지는 이처럼 현재로는 일부러 찾아간 사람들에게 다소 부끄러운 모양새를 하고 있다. 그래도 약 20년 전 촬영 당시에는 면 소재지에서 비포장도로로 10㎞나 들어가야 했던 이 외진 강변에 지금은 멀리서부터 매끄러운 도로가 나 있고, 길을 따라 펜션이 들어서 있고, 영화 촬영지 이정표가 곳곳에 붙은 관광지가 됐다.
진소마을에 가려면 고속도로에서 빠져나와 국도로 한참을 가야 하는데, 그중에서도 강을 따라 들어가는 좁은 길이 6∼7㎞나 된다. 그러나 초여름의 기운이 완연한 시골길의 아름다움은 눈동자를 파랗게 물들이며 도시인의 심신을 나긋하게 한다. 더 이상 차가 진입하기 어려운 길 끝에 이르면 ‘박하사탕’의 주인공 김영호(설경구)와 가리봉 봉우회 사람들이 20년의 간격을 두고 야유회를 가졌던 철로 밑 개천과 돌밭을 발견할 수 있다. 이제 주인공이 비극적 선택을 했던 음울한 공간의 느낌보다는 한 편의 명작이 탄생한 공간으로서의 의의가 더 크게 다가온다. 촬영지 입구에는 한국영상자료원과 제천시가 제작한 기념비가 그럴듯하게 세워져 있다.
‘박하사탕’은 7개의 챕터로 이뤄져 있으며, 역순행적으로 진행된다. 진소마을은 첫 챕터(야유회, 1999년 봄)와 마지막 챕터(소풍, 1979년 가을)가 촬영된 장소다. 영호의 최후와 최초, 즉 이야기의 결말과 발단이 이곳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상 비중이 높다. 첫 장면에서 40대의 영호는 가리봉 봉우회 무리 속에 무작정 끼어들어 가 모처럼의 야유회를 엉망으로 만들어 놓는다. 불쑥 화를 내기도 하고, 정신이 나간 듯 꽥꽥대며 ‘나 어떡해’를 부르기도 하고, 양복을 입은 채 개천에서 첨벙대기도 하던 그는 급기야 철로로 올라간다. 두 길로 난 철로 중 다행히 다른 길로 먼저 기차가 지나가지만 곧 영호가 서 있는 철로에도 기차가 돌진해 온다. 그때, 양옆으로 팔을 뻗고 “나 다시 돌아갈래”라는 저 유명한 대사를 외치며 기차와 마주하는 영호의 모습이 ‘야유회’의 마지막 장면이다. 19세기 말 뤼미에르 형제의 첫 유료관객들이 거대한 열차가 스크린에 재현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피했던 것처럼, ‘박하사탕’이 개봉됐던 2000년도(2000년 1월 1일 개봉)의 관객들에게도 이 이미지는 충격적이리만치 강렬했다. 주인공의 사연을 궁금하게 만드는 데는 충분히 효과적인 오프닝이었다.
그런데 그는 왜 하필 자신의 생을 철로에서 마감했을까. 그것도 봉우회 사람들을 지척에 둔 상태에서 말이다. 대개의 자살은 은밀하게 이뤄지지 않던가. 더욱이 3일 전의 상황을 보여주는 두 번째 챕터(사진기, 3일 전)에서 영호가 남은 돈을 탈탈 털어 권총을 구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 이러한 의문은 더욱 고개를 든다. 그 일부는 영화가 처음부터 철로를 인생길의 메타포로 사용했다는 점에서 해소된다. ‘박하사탕’은 암전에서 하나의 빛이 생기고, 작은 창처럼 그 빛이 커지다가 터널의 끝이 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터널의 정체가 드러나고 나서야 이 영상이 철로를 달리는 열차의 시점에서 촬영됐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첫 챕터가 끝나면 영화는 영호의 마지막 소원을 이뤄주려는 듯 과거로 돌아가는데, 기차의 후미에서 찍은 영상을 거꾸로 돌려 챕터 사이사이에 삽입하는 식이다. 얼핏 앞으로 나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주변 사물들이 거꾸로 움직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현재와 과거를 오가는 방식, 즉 플래시백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시간의 역순으로만 진행되는 스토리텔링 또한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것이었다. 영호 개인의 비극이 어떻게 시작됐는지 관객들은 이 뒤로 달리는 기차의 여정을 따라 차례차례 밟아나간다.
영호가 철로에서 생을 마감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영화의 마지막 두 챕터에서 더 구체적으로 등장한다. 여섯 번째 챕터인 ‘면회, 1980년 5월’은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시민 진압에 나서야 했던 군인, 영호의 모습을 보여준다. 다른 군인이 마구잡이로 쏜 총에 다리를 다친 그는 사력을 다해 동료들을 따라가 보려 하지만 더 이상 걷지 못하고 주저앉는다. 여기서 영호가 고통과 두려움으로 공황 상태가 돼 이후의 삶에 절대적 영향을 미치는 사고를 치게 되는 곳이 바로 몇 개의 철로 위로 기차가 드문드문 쉬고 있는 차량 기지다. 두 대의 기차 사이에서 두리번거리며 길을 찾는 영호, 그가 선임의 부축을 받으며 기차 사이를 걷는 모습은 상행선과 하행선, 두 개의 철교가 있었던 첫 챕터의 야유회 장소를 떠올리게 한다. 시간 순서상으로는 두 번째지만 내러티브상 절정부의 배경이 되는 이 공간에서 영호는 실수로 죄 없는 여학생을 쏜다. 그때 그곳은 이 영화의 형식처럼 시간을 돌이킬 수만 있다면 영호가 다시 돌아가야 할, 그의 인생을 바꿔놓는 결정적인 좌표다. 이후 죄책감과 좌절감에 찌들어 세상과 타협하며 살아가던 영호가 결국 철로 위에서 생을 마감하는 것은 이 사건과 연결돼 있다.
마지막 신에서 영호는 다시, 아니 처음으로 진소마을에 있다. 1979년 가을, 가리봉 봉우회의 소풍날이다. 듬성듬성 들꽃이 피어 있는 길을 20대의 영호와 ‘순임’(문소리)이 걷고 있다. 여기서 순임은 영호에게 박하사탕을 건네고, 영호는 순임에게 들꽃을 꺾어주는 것으로 서로의 마음을 표현한다. 사진기를 메고 이름 없는 꽃들을 찍고 다니고 싶다던 영호는 갑자기 이곳에 와 본 것 같은 기분이 든다는 말을 한다. “저 철교랑 강이랑 다 낯익어요. 여긴 내가 너무나 잘 아는 데거든요.” 순임은 “그럴 때가 있어요. 그런 건요 꿈에서 본 거래요”라고 응수한 뒤, 이렇게 덧붙인다. “영호 씨, 그 꿈이요, 좋은 꿈이었으면 좋겠어요.” 약 2시간 전, 스크린에서 이 공간의 미래, 즉 영호의 최후를 보았던 관객들에게는 이들의 대화가 의미심장할 수밖에 없다. 역순행적 구성, 그리고 대사 몇 문장만으로 1980년 5월 이등병으로서 광주를 경험했던 한 청년의 처절한 리얼리즘 영화가 판타지 장르처럼 낯설고 신비로운 느낌을 남긴다. 영호는 둘러앉아 ‘나 어떡해’를 부르는 무리를 빠져나와 돌밭에 눕는다. 카메라는 이전까지 거의 사용되지 않았던 사이즈의 클로즈업으로 영호의 얼굴을 비추고, 20년 후를 예견한 듯, 혹은 꿈-순임의 바람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나쁜 꿈-에 대한 기억이 선명해지는 듯 점차 그의 눈에는 눈물이 어린다. 이 이미지 위로 노랫소리, 물소리와 함께 기차 지나가는 소리가 오프 스크린 사운드 삽입되며 영호에게는 꿈결 같은 느낌을, 관객들에게는 이미 영사기의 빛 속에 사라졌으나 분명 잘 알고 있는 공간의 환영 같은 느낌을 완성시킨다. 정말 봉우회 사람들과의 소풍 이후 영호의 인생은 나쁜 꿈에 불과했던 것은 아닐까. 영화적 진실, 해석의 논리성과 관계없이 관객들의 바람은 여기로 모아질지 모른다.
‘초록물고기’(1997)라는 주목할 만한 누아르로 데뷔한 이창동 감독의 두 번째 영화는 이처럼 지적인 작품이었다. 관객들은 영화가 끝난 후 머릿속에서 이야기를 재구성하는 능동적인 과정을 통해 서사를 정확히 이해하게 된다. 박하사탕과 꽃을 좋아하던 청년이 현대사의 질곡 속에 파괴돼 간다는 내용은 영화 감상 중에도 이해할 수 있지만, 시간의 흐름에 따라 캐릭터의 감정을 쌓아 올리고 거기에 몰입하는 작업은 영화가 끝난 후에야 비로소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이 감독은 ‘박하사탕’ 이후 ‘오아시스’(2002), ‘밀양’(2007), ‘시’(2010)에 이어 8년 만의 신작, ‘버닝’(2018)을 내놓았다. 전작들과 확연히 다른 물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현실과 비현실, 있는 것과 없는 것, 일어난 일과 일어나지 않은 일 사이에서 관객들이 적극적인 해석을 내놓게 만드는 ‘버닝’은 ‘박하사탕’과 상통하는 면이 있다.
‘박하사탕’은 지난 4월 말, 4K 디지털 리마스터링 버전으로 재개봉해 박스오피스 10위권 안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세계적 거장이 된 이창동 감독과 제2의 전성기를 맞고 있는 배우 설경구, 무엇보다 미시사에 틈입하는 거시사의 폭력을 통렬하게 다룬 영화의 힘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명작이 있는 한, 두 개의 철교와 두 개의 터널, 힘차게 흐르는 강물과 돌밭이 있는 진소마을에도 사람의 발길은 끊이지 않을 것이다. 공사가 끝나는 대로 다시 방문해 보고 싶은 공간이다.
글·사진= 윤성은 영화평론가· 계간 ‘쿨투라’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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