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5월 23일, 페라리가 새로운 모델을 선보였다. 주인공은 SP38. 현재 판매하고 있는 페라리 가족들과 생김새가 전혀 달라 흥미롭다. 과연 이탈리아 마라넬로 출신 식구가 맞는지 의문스럽다. 하지만 SP38은 488 GTB와 뼈대와 심장을 나눈 페라리 가문의 혈통. 오직 단 한 명의 고객만을 위해 옷을 고쳐 입어 낯설 뿐이었다.


맞춤 제작은 럭셔리 브랜드의 전유물이다. 롤스로이스와 벤틀리 뮬리너가 대표적인 예다. 맞춤 제작을 통해 고객은 자동차를 자신의 입맛대로 꾸밀 수 있다. 뮬리너에 따르면 가능한 조합만 10억 가지가 넘는다고. 제조사별로 부르는 명칭은 다르다. 페라리에도 이와 비슷한 개인 맞춤 주문제작 서비스가 있다. 이름은 ‘원 오프 프로그램(One-Off Programme)’.

세상에 단 한 명을 위한 페라리 이름엔 대개 스페셜 프로젝트의 약자 ‘SP’가 붙는다. 원 오프 프로그램은 여느 제조사의 비스포크와 달리 차체 디자인까지 모두 고칠 수 있다. 첫 번째 주인공은 SP1으로 2007년 등장했다. 일본의 사업가이자 페라리 클럽 회장이었던 준이치로 히라마쓰. 레오나르도 피오라반티(Leonardo Fioravanti)가 디자인한 1998년 F100 콘셉트카를 좋아했던 그는 페라리에 F100을 닮은 차를 만들어달라고 손을 내밀었다.



페라리는 주니치로 히라마쓰의 꿈을 위해 피오라반티를 불러 들였다. F430을 밑바탕 삼고 F100의 특징을 곳곳에 채워 넣었다. 압권은 차체 옆면. 날렵한 F100의 사이드 캐릭터 라인을 담아내기 위해 F430의 옆면을 깎고, 뒷 펜더 공기구멍은 길게 잡아 늘였다. C 필러 앞에 자리한 작은 창문도 새롭다. F430은 끝을 둥글게 다듬어 부드러운 인상이었다. 반면 SP1은 칼끝을 날카롭게 세웠다. 덕분에 색다른 분위기를 풍긴다.

주문제작 페라리를 손에 넣으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일단 300만 유로(약 38억 원) 이상이 필요하다. 하지만 돈이 많다고 나만을 위한 페라리를 만들 수 있는 건 아니다. 지난 2016년, 458 MM 스페치알레를 공개할 당시 영국 <오토카>와 페라리 최고마케팅책임자 엔리코 갈리에라(Enrico Galliera)가 나눈 인터뷰를 통해 원 오프 프로그램에 필요한 요소를 엿볼 수 있었다.
첫 번째는 주문 고객의 철학이다. 엔리코 갈리에라는 458 MM 스페치알레를 “주문제작 역사상 가장 뛰어난 디자인을 뽐내는 모델”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성공적인 원 오프 프로그램은 절대적으로 주문 고객에게 달렸다”고 전했다. 458 MM 스페치알레를 주문한 고객은 디자인에 대해 뚜렷한 콘셉트를 가지고 있었다.


가령 투구를 닮은 앞 유리창을 원했다. 페라리는 고객의 요구를 적극 수렴해 A 필러를 까맣게 칠하고 지붕을 새로 디자인했다. 마치 헬멧을 뒤집어 쓴 모습이다. 갈리에라는 “고객이 확고한 철학을 가지고 있으면 원하는 페라리를 보다 빠르게 만들 수 있고, 디자인을 여러 번 바꿀 필요도 없어 비용을 아낄 수 있다. 또 결과물도 뛰어나다”며 원 오프 프로그램을 찾기 전 바라는 점들을 머릿속에 정리해서 오길 당부했다.

고객의 철학이 아무리 확고해도 페라리의 철학과 맞지 않으면 꿈을 실현할 수 없다. 엔리코 갈리에라는 “차체와 엔진 빼곤 모두 바꿀 수 있다. 하지만 들어줄 수 없는 요구도 있다”고 말했다. 가령 차체 컬러로 분홍색을 고를 수 없다. 또한 하드코어 레이싱을 위한 GTC4 루쏘도 불가능하다. 레이싱에 어울리지 않는(?) 까닭이다. 그는 “억만금을 준다 해도 페라리가 가진 철학을 버리지 않는다”고 말하며 고집스런 자부심을 드러냈다.
두 번째 요소는 많은 시간을 쏟을 수 있는 열정이다. 페라리에 따르면 원 오프 프로그램으로 나만의 페라리를 완성하기까진 약 18~24개월이 필요하다. 엔리코 갈리에라는 “시간도 시간이지만 주문제작은 디자이너 및 엔지니어와 고객의 소통이 가장 중요하다”며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선 직접 만나 이야기를 자주 나눌수록 좋다”고 말했다. 하지만 고객이 페라리 공장이 있는 마라넬로를 자주 가긴 쉽지 않은 일. 나만의 페라리를 만들기 위해선 엄청난 시간과 노력의 투자가 필요했다.

마지막은 인내다. 페라리에 따르면 시간이 많이 드는 원 오프 프로그램의 성격상 1년에 단 3대만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인터뷰를 나눈 2016년 당시 예약은 2021년까지 가득 찬 상태. 당장 주문해도 순서를 기다리는 데만 5년, 나만의 페라리를 완성하기까지 2년 총 7년을 참아야 하는 셈이다. 엔리코 갈리에라는 “우리도 여러분의 통장에서 돈을 뺏지 못해 아쉬울 따름”이라며 재치 있게 답했다.
세상에 단 한 대밖에 없는 나만의 페라리를 만들기 위해선 38억 원 이상의 돈과 확고한 철학, 열정, 인내가 필요하다. 정리하고 보니 아쉬운 마음이 더욱 크다. 네 가지 가운데 딱 하나가 부족한 까닭이다. “내가 원하는 페라리는 분홍색이었다”고 외치며 마음의 위안을 삼아본다. 안녕, 페라리.
글 이현성 기자
사진 페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