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2.wiki] 스타 감독의 선수 시절 ① 펩 과르디올라

Andrew Murray 2018. 5. 30.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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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포투=Andrew Murray]

위대한 감독은 선수 때도 천재였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반반’이다. 요한 크루이프의 바르셀로나 제자였던 과르디올라는 선수 때부터 천재였지만, 리버풀을 UEFA챔피언스리그 결승으로 이끈 클롭의 선수 시절은 보잘 것 없었다. 이들의 선수 시절을 비교해보는 건 지금의 축구 철학을 이해하는 배경이 된다. 프리미어리그 최고 감독 3인의 선수 시절을 되돌아 본다. <편집자 주>

1989년 4월 30일, 일요일 저녁 7시였다. 18세 젊은이가 바르셀로나 시내 북서쪽으로 뻗은 가로수길의 디스코텍 ‘그랑 비아 카를라스 III’에 들어섰다. 키만 멀쑥한 십대는 술 한 잔 마시지 않은 상태였지만 두 가지에 완전히 취해 있었다.

하나는 그날 오후 캄프누에서 목격한 승리였다. 바르셀로나는 레알 오비에도를 7-1로 박살냈다. 다른 하나는 이 디스코텍에서 발견한 갈색 머리 아가씨였다. 청년은 “느린 음악이 시작되자 바로 그녀에게 댄스를 청했다”라고 회상했다. “그때 라마시아에서 나온 누군가가 내게 다가와 1군의 바니올레스 원정에 함께 하게 됐다고 전했다. 더는 그녀와 춤을 출 수 없었다. 이미 다른 생각들이 떠올랐다.”

일주일이 조금 넘게 남은 삼프도리아와 컵위너스컵 결승전에 대비해 주전 다수가 휴식을 취하는 사이 그는 6-2 승리로 끝난 친선 경기의 전반전을 소화했다. 요한 크루이프 감독은 특별한 인상을 받지 못했다. “우리 할머니보다 더 천천히 뛴다”라는 게 네덜란드 전설의 평가였다. 펩 과르디올라는 바르셀로나에서의 경력이 시작도 되기 전에 끝났다고 생각했다.

2001년 자서전 <내 사람, 내 축구>에서 과르디올라는 “크루이프 감독의 전략적 동기부여 표현 중 하나라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았다”라고 설명했다. “크루이프 감독은 흥분한 선수에게 찬물을 퍼붓는다. 언론이 등을 돌렸을 때는 칭찬했다. 같은 기자가 특정 선수에 관해 집요하게 보도하면 질식할 때까지 목을 졸랐다.”


불안한 출발 후 1년이 흘렸고 1990년 여름이 왔다. 크루이프 감독은 클럽을 떠나는 루이스 미야 대신 후방에서 바로 공격을 시작할 미드필더가 필요했다. 그는 스카우트 오리올 토르트가 “신(gods)처럼 플레이하는 선수를 찾아냈다!”라고 극찬했던 펩을 살피기 위해 B팀을 찾았다. 펩은 보이지 않았다. 크루이프 감독은 B팀의 찰리 렉사 감독에게 “몸도 풀지 않았잖아”라고 고함쳤다. “최고의 선수라면서, 왜?”

크루이프 감독은 펩이 탁월한 시야에 화려한 기술까지 지녔지만 딱히 강인하거나 역동적이지 않다는 설명을 들었다. 그는 “체격이 커야 좋은 선수가 되는 건 아니다”라고 성을 내며 과르디올라를 바로 1군에 합류시켰다. 둘은 감독이 원하던 ‘피보테’가 제 모습을 찾을 때까지 최소한의 패스로 플레이를 전개하는 훈련을 계속했다. 크루이프 감독은 자주 “두 번이잖아, 멍청하게 두 번이나 건드렸잖아!”라고 소리를 지르곤 했다.

과르디올라는 “힘든 훈련이었다”라고 회상했다. “감독은 내가 그 자리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일러주곤 했다. 아니면 내가 너무 형편없이 움직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설명은 아주 간단했다. 나이가 들면 사소한 부분도 고치기가 어려워진다. 다행히 나는 달랐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크루이프 감독에게 배울 수 있었다. 그것도 거듭해서 말이다.”

깡마른 소년은 점차 드림팀에서 중요한 조각이 되어갔다. 그들은 라리가를 4연패 했다. 1992년에는 클럽 역사상 최초로 옛 웸블리에서 유러피안컵을 들어 올렸다. 크루이프 감독은 “과르디올라는 빠르게 볼을 컨트롤하고 패스할 줄 알았다. 패스가 좋아서 받는 선수가 무언가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라고 설명했다.

21세의 열정 학도 과르디올라는 웸블리 결승전을 앞두고 한껏 예민해졌다. 트로피를 받으러 계단을 몇 개나 올라야 하는지 스트라이커 훌리오 살리나스와 수다를 떨면서 경기 전날을 보냈다. 골키퍼인 안도니 수비사레타는 “경기에서 이긴 다음에 계단을 세어 보든가!”라고 쏘아붙였다. 바르셀로나는 추가시간 터진 로날드 쿠만의 프리킥 골로 삼프도리아에 1-0으로 승리했다. 수비사레타는 우승컵을 받기 전 과르디올라에 앞서 웸블리의 계단을 끝까지 오른 뒤 그를 멈춰 세웠다. 수비사레타는 “계단이 33개네. 내가 방금 세었거든”이라며 윙크했다.

두 달 뒤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도 경사가 이어졌다. 하지만 가장 강렬한 순간은 아테네에서 밀란과 격돌했던 1994년 UEFA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이었다. 크루이프 감독은 2년 전 삼프도리아와 맞서는 자신의 팀에게 “나가서 축구를 즐겨”라고 지시했었다. 이제는 다른 말을 했다. “나가서 이겨라.”

파비오 카펠로의 로소네리가 4-0으로 승리했다. 과르디올라는 “상대는 압도적이었다. 경기가 끝나기만 바랐다”라고 털어놨다. 화창했던 그리스의 밤은 과르디올라의 마음 한구석에 여전히 자리하고 있다. 현재 레알 소시에다드를 지휘하는 당시 동료 에우제비오 사크리스탄은 “감독이 된 펩은 승리를 예상하는 경기를 앞두고 늘 그 밀란전을 떠올릴 거다”라고 귀띔했다. “그는 우리가 1994년 결승전을 앞두고 무엇을 놓쳤는지 알고 있다. 고된 노력과 상대에 대한 존중이었다.”


1996년 크루이프 감독은 경질되었지만, 펩은 보비 롭슨과 루이스 판 할 체제에서도 자리를 지켰다. 코파델레이와 컵위너스컵, 스페인 슈퍼컵을 품에 안았던 롭슨 감독의 유일한 시즌을 시작으로 재앙에 가깝게 추락했던 바르셀로나가 부활한 것은 카탈루냐의 상식을 체화한 과르디올라의 아래서였다. 펩은 “롭슨 감독은 우리에게 더 많이 승리하려면, 그래서 우승하려면, 선수들과 감독이 같은 방향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웠다”라고 적었다. 1997년 컵위너스컵에서 승리한 뒤 하프타임에 교체되었던 루마니아 출신 주장 지카 포페스쿠가 우승컵을 들어 올리도록 자리를 비켜준 그의 행동이 가장 좋은 예다.

과르디올라가 전술을 집요하게 파고들기 시작한 건 판 할 감독 시절이었다. “함께했던 감독 중 축구에 관해 가장 많은 이야기를 나눈 지도자는 판 할 감독이었다”라고 적었다. “여러 전술을 헐뜯는 경우가 많았다. 선수단 규율 준수를 유지하려면 팀을 하나로 만들어야 한다. 판 할 감독이 그런 일을 했다.”

26세가 된 과르디올라는 미겔 앙헬 나달, 기예르모 아모르 같은 선배들을 제치고 주장이 되었다. 판 할 감독은 과르디올라에게 “나와 비슷한 수준으로 대화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너야. 이제 내 주장이다”라며 칭찬했다.

90년대가 끝나가면서 감독은 주장의 은퇴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세대도 등장했다. 펩이 지긋지긋한 종아리 부상으로 18개월 가까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차비는 1999-00시즌 1군 주전으로 자리를 잡았다. 차비는 “과르디올라가 내 롤모델이었다”라고 말했다. “감독들은 내게 늘 과르디올라를 관찰하라고 했다. 모든 터치가 한두 번으로 끝났다. 바케로, 쿠만, 스토이치코프도 있었지만, 과르디올라가 딱 내 포지션이었다.”

2001년 과르디올라는 우승 경력 16개를 뒤로하고 세리에A의 브레시아로 떠났다. 4-2-3-1을 창시한 후안마 리요와 멕시코에서 함께 일하다가 6년 만에 영혼의 고향인 바르셀로나로 돌아왔다. 바르셀로나 B팀을 맡아 크루이프 감독의 스타일을 되살리기 위함이었다.

“나는 클럽 구성원 84,533명 중 한 명으로 경기를 지켜볼 것이다. 그렇지만 바르사의 플레이에서 크루이프의 유산을 찾을 수 없을 때는 그만둘 것이다”라고 적었다. “내가 운 좋게 직접 배웠던 방식으로 그대로 뛰는 선수들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맨체스터 시티 팬들은 펩만큼 기쁠 거다.

(-> 2편 위르겐 클롭으로 이어집니다)

사진=포포투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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