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삶]유전자 가위, 경이로움과 두려움 사이

김유진 기자 2018. 3. 30.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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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ㆍ크리스퍼가 온다
ㆍ제니퍼 다우드나·새뮤얼 스턴버그 지음, 김보은 옮김 |프시케의숲 | 372쪽 | 2만2000원

영화 <가타카(Gattaca)>(1997)에서 미래 사회는 유전자 조작을 통해 우성 인자만을 남겨 인공수정으로 출산한 인간과 그렇지 않은 인간의 등급을 분류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당사자의 이야기는 어떤 식으로든 힘을 지닌다. 크리스퍼에 관해 지금까지 나온 여러 권의 책들 중에서 이 책이 가진 가치도 여기에서 나온다. 저자인 제니퍼 다우드나 캘리포니아대(UC 버클리) 교수는 특정 유전자 부위를 정밀하게 조준, 편집하는 3세대 유전자가위 기술 ‘크리스퍼-캐스9’을 개발한 당사자다. 2015년 양대 과학 저널 네이처와 사이언스가 나란히 ‘가장 뛰어난 과학적 성과’로 꼽은 크리스퍼는 농업 혁신, 질병 치료 등에 적용되면서 생명공학 50년사에서 가장 큰 ‘혁명’으로 여겨지고 있다.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그러나 정치인이나 기업인의 회고록이 그렇듯이 당사자가 직접 서술한 책에는 한계도 뒤따르기 마련이다. 자화자찬으로 흐르거나 자신의 입장만을 대변하는 식으로 서술할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크리스퍼는 이미 상용화 단계에 이른 기술인 동시에, 천문학적 금액이 투자되고 있는 신사업 영역이다. 다우드나는 이 분야에서 특허권을 놓고 다투는 핵심적인 이해 당사자다.

크리스퍼를 둘러싼 첨예한 이해관계와 저자의 특수한 위치를 감안하고 읽는다면, 이 책은 크리스퍼 유전자가위 기술에 관한 이해를 돕는 충실한 안내서로 손색이 없다. 책의 1부는 크리스퍼의 개념과 원리, 특히 저자가 2012년 6월 에마뉘엘 샤르팡티에 독일 하노버대 교수와 함께 사이언스에 크리스퍼에 관한 논문을 게재하기까지의 과정을 주로 설명한다. 생물학 용어가 낯선 이들로서는 페이지를 쉽게 넘기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1부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크리스퍼의 실제 적용 사례와 크리스퍼가 제기하는 사회적·윤리적 쟁점들에 관해 쓴 2부를 이해하기에는 무리가 없다.

저자는 자신이 꾼 꿈의 한 장면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멀리서 그를 집어삼킬 것 같이 거대한 파도가 다가온다. 그는 공포를 느끼면서도 투지를 발휘해 파도를 넘고, 다음 파도를 탄다. 파도의 비유는 저자가 “생물의 유전자를 포함한 모든 DNA 집합체인 게놈을 간단한 문장을 고치듯이 편집할 수 있”는 크리스퍼 기술을 개발한 이후 맞닥뜨린 변화를 설명하기에 적절하다. 다우드나 스스로도 알아채지 못할 만큼 변화는 급격하게 찾아왔다. “학계와 의사들은 크리스퍼를 빠르고 간편하며 정확하게 유전자 암호의 결함을 교정하는 유전자 변형 분야의 성배로 묘사했다. 눈 깜짝할 새에 나는 세균과 크리스퍼-캐스 생물학 분야에서 인간생물학과 의학의 세계로 건너갔다.”

1세대 유전자가위 기술인 징크 핑거 뉴클레이즈, 그리고 2세대의 탈렌과 달리 3세대 크리스퍼가 빠른 속도로 전파될 수 있었던 데는 크리스퍼의 가격경쟁력이 한몫했다. 크리스퍼 실험실을 꾸리는 데는 230만원, 개인이 유전자 편집 키트를 장만하는 데는 15만원 정도면 가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저자의 말을 빌리면 집에서 수제맥주를 만들 듯이 유전자 편집을 할 수 있게 된 셈이다.

불과 5년 만에 크리스퍼 기술은 영양 상태를 개선한 식물을 재배해 식량 문제를 해결하는 일에서부터 형질전환 동물을 활용한 신약 개발, 이식용 장기 연구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적용되고 있다. 이미 크리스퍼로 게놈을 편집하는 과정을 통해 질병에 강한 쌀, 쉽게 무르지 않는 토마토, 다중불포화지방이 든 건강에 좋은 콩 등이 만들어졌다.

크리스퍼는 특히 유전질환, HIV와 같은 면역질환, 암, 근육병 등과 같이 의학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내고 있다. 저자가 “크리스퍼가 치료법으로 언급되지 않은 질병을 찾기가 어려울 지경”이라고 말할 정도다. 특히 환자가 자신의 골수에서 줄기세포를 분리해 크리스퍼로 교정한 다음 다시 자신의 몸에 세포를 집어넣는 방식이기 때문에 기증자 부족 문제나 이식 세포로 인한 면역거부반응으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이 장점이다.

크리스퍼는 저자의 꿈속에서 밀려드는 파도처럼 생명공학계의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 되었다. 파도에 휩쓸리지 않으려면 일단 헤엄쳐서 올라타는 길밖에 없다. 그렇다고 저자는 크리스퍼가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존재라고 보지는 않는다. 크리스퍼가 오·남용될 위험을 경계하고 논의의 장을 마련하는 일에 적극 뛰어든 것이다.

생물학자로 실험실에서 세균 바이러스를 연구했던 그도 처음에는 크리스퍼가 엄청난 윤리적 논란을 부르고 있는 상황에 당혹감을 감추지 않는다. 유전자가위 기술이 발전하면서 중국 연구진 등은 인간 배아를 대상으로 실험을 했다. 후손의 게놈을 영구적으로 교정하기 위해 인간 생식세포를 변형하게 되면, ‘디자이너 베이비’가 현실화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됐다.

제니퍼 다우드나. 프시케의숲 제공

저자는 “흡사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된 기분이었다. 나는 괴물을 창조한 걸까?”라고 고백한다. 심지어 우생학의 신봉자 히틀러가 등장하는 악몽을 꾸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프랑켄슈타인 박사와는 다른 행보를 택한다. 그는 “인간 생식세포를 편집‘할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반드시 편집‘해야만 하는’ 걸까?”라는 윤리적 질문을 붙잡고 씨름한다. 이어 2015년 12월 그는 과학자들과 법학자, 윤리학자들을 모아 국제인간유전자편집 회의를 연다. 학자들은 안전성, 윤리성, 규제의 세 가지 측면에서 인간 게놈 편집 문제를 검토하고, 유전자를 교정한 아이의 출산을 금지하되 배아의 착상을 전제로 하지 않는 연구는 허용하기로 합의한다.

물론 과학자들 사이에서 합의가 이뤄졌다고 해서 윤리적 문제가 해소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저자가 지적하듯이, 치료 목적으로 유전병 환자에게 크리스퍼 기술을 사용한다고 하지만, 치료와 유전자를 ‘개선’하는 것의 경계는 생각보다 분명하지 않다. 만약 크리스퍼가 심장질환의 주범인 ‘나쁜’ 콜레스테롤인 LDL 콜레스테롤의 농도를 조절하는 단백질을 생산하는 것으로 지목된 PCSK9 유전자를 편집할 경우, 자녀에게 질병 예방을 넘어서 유전적 장점을 부여하는 일이 될 수 있다.

유네스코의 우려처럼 크리스퍼가 “인류 전체의 평등한 존엄성을 해치고 더 나은, ‘개선된’ 삶을 충족시키는 도구로 위장한 우생학을 부활시키는” 일이 될 가능성은 남아있다.

그렇다면 결론은? 저자는 “선천적으로 선하거나 악한 기술은 없다. 다만 인간이 기술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달렸을 뿐이다. 자신의 유전적 미래를 통제할 힘은 경이로운 동시에 두렵기도 하다”고 말한다. 크리스퍼 앞에 놓인 ‘좁은 길’을 어떻게 걷느냐에 따라 인간의 미래가 결정될 것이란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김유진 기자 yj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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