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뭐가 이쁘다고 결혼자금을 다 대줘!
삶의 한가운데

사랑은 이렇게 확실한데, 결혼은 알다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십 년의 세월이 흘러, 이제는 다른 말을 하게 되네요. 사랑은 알다가도 모를, 덧없는 그 무엇이지만, 결혼은 바위처럼 무겁고 확실한 것. 그 바위를 들어 올리려면 사랑만 갖고는 안 됩니다. 현실이라는 지렛대 말고도, 성찰이라는 단단한 받침대가 필요합니다. 나를 돌아보고 상대를 알아보고, 주위를 살펴보는….
홍여사 드림
제게는 늦둥이 아들이 하나 있습니다. 제 나이 육십 대지만, 아들은 아직 이십 대죠. 막내라 그런지 제 누나 그 나이 때하고만 비교해도 확실히 철이 덜 났습니다. 하지만 용케도 취업에 성공해, 그만둔다는 소리 않고 열심히 다니고 있으니 저희로서는 그저 신통할 뿐이네요.
그런데 그 녀석이 이번에 갑자기 장가를 가겠다고 해서 저희 부부는 깜짝 놀랐습니다. 결혼 얘기가 이렇게 쉽게, 빨리 나올 줄은 몰랐죠. 긴가민가 싶었지만, 그래도 누가 있긴 있나 보다 싶어 당장 궁금한 것부터 이것저것 물어보았습니다. 어떻게 만났고 얼마나 사귀었느냐, 나이는 몇 살이냐. 그러나 아들은 그 어떤 질문에도 제대로 대답해주지 않고, 일단 만나보라고 하더군요. 부담없이 밥 한번 먹자고요.
그렇게 아들과 날을 잡아놓고는 저희 부부는 싱숭생숭한 마음에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게 되더군요. 차라리 잘됐어, 여보. 우리가 너무 나이 먹기 전에 아들이 장가가기를 늘 바랐잖아. 그렇지만 이 녀석 좀 너무하는 거 아니야? 이건 당연한 듯이 부모한테 장가보내 달라는 식이구먼. 요즘은 어차피 애들 힘으로 결혼 못 한대. 아이고 또 그놈의 요즘 세상 탓이로구나.
'부담 없이' 만나보라던 아들의 말이 무색했습니다. 애초에 아들 결혼시키며, 뒷짐 지고 있을 생각은 전혀 아니었고, 나름 준비도 해 놓았음에도, 이상하게 부담이 되더군요. 꼭 집어 말할 수 없는 그 부담감이 남편 입을 통해 저절로 새어나왔습니다. '그런데 그 녀석 사람 볼 줄이나 알아?' 그랬습니다. 현실적인 준비를 해줘야 한다는 부담과 함께, 행여라도 정말 '아닌 애'를 데려오면 어떡하나 싶은 걱정이 우리 마음속에 있었던 겁니다. 내 눈엔 아무리 아니어도, 자식이 선택했다면 아무 말 없이 환영해야 하는가? 아니면 어른으로서, 할 말은 해줘야 하는가?
하긴 십년 전, 큰딸이 시집갈 때도, 똑같은 마음이었죠. 남자 친구를 데려온다기에 제가 솔직히 물었습니다. 내 느낌대로 솔직히 얘기하길 바라니? 아니면 그냥 축복해주길 바라니? 딸은 말하더군요. 엄마 생각이 나한테는 중요해. 그러나 다행히도 사윗감은 참 다정하고 성실한 청년이었습니다. 제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그 두 가지가 갖춰져 있었기에 저는 별 다섯 중 네 개 반을 줬습니다. 딸도 가벼운 마음으로 결혼을 서둘렀고, 그 결혼이 지금 건실하게 무르익는 걸 보는 제 마음도 흡족합니다. 그러나 아들은 딸과 전혀 다른 것 같습니다. 아들에겐 부모의 평점 따위 상관없나 봅니다. 여자 친구를 만나보기만 하면 엄마 아버지도 홀딱 반하실 테고, 만일 그렇지 않다면 엄마 아빠 눈이 이상한 거라고, 그렇게 믿는 듯하더군요. 일단은 허허 웃으며 기대해 볼 수밖에요. 제발 그렇게 참한 아가씨를 데려오기만 하라고 빌었죠.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만남의 결과는 피차간에 그리 흡족하지 못했습니다. 아들이 자랑한 만큼 대단한 아가씨가 아니어서가 아닙니다. 그날의 분위기가 양측에게 상처만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자리를 그렇게 망치고 만 것은 아무래도 어른인 우리 쪽 책임이 크겠지요. 하지만 워낙 생각의 차이가 컸습니다. 우리 부부는 기대를 안고 잔뜩 긴장해서 나갔는데, 정작 본인들은 아무 '부담 없이' 그 자리에 나왔더군요. 게다가 자기 할 말을 거침없이 다 해서 우리를 여러 번 놀라게 했습니다. 솔직한 거야 젊음의 미덕이라지만, 하는 말을 들어보니 결혼에 관해 진지한 고민이 없는 듯해, 그게 걱정스러웠습니다. 결혼을 하자는 것도 우리 아들 생각이 80퍼센트. 그조차도 가만 보니, 여자 친구를 붙잡기 위해 결혼이라도 불사하는, 그런 맹목적인 생각인 모양이었습니다.
그런 애들 둘이 '결혼'을 한다는 게 저희는 영 미덥지가 않았습니다. 부모님이 결혼시켜주면 기분 반 재미 반으로 한번 살아볼 생각인 듯 보였습니다. 그러다 더 이상 재미없어지면? 시련이 닥쳤는데 늙은 부모가 도와주지 못하면 그때는 어떻게 될까요?
저희 부부는 아들에게 솔직히 말했습니다. 어느 모로 보나 둘의 결혼은 아직 이르니 좀 더 사귀어보라고요. 아들이 귀담아듣지 않아도 할 수 없다 생각하고 느낀 대로 한 말입니다. 그런데 아들은 저희 부부의 예상보다 훨씬 거세게 반발하더군요. 엄마 아들은 뭐가 그렇게 대단하냐고, 걔의 무엇이 그렇게 마음에 안 드느냐고요. 저는 몰리다 못해 대답했습니다. 우선 불효녀인 것 같아 마음에 걸린다고요. 본인 부모님과도 그렇게밖에 못 지낸다는데, 또 그런 얘기를 남자 친구 부모 앞에서 당당하게 하는 아이인데, 그런 아이를 내 집안에 들이기가 솔직히 무섭다고요. 물론 너는 성인이니까 얼마든지 자유롭게 사귀고 결혼할 수 있지만, 부모의 의견까지 맘대로 바꿀 수는 없다고 했습니다.
아들은 그 뒤로 저희 부부와 말을 안 하려 들었습니다. 집에 안 들어오기도 하고요. 하긴 젊은 혈기에, 부모에게 그 정도 맞설 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히 고집을 하면 어쩌겠어요? 자식 뜻을 따라야지요. 그러나 그렇게 반쯤 포기가 될 때, 아들이 갑자기 전략을 바꾸었습니다. 이젠 다 필요 없다는 식입니다. 부모와의 관계야 어찌 되든 지금은 여자 친구를 잡을 때라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아예 막무가내로 요구하네요. 마음에 안 들어 해도 좋고, 며느리로 인정 안 해도 좋으니 결혼은 시켜달랍니다. 돈을 내놓으라는 소리입니다.
아들이 유치원생처럼 떼를 부리니, 남편도 폭발했습니다. 부모가 무슨 죄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억대의 결혼 비용을 대야 하느냐고요. 여자를 붙잡기 위해 제 부모를 압박하는 놈이 무슨 사랑을 말할 자격이 있느냐고, 한 사람을 얻기 위해 고생할 생각은 전혀 없는 여자를 뭐 하러 아까워하느냐고 소리칩니다. 아들은 아들대로, 엄마 아빠한테 실망했다고 야단입니다. 줘야 할 돈을 움켜쥐고 저희 사랑의 목을 죈다고 생각하나 봅니다.
아들 키우며 처음 듣는 '실망'이라는 말. 가슴이 아픕니다. 이러다 아들을 잃을까 무섭습니다. 어차피 저희 인생, 차라리 무턱대고 찬성하는 편이 나았을까요? 아니면 애초에, 결혼은 네가 알아서 하는 거라고 가르쳤어야 하나요?
※실화를 재구성한 사연입니다.
이메일 투고 mrshong@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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