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인의 예(藝)-<47>나혜석 '자화상'] 강인한 얼굴에 흔들리는 눈빛..新여성의 고뇌를 담다
그늘 드리운 꾹다문 입..힘겨운 삶의 무게 전해져
생전 300점 발표했지만 한국전쟁때 대부분 소실
末子 김건 前 한은총재 유언으로 남은 작품 기증

유난히 크고 긴 코와 기다란 얼굴을 가진 중년 여성이 화면을 한가득 채우고 있다. 큼직한 이목구비에다, 오렌지색 음영이 드리워 도드라진 광대뼈 때문에 강인한 인상을 풍긴다. 하지만 크고 검고 깊은 눈이 흔들리는 것이나 일(一) 자로 꾹 다문 입이 그늘을 드리운 것에서 쉽사리 해결되지 못할 깊은 고뇌가 전해진다. 구불구불한 머리칼은 그녀가 앞서 간 당대 ‘신여성’임을 암시한다. 기품있고 고상한 짙은 초록색의 재킷이 둥근 어깨를 감쌌다. 약한 빛이 새어드는 갈색조의 오른쪽 벽에 비해 검푸른 커튼이 드리운 왼쪽 배경이 훨씬 더 어두운데, 그 심연의 장막 속으로 여인의 한쪽 어깨가 빨려들 것만 같다. 어찌나 어둡고 얼마나 묵직한지 혹 그게 세상의 무게가 아니었을까 상상해 본다. 장식이라곤 진주색 단추 하나 달린 은회색의 옷깃 뿐인 수수한 옷차림이지만 그래서 더 우아하다. 흰 물감을 듬뿍 묻혀 쿡 찍은 진주색 단추가 가까스로 옷깃을 여며주듯, 이 여인이 현실과 사회에 발붙이고 있는 것 또한 어렵사리 유지되는 게 아닐까 지레짐작해 본다. 그림 아래 왼쪽에 ‘혜석’, 오른쪽에는 이름의 영문 첫 자와 나(Rha)씨 성의 앞 자를 따 HR이라 적혔다.

유학 중이던 1914년, 그는 17세의 나이로 조선인 유학생 기관지 ‘학지광’에 ‘이상적 부인’이라는 글을 기고한다. 일찌감치 여성의 사회적 권리에 눈을 떴다. 3년 뒤에는 “우리 조선 여자도 이제는 그만 사람같이 좀 돼 봐야만 할 것 아니오?”라고 반문하며 여성의 자각을 촉구하는 글을 같은 잡지에 실었다. 나혜석의 첫사랑이었던 문학가 최승구가 바로 그 ‘학지광’의 편집인 중 하나였다. 첫사랑이 요절하자 나혜석은 ‘원망스런 봄밤’이라는 우울한 심경의 글을 적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나혜석은 동료들과 여성계의 시위 확산을 모색했다. 3월 8일 체포됐고 5개월여 옥고를 치른다. 유학 당시 오빠 소개로 만난 열살 연상의 변호사 김우영이 변론을 맡았고 그 인연이 1920년 4월 정동예배당의 결혼식으로 이어진다. 당시 나혜석은 예비 남편에게 ‘결혼조건’을 요구한다. “일생을 두고 지금과 같이 나를 사랑해 주시오.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하지 마시오. 시어머니와 전실 딸과는 별거케 하여 주시오.”
파격 조건을 받아들인 김우영 부부는 나혜석의 첫사랑 최승구의 묘소로 신혼여행을 갔다. 남편은 약속을 지켰다. 1921년 경성일보 내청각에서 나혜석의 첫 개인전이 열렸다. 이 전시는 남녀를 불문하고 조선에서 열린 최초의 서양화 개인전이었다. 개인전 직후 낳은 첫 딸에게 김우영과 나혜석의 기쁨(悅)이라는 뜻으로 ‘김나열’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양성평등 실천을 위한 부모 성 함께 쓰기를 이룬 첫 사례로도 꼽힐 만하다. 외교관 발령이 난 남편과 떠난 세계일주도 요란했다. 2년 터울로 낳은 세 아이를 부산 시댁에 맡기고 둘만 떠났다.
기쁨은 짧았다. 남편이 베를린에서 법 공부를 하는 파리에서 그림을 배우던 나혜석이 천도교 교령이자 독립운동가 33인 중 하나인 최린과 불륜에 빠진다. ‘사랑은 눈으로 오고 술은 입으로 오듯’ 불같이 빠져들었고 훗날 이혼의 빌미가 됐다. ‘자화상’은 나혜석이 파리에 머물던 1928년 쯤에 그린 것이다. 화풍이 서구적인 것이나, 슬픔과는 사뭇 다른 고뇌가 느껴지는 데는 그런 저간의 사정이 있었다. 이혼한 ‘나쁜 어미’ 나혜석은 더이상 아이들을 만날 수도 없었다. 악착같이 그림에 매달렸고 열심히 글을 썼다. 그러던 중 절개를 버리고 일제에 타협한 최린이 조선총독부 중추원참의라는 고위직에 오를 무렵, 나혜석은 그 유명한 ‘이혼고백장’을 발표한다. 세상이 발칵 뒤집혔다. 지금도 상상하기 어려운 소상한 자기고백을 통해 정조관념의 남녀 평등을 얘기했다. 더불어 최린을 향해 당시 돈 1만2,000원이라는 거액의 ‘정조 유린 위자료 청구소송’을 제기한다.

작가는 갔어도 작품은 남았어야 했다. 그러나 생전에는 집에 큰불이 나서, 작가 사후에는 수많은 원고와 그림을 보관하던 오빠 나경석의 집이 한국전쟁 때 북한군에 의해 점령되면서 뭉텅이째 없어졌다. 어느 북한군의 엉덩이 데워줄 불쏘시개로 그렇게 걸작은 사라졌다. 나혜석학회 회장을 지낸 미술평론가 윤범모 동국대 석좌교수는 “나혜석은 조선미전 출품작 18점을 비롯 생전에 약 300점의 작품을 발표했지만 제대로 전하지 않아 현재 나혜석 작품이라 주장되는 것은 약 40~50점 정도”라며 “수차례 전문가 감정 결과 그 중 3분의 1만 진품이 확실시된 상황”이라고 설명한다. 확실한 진작(眞作)이라 할 만한 것은 ‘자화상’과 삼성미술관 리움이 소장한 1935년작 ‘화령전 작약’ 등 열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다. 야수파처럼 강렬한 색감, 표현주의적인 거침없는 붓질을 보여준 초·중기작을 흑백도록으로만 봐야 한다는 것은 너무도 안타깝다. 국립현대미술관은 1940년 후기작으로 추정되는 소품 ‘무희(깡깡)’을 소장하고 있지만 손떨림이 심했던 탓인지 특유의 힘이 덜하다. 그림이 작아 그럴 수도 있겠고, 세상이 그녀를 지치게 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캉캉이라는 춤을 다뤘다는 지점이 흥미롭다. 남의 치맛속이 뭐 그리 궁금해서 넋놓고 보냐며, 다리를 높이 차 들어 “볼테면 보라”는 식으로 자신만만 춤추던 그 무희들의 무대 뒷모습이라서 말이다.

나혜석은 여성해방운동의 불씨가 된 헨릭 입센의 ‘인형의 집’ 번역본 ‘노라’(1922년)의 첫머리에는 이같은 시로 노랫말을 지었다. 다행히 그녀의 글은 그림보다 훨씬 더 많이 살아남았다. 특히 여성 유학생을 다룬 자전적 단편소설 ‘경희’와 육아 경험담 격인 수필 ‘모(母)된 이야기’ 등은 문학가로서 그의 위상을 다시 세우고 있다.
나혜석의 ‘자화상’은 같은 시기 그린 미완성작 ‘김우영 초상’과 함께 지난 2015년 11월 유족에 의해 수원시에 기증,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소장품이 됐다. 유족은 나혜석의 막내아들인 김건 전 한국은행 총재와 부인 이광일 씨다. 김 전 총재는 평생 어머니를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모친의 불륜과 이혼 사이에 태어난 막내로, 모정을 느껴보지 못한 채 자란 까닭이 있었고 세상이 손가락질한 어머니에 대한 부담이 짓누른 탓일게다. 한국은행 총재 취임 기자회견에서조차 생모의 존재를 부인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그러나 그의 거실에는 늘 어머니의 그림이 걸려있었다. 불러보지 못한 사모곡은 죽기 직전 유언으로 터져 나왔다. 막내는 어머니의 그림들을 공공미술관에 기증해 달라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뒀다.
“사 남매 아이들아, 어미를 원망치 말고, 사회제도와 도덕과 법률과 인습을 원망하라. 네 어미는 과도기에 선각자로 그 운명의 줄에 희생된 자였더니라.”
나혜석은 1935년 ‘삼천리’에 기고한 ‘신생활에 들면서’를 통해 이렇게 목놓았다. 마침 그림은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오는 4월1일까지 계속되는 ‘신여성 도착하다’ 전에 출품됐다. 늘 그랬듯 ‘김우영 초상’과 나란히 걸렸다. 90년이 지나도 여전한 고민과 근심의 눈으로 우리를 보고 있다.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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