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많던 보조 범퍼는 다 어디로 갔을까?

대한민국 SUV시장은 초창기에는 신진 지프나 그 후예인 쌍용 코란도와 같이 군용차를 그대로 가져온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80~90년대에 접어들어서는 군용 지프의 형태를 벗어나 왜건형의 차체를 가진 쌍용 코란도훼미리, 현대 갤로퍼 등의 SUV들이 하나 둘씩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시기 대한민국의 땅을 누비던 국산 SUV 차량들 중 열에 아홉은 꼭 달고 다녔던 액세서리가 있다. 흔히 ‘캥거루 범퍼’, 내지는 ‘전투 범퍼’ 등의 이름으로 불리던 금속제 보조 범퍼다.


 

SUV 차량의 전면부에 추가적으로 설치하는 형태의 구조물인 보조 범퍼는 주로 북미권과 호주에서 사용하는 액세서리였다. 그리고 부르는 이름 또한 가지각색이다. 미국에서는 푸시 바(Push bar)나 그릴 가드(Grill guard), 혹은 불바(Bullbar) 등으로 부르며 호주에서는 루 바(Roo Bar), 캐나다에서는 무스 범퍼(Moose bumper) 등으로 부른다.


 

위의 세 나라가 보조 범퍼를 부르는 명칭에서는 공통적으로 ‘동물’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호주식명칭인 루 바는 우리나라에서 보조 범퍼가 ‘캥거루 범퍼’로 불리게 된 유래다. 호주 영어에서 roo는 캥거루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식의 보조 범퍼는 본래 ‘로드킬(Roadkill, 야생동물 교통사고)’에 대응하기 위한 장비다.


 

대형의 야생동물들이 서식하는 미국이나 캐나다, 호주 등에서 로드킬은 심각한 문제다. 미국의 경우, 연간 약 30만 건에 달하는 로드킬 사고가 일어나며 연간 200여명의 사람이 목숨을 잃는다. 호주는 전체 교통사고의 60% 가량이 캥거루에 의한 사고일 정도로 야생동물 교통사고가 빈번하게 일어난다.


무스(말코손바닥사슴)나 들소 같은 대형 야생동물과 충돌하게 되면 동물은 물론, 사람에게도 매우 위험하다. 이러한 대형 야생동물은 충돌 시 차대차 사고만큼이나 위험하다. 그 뿐만 아니라, 이러한 대형 동물이 아니더라도 야생동물은 운전 중 심각한 위험요소로 작용한다. 갑작스런 동물의 출현에 놀란 운전자들이 당황해서 이를 피하려다 사고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들 세 나라에서 금속제 보조 범퍼를 사용하게 된 이유는 대형의 야생동물과 충돌했을 때 충돌한 동물의 다리를 부러뜨리고 충돌한 동물이 차체 상부로 넘어오지 못하게 하는 데 있다. 따라서 이러한 범퍼들의 형상은 상부로 갈수록 돌출되는 구조를 갖는다. 금속제 보조 범퍼는 동물을 ‘죽여서라도’ 차 안에 탄 사람을 덜 다치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바꿔 말하면, 금속제 보조 범퍼는 대인 사고에 있어서 치명적이다. 사람보다도 더 큰 대형의 야생동물과의 충돌에 대비해 만들어진 장비인 만큼, 보행자에게 치명상은 물론, 높은 확률로 사망에 이르게 할 수 있는 위험한 장비다. 따라서 보행자 안전을 중시하는 정책을 펴는 여러 국가들에서 사용을 금지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나라도 그 중 하나다.


 

8~90년대의 SUV의 스타일을 완성시켜주는 아이템으로 유행한 금속제 보조 범퍼가 종적을 감추게 된 것은 2000년대를 전후로 한다. 이 당시 SUV 차량의 판매가 늘어남에 따라 보조 범퍼의 수요도 많아지게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금속제 보조 범퍼가 갖는 위험성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또한 보행자 안전에 대한 기준 등이 도입되며 자동차 제조사들이 더 이상 금속제 보조 범퍼를 적용할 수 없게 되었다. 오늘날에는 보행자 안전 문제로 인해, 시중에 출시되고 있는 신형의 SUV 차종 중 금속제 보조범퍼를 기본 사양으로 장착하고 있는 차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