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지금] 전세계 질식시키는 화학무기 공포.. 美·러는 폐기 않고 장사

# 지난 7일 시리아 반군 점령 지역인 동(東)구타에서 황색 가스가 퍼지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가장 먼저 호흡곤란을 호소했고, 어른들도 이내 눈에 출혈 증상을 보이며 기침을 했다. 시리아미국인의료협회는 이날 최소 29명이 염소가스에 중독된 증상을 보였다고 전했다. 뉴욕타임스(NYT)는 바샤르 알아사드 시리아 정권이 동구타로 진격하면서 독가스를 사용하고 있다며 이 공격을 비롯해 올해에만 6번의 화학무기 공격이 발생했다고 전했다. 워싱턴포스트(WP)는 미 정부 관계자를 인용해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시리아 폭격을 고심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 “영국과 러시아는 제2의 냉전에 돌입했다.” 영국 데일리미러는 지난 4일 솔즈베리에서 전직 러시아 이중스파이 세르게이 스크리팔과 그의 딸이 러시아군에서 개발된 신경작용제 ‘노비촉’에 중독된 사건 이후 양국 관계가 경색되고 있다며 이렇게 전했다. 특히 영국과 러시아가 자국 주재 상대국 외교관 23명을 각각 추방하고, 독일·프랑스 등이 한목소리로 러시아를 비난하면서 ‘서방 대 러시아’의 관계가 형성되고 있다고 외신은 전했다. 재선에 성공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이 사건과 러시아가 무관하다고 밝히면서 갈등은 깊어지고 있다.
화학무기가 국제사회를 흔들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이집트 등 4개국 외에 거의 모든 국가가 화학무기금지협정(CWC)에 가입한 상황이지만 일부 국가가 성긴 규제를 악용하면서 화학무기를 활용한 공격이 지속되고 있다. 화학무기는 비교적 손쉽게 제조·입수할 수 있고, 그 출처를 확증하기 까다로워 가해자를 찾기 어려운 반면에 그 효과는 치명적이어서 ‘가난한 자의 핵폭탄’이라고도 불린다. 전문가들은 화학무기 폐기를 약속했지만 번번이 어기고 있는 시리아를 반면교사 삼아 강대국의 협력하에 유엔을 중심으로 규제의 틀을 다시 정비해야 할 때라고 지적한다.

클링헨달 국제관계연구소가 지난해 10월 발간한 ‘화학무기 향후 과제’ 보고서에 따르면 화학무기는 1993년 탄생한 CWC가 1997년 발효되면서 본격 규제됐다. 1980년대 이라크와 이란이 자국 내 쿠르드족을 대상으로 화학무기를 사용하고, 냉전 중인 러시아와 미국이 각각 4만t, 2만8000t의 화학무기를 보유하는 등 국제적으로 화학무기 사용 가능성이 커지면서 CWC가 탄생했다. 1997년 CWC에 가입한 각국의 화학무기 보유 여부 등을 조사하는 화학무기금지기구(OPCW)가 창설하면서 화학무기 감독 체계가 완성됐다. CWC는 미국 등 강대국에도 비차별적으로 적용되고, 현장조사를 통해 강제적으로 화학무기를 폐기하도록 하는 최초의 다자간 군축 협약이다. 화학무기가 사라져야 한다는 보편적인 공감대가 형성돼 현재 이집트, 이스라엘, 북한, 남수단을 제외한 192개국이 CWC에 서명, 비준한 상태다.
CWC에 대부분의 국가가 동의하고 있는 건 화학무기의 파괴적 성격 때문이다. OPCW에 따르면 화학무기는 폭탄 등 운반체에 실린 화학물질로 크게 질식(염소·포스겐), 수포(겨자·루이사이트), 혈액(시안화수소), 신경(사린·소만·VX) 작용제로 나뉜다. 화학물질 중 일부는 살충제 등 산업용으로 쓰이는데, CWC는 이런 물질들이 목적에서 벗어나 대량으로 생산되거나 저장된 경우 화학무기로 간주한다.
화학무기를 구성하는 이런 물질들은 가장 약한 어린이나 노약자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준다. 보스턴대 산드로 갈레아 박사는 “아이들은 (어른들보다 적은) 방어기제를 갖고 있다. 면역체계의 성숙도가 낮아 대처하기 어렵다”며 “화학무기 공격을 받은 뒤 살아남더라도 아이들은 평생 글을 쓰거나 종이를 자르는 간단한 활동조차 하지 못하는 심각한 후유증에 시달리게 된다”고 지적한다. 아울러 화학무기는 불특정 다수 민간인에게 장기적인 피해를 끼친다는 점에서 치명적이다. OPCW는 “‘이란-이라크’ 전쟁이 끝난 지 오랜 기간이 지났지만 3만여명의 이란 시민이 이라크의 화학무기 탓에 현재까지 죽거나 고통을 겪고 있다”고 지적했다.

◆화학무기 규제 실패 대표 사례는 시리아
최근 10년간 화학무기와 관련해 인류의 잔혹성을 보여준 대표적 사례는 시리아 내전이라고 전문가들은 꼽는다. 영국 솔즈베리 스크리팔 암살 시도 사건이나 지난해 2월 VX를 통한 김정남 독살 사건은 일회적이었고 대상이 분명했지만 시리아에서는 최근 6년여 동안 지속적으로 사린, 염소가스 등이 사용됐기 때문이다.
시리아 정부가 화학무기를 갖고 있다고 공개적으로 밝힌 건 반군 공격에 수세에 몰린 2012년 7월이었다. 당시 버락 오바마 미국 정부는 시리아가 화학무기를 사용할 경우 무력 사용도 배제하지 않을 것이라며 위협했지만 시리아는 그해 12월 홈스 등에서 화학무기를 사용해 최소 32명이 사망했다. 국제사회가 화학무기 사용과 관련해 시리아를 본격적으로 주목한 건 2013년 8월21일 구타에서 사린가스가 담긴 로켓 공격이 발생하면서다. 이 화학무기 공격은 아직도 정확한 사망자 집계가 확정되지 않아 281~1729명이 사망했다고 추정될 뿐이다. 이후 그해 9월 미국, 러시아 등은 공동조사에 나서 시리아가 이 공격에 책임이 있으며 화학무기를 폐기해야 한다는 보고서를 공동으로 냈다. 시리아는 즉시 CWC 가입을 선언했고, OPCW는 한 달 안에 시리아 정부에 화학무기 보유 현황을 담은 보고서 제출을 명령했다. OPCW는 시리아가 화학무기를 해체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한 점이 인정돼 노벨평화상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화학무기를 폐기하겠다는 시리아의 약속은 불과 8개월 만에 거짓으로 드러났다. 이듬해 5월 하마주의 카프르 지타에서 염소가스를 활용한 공격이 발생하는 등 반군 거점 지역 최소 3곳에서 화학무기 공격이 이뤄진 것이다. OPCW는 2016년 말에서 현재까지 45번의 화학무기 공격이 이뤄졌는데, 2015년 8월 마레아 지역의 머스터드 가스 공격 등 일부 사건만 극단주의 단체와 연관됐을 뿐 대부분 시리아 정부가 주도했다고 설명했다. 영국 외무장관은 지난 2015년 10월 “지난 3년여 동안 시리아는 200여건의 화학무기 공격과 연관돼 있다”고 지적했다. 시리아는 특히 지난해 4월 칸세이쿤에서 사린가스를 활용한 화학무기 공격(사망 72명)을 벌인 뒤 현재까지 동구타를 중심으로 염소가스 사용을 멈추지 않고 있다.
◆화학무기 폐기… “OPCW 권한 확대 및 강대국 행동 변화 필수”
화학무기를 폐기하기 위해서는 일회적이거나 선언적인 성명보다는 OPCW와 같은 감독기구에 실질적인 권한을 부여하고, 미국과 러시아 등 강대국이 화학무기 폐기 흐름을 주도해 변화를 끌어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지난 4월 칸세이쿤 화학무기 공격 사건 당시 크루즈 미사일 59기를 시리아 공군기지에 발사하는 강수를 뒀다. 2013년 8월 시리아 정부가 구타에 사린가스를 살포한 뒤 오바마 정부가 군사공격을 하지 않아 다시 문제가 발생했다며 즉각 대응에 나선 것이다. 당시 트럼프는 “이번 군사공격이 향후 시리아에서 화학무기 사용을 막는 효과를 낼 것”이라고 장담했다. 하지만 시리아 정부는 러시아의 지원 아래 화학무기 사용을 멈추지 않으면서 트럼프의 말은 허언이 됐다. NYT는 “트럼프는 전략적인 측면을 고려하기보다는 오바마를 반대하고 호전성을 보여주기 위해 이런 결정을 내렸고 결과는 좋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이런 성급한 행동보다는 OPCW에 보다 많은 권한을 주는 게 국가 간 분쟁 소지를 없애면서 화학무기를 폐기하는 첫걸음이라고 강조한다. 클링헨달 국제관계연구소는 정치적 이유 탓에 OPCW가 예고 없이 기습 조사를 벌인 적이 없었고, 새로운 화학물질을 규제할 권한을 갖지 못한 점 등이 해소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2005년까지 화학무기를 제대로 신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러시아, 중국 등을 비난한 미국이 2009~2013년 오히려 중동에 최루가스를 수출하는 등 강대국들이 화학무기 폐기에 역행하는 모습을 보인 점도 문제라는 지적이다. 2023년까지 미국과 함께 모든 화학무기를 폐기하겠다고 약속한 러시아도 지난해 11월 유엔과 OPCW가 시리아에서 진행한 조사와 관련해 편향됐다는 이유로 조사 기간 연장을 담은 유엔 안보리 결의에 반대하는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고 있다.
이희경 기자 hjhk38@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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