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종묘가 한눈에 보이는 '세운 루프 톱'.. 공중 보행길 따라 박물관·북 라운지

세월에 조용히 늙어가는 듯했던 서울 종로구 전자상가인 세운상가가 변했다. 이곳을 지켜온 장인(匠人)과 상인들에 더해, 서울시 도시재생 사업인 '다시 세운 프로젝트'를 통해 청년 창업가들이 들어오며 되살아나고 있다. 컴퓨터로 치면 낡은 하드웨어에 새 옷 입히고 회로도에 해당하는 통행로를 정비했다. 지난 4월엔 '세운전자박물관' '세운북테크라운지' 등 개방형 공간이 문 연 데 이어 차갑고 딱딱한 부품들 가득한 건물에 카페, 갤러리, 공방 등도 하나둘 생겨났다.
since 1967… '다시 세운'으로
'사춘기의 나날, 유일한 낙이 있었다면/ 오르넬라 무티, 린제이 와그너, 엘리다 벨리…/ 세운상가 다리 위에서 이방의 여배우 이름이나 뇌까리는 것/ 세운상가, 욕망의 이름으로 나를 찍어낸 곳/ (중략) / 세운상가는 복제된 수만의 나를 먹어치웠고/ 내 욕망의 허기가 세운상가를 번창시켰다'
영화감독이자 시인인 유하는 시집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에서 세운상가를 이렇게 노래했다. 시인 또래인 40~50대 남자들에게 당시 세운상가는 빨간 테이프와 성인 잡지, '빽판'(정식 라이선스 없이 불법 복제된 음반)을 접할 수 있는 '맨 케이브(man cave·남자들의 공간)'였다. 남자라면 한 번쯤은 거치고 가는 성장통의 공간이기도 했다.
세운상가는 국내 최대 전자상가로 시작해 반세기 동안 흥망성쇠의 역사를 이어왔다. 1967년부터 5년간 세운상가부터 현대·청계·대림·삼풍, 풍전(호텔), 신성·진양상가가 세워지면서 종로에서 시작해 퇴계로에 이르는 주상복합건물단지가 들어섰다. 세운상가 건물뿐 아니라 일대를 아울러 세운상가라 불렀다. 국내 최초 주상복합건물이란 이유만으로도 주목받았다. 1960~80년대엔 기술자들이 모여 온갖 걸 만들어내면서 '탱크, 미사일도 만들 수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번창했다.
하지만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인터넷과 디지털, 모바일 기술 등의 발달로 유통 구조가 크게 변하면서 위기가 왔다. 지속적으로 철거 의견이 제기됐지만 2014년 서울시의 도시재생 사업 '다시 세운 프로젝트'로 되살아났다. 이 프로젝트 1단계 사업으로 세운·청운·대림 상가가 보행데크로 연결됐다. 각 건물의 2~3층, 동·서쪽엔 '세운 메이커스 큐브'라 부르는 컨테이너 29개가 들어섰다. 창작·개발 공간인 큐브엔 세운상가 수리 장인들이 만든 '수리수리협동조합', 대화형 반려 로봇을 제작하는 '서큘러스' 등 16개 스타트업과 예술가 그룹이 입주했다.

세운옥상·중정·세운보행교 등 빅 5
꼭 수리를 맡기거나 전자 제품 살 일이 없는 사람들이 가볼 만한 곳도 생겼다. 서울 한복판에서 뻥 뚫린 도심의 전망을 감상하고 싶다면 세운상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9층 '세운옥상'으로 올라간다. 세운상가 앞 녹음을 자랑하는 종묘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난간이 투명 창으로 돼 있어 탁 트인 개방감에 속이 뻥 뚫린다.
뒤돌아서면 남산이, 양옆으로 광화문대로의 마천루와 동대문이 펼쳐진다. 광화문 방향으로 난 벤치에 기대면 방콕이나 싱가포르 유명 호텔의 루프 톱 부럽지 않다. 옥상 구석 그늘에 벤치가 있긴 하나 요즘 같은 날씨 한낮에 찾는 것은 무리. 오후 8시까지 개방하니 일몰과 야경 감상을 추천한다. 대림상가 옥상도 가볼 만하다.
세운상가는 한국 현대 건축의 거장인 김수근이 설계한 작품이다. 건축 전공자들의 필수 투어 장소로 꼽힌다. 세운옥상과 함께 사진 동호인들이 많이 찾는 곳은 세운상가와 청계·대림 상가 5층에 있는 '중정'이다. 언뜻 보면 상가 건물 내에 있는 썰렁한 복도지만 세운상가 건축의 하이라이트로 꼽힌다. 반투명 아크릴로 된 박공지붕 모양의 천장을 통해 자연 채광이 돼 묘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세운상가에서 청계상가로 건너가는 지상 3층의 '세운보행교'는 청계천을 감상하기 좋은 위치다. 기존에 있는 청계천 다리보다 위에서 바라보는 전망이라 색다르다. 세운옥상처럼 난간이 유리로 돼 있어 청계천을 배경으로 사진 찍기에도 좋다.
세운보행교를 포함해 종로·청계천·을지로를 이어주는 공중보행길 '세운보행데크'는 신호등 없이 종로에서 을지로로 가는 지름길이자 4차 산업기술을 만날 수 있는 실크로드다. '세운 메이커스 큐브'가 세운보행데크를 따라 이어진다.
세운상가에서 시작해 세운보행데크를 따라 걸으면 '세운전자박물관'부터 만난다. 올해 말까지 '청계천 메이커 삼대기(三代記)'전을 연다. 집집마다 하나씩 있었다는 금성사 카세트 레코더, 1970년대 찾는 사람이 많아 청계천 일대 상인들이 아침마다 김포공항에 가서 실어 날랐다는 소니 트랜지스터 텔레비전, 1950~60년대 청계천에서 보물 대접받았던 외제 진공관 라디오 등 전시품들이 추억을 소환한다.
학창 시절 툭하면 망가져 속 썩이던 플로피디스크와 동전 먹는 귀신이라 불린 옛 게임기 앞에선 피식 웃음이 난다. 임플란트나 연골 만드는 데 쓰이는 의학용 3D 프린터, 물고기 배설물로 식물을 키우는 아쿠아팜 등 3세대 큐브 입주 업체들의 제작품도 눈길을 끈다.
세운보행교를 따라 청계상가 3층에 있는 '세운테크북라운지'는 과학기술 책과 메이커 문화 관련 책 총 800여 권을 모아놓은 공간이다. 세운전자박물관, 세운테크북라운지 모두 누구나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세운보행데크 따라 카페·서점 연결
삭막해 보이는 옛 건물에 전자, 전기와는 무관한 감각적인 점포들도 하나둘 문을 열었다. 대부분 세운·청계·대림 상가 세운보행데크를 따라 이어진다. 아직까지 떠들썩한 분위기는 아니지만 단골 층이 생긴 곳도 있다.
카페 '호랑이'는 고소하고 달콤한 맛이 강한 호랑이라테(3500원)와 후르츠산도(5000원), 베트남샌드위치(5000원)로 인스타그램 명소로 뜨는 곳. 옆집 '런던케이크' '이멜다분식'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모두 내부가 아담해 매장 앞 야외석을 두고 같이 쓴다.
세운테크북라운지 인근 '그린다방'은 평일 점심 25인분만 판매하는 돈가스(9500원)와 돈가스가 나오기 전 제공되는 수프가 맛있다고 소문났다. 낡은 옛 간판 위 초록색 상호가 세운상가와 잘 어울린다.
최근 서점과 아트숍도 문 열었다. '서점 다다'는 독립출판사 이라북에서 만든 곳으로 한 가지 주제의 책만을 선별해 전시, 판매한다. 현재 북한 관련 서적을 모아 놓았다. 그 옆 간판 없는 '아트숍'은 '앤서니 브라운전' '카림 라시드전' 등을 기획한 '아트센터이다'가 운영하는 아트숍이다. 그림 액자, 아트북 등을 비롯해 앤서니 브라운전과 카림 라시드전 관련 기념품을 만나볼 수 있다.
오래된 공간에서 노포 맛집도 빼놓으면 섭섭하다. 세운상가 상인들에게 '맛집'을 물어보면 여전히 열에 아홉 정도는 곰보냉면을 떠올린다. 50년 전통의 '함흥곰보냉면'은 세운상가 인근 예지동 시계골목에서 40여년간 터줏대감 역할을 하다 골목이 재개발되면서 2010년 세운상가 맞은편 세운스퀘어 4층으로 이전했다. 심심한 평양냉면과 자주 비교되는 매콤한 양념의 함흥곰보냉면(9000원)은 면을 다 먹은 후 남은 양념을 만두에 묻혀 먹는 게 '예의'다.
세운상가의 스타벅스쯤 되는 7층 '은방울휴게실'은 미숫가루, 생과일주스(모두 2000원)와 1500원짜리 냉커피가 인기 메뉴다. 30년간 운영해 온 주인은 지금도 수첩에 손 글씨를 써 주문받는다. 방문보다 배달 주문이 많다. "직원도 있었지만 지금은 혼자 해요. 젊은 손님들이 찾아오는 걸 보며 세운상가가 옛날처럼 활기차지길 기대합니다."
■세운상가 가려면…
운영 시간: 상가 평일 오전 9시~오후 7시, 토요일 오전 9시~오후 3시, 세운
전자박물관·세운테크북라운지 월~토요일 오전 10시~오후 7시, 세운옥상 오전 9시~오후 8시, 세운협업지원센터 안내데스크 오전 10시~오후 6시
주차: 세운상가 내 공영주차장 시간당 6000원.
대중교통: 지하철 1호선 종로3가역 12번 출구, 2호선 을지로4가역 1번 출구, 3호선 을지로3가역 6번 출구 이용
문의 (02)2273-5505, sewoon.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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