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새해특집] "어릴 땐 몰랐던 외환위기.. 국난 극복한 부모세대 존경"

배민영 2018. 1. 1.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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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어엿한 청년이 된 IMF둥이들 / "늘 집에 있던 아빠, 고교생 돼서 이해 / 다 팔고 1개 남은 금반지 도둑맞고 / 안타까워하던 부모님 모습 눈에 선해" / "지금 세대도 취업대란 '발등의 불' / '예전엔 더 힘들었다'는 식의 태도는 / 세대화합 막을 뿐 .. 격려해줬으면"
‘IMF’라는 알파벳 석 자는 한국인에게 ‘국제통화기금’이라는 고유명사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구조조정과 실직, 가정의 붕괴, 거리로 내몰린 삶…. 경제 주권을 잃은 한국인들을 몸서리치게 했던, 그래서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경험 탓이다. 외환위기 체제의 개막과 함께 취임한 김대중 대통령의 취임사처럼 국민 모두 땀과 눈물, 고통을 요구받던 시기였다. 2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적지 않은 국민에게 ‘트라우마’를 안겼던 외환위기도 ‘옛이야기’가 됐다. 당시 태어난 ‘IMF둥이’도 이제 어엿한 청년으로 성장했다. 대체로 초등학교 입학 후에야 교과서를 통해 외환위기를 알게 됐다는 20세 청년들에겐 어느덧 외환위기도 ‘역사 속의 한 사건’으로 인식돼 있다.

◆“늘 집에 계시던 아버지” … “도둑맞은 돌반지”

“아버지는 어디 가시지 않고 항상 집에 계셨어요. 전 그게 당연한 건 줄 알았고요.”

전남 순천에서 자란 문수민(20·여)씨는 외환위기 사태 직후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해 이같이 떠올렸다. 문씨가 4살 때 아버지는 한창 이직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외환위기 사태로 계획이 어그러졌다. 아버지는 결국 다니던 직장을 잃었다. 가장의 실직은 살림살이에 큰 타격이었다. 문씨네 가족은 얼마 지나지 않아 친척들이 모여 사는 시골집으로 이사했다. 아버지는 별다른 일이 없으면 항상 집에 머물렀다. 아버지가 다시 출근길에 오른 건 2년이 지나고서다.

문씨는 “다른 집은 아침마다 아버지가 어딘가 나가는데 나는 아버지랑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며 “동생이 막 태어날 무렵이기도 해 온 가족이 함께 모여있던 적이 많았다”고 기억했다. 아버지가 집에 있을 수밖에 없던 이유를 이해하기 시작한 건 고등학생이 되고 나서다. 문씨는 “수능 공부를 하며 다양한 사회지표를 봤는데 외환위기 직후 취업률이 뚝 떨어졌더라”며 “아버지가 일이 없어서 놀았다고는 어렸을 때 한번도 생각 못 했고 원래 그런 건 줄 알았다”고 회상했다.

어린 시절 자신의 돌반지를 도둑맞은 고호정(20·여)씨는 외환위기에 대한 기억이 남다르다. 살림이 어려워지자 부모는 고씨의 돌반지를 금은방에 팔았다. 소중한 추억이 담긴 돌반지 10개를 차마 모두 처분할 수 없었던 부모는 단 1개를 남겨 장롱에 간직해왔다. 하지만 고씨가 초등학교 1학년 무렵 집에 도둑이 들어 그것마저 잃었다. 고씨는 “아버지 어머니가 당시 안타까워하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고 했다.

서울 성북구 국민대학교에서 만난 ‘IMF둥이’ 6명이 활기찬 표정으로 뛰어오르며 2018 무술년 새해를 맞이하고 있다. 왼쪽부터 황나라, 문수민, 고호정, 박종훈, 정다운, 안소현씨.
이재문 기자
◆어려워도 ‘맹부삼천지교’… 어린 눈에 비쳤던 다사다난한 시기”

“아버지는 집이 어려워도 교육을 위해 꼭 서울로 가야 한다고 강조하셨어요.”

경기도에서 나고 자란 안소현(20·여)씨는 10살 무렵 아버지의 뜻에 따라 서울로 이사했다. 그는 “아버지는 ‘교육 여건을 고려할 때 반드시 목동으로 가야만 한다’는 소신이 강했다”고 기억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집안 사정상 서울 외곽지역으로 터전을 옮겨야 했다. 그 시절 아버지의 목표는 목동으로 ‘귀환’하는 것이었다.

안씨는 아버지를 바라보며 “‘가서도 힘들게 살 텐데 왜 굳이 목동으로 가려고 하는 걸까’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특히 2008년엔 미국 월가에서 비롯한 글로벌 금융위기로 다시 한 번 살림이 빠듯해졌다. 고심하는 부모의 모습이 종종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안씨는 “힘든 시기를 과거에 겪어서 그런지 이번엔 힘들다는 게 크게 느껴지진 않더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결국 그해 12월 목동으로 다시 이사해 줄곧 살고 있다는 그는 “지나고 나니 부모가 어려운 상황을 이겨내려고 얼마나 많이 노력했는지 알 것 같다”고 고마운 마음을 드러냈다.

서울 중랑구에 사는 정다운(20·여)씨의 어머니도 글로벌 금융위기의 ‘칼바람’을 피해갈 수 없었다. 정씨의 어머니가 다니던 외국계 회사가 인수 합병되면서 고용승계 여부가 불확실했다. 정씨는 “어머니가 ‘어차피 더 있어 봐야 정리해고될 것 같다’며 그만두셨다”고 기억했다. 어머니는 회사를 그만두고 전업주부로 지내고 있다.

◆발등에 떨어진 불똥 ‘취업난’… 격려도 해주셨으면

대학생 박종훈(20)씨는 학군단(ROTC)을 지원할 생각이다. 취업이 ‘하늘의 별 따기’인 상황에서 일종의 ‘보험’이 필요하다고 느껴서다. 그는 “학군단에 들어가면 대학 졸업 후 소위로 임관할 수 있다”며 “실업자가 될 것에 대비한 ‘플랜B’로선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기자가 되고 싶다는 황나라(20·여)씨도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황씨는 “과연 내 적성에 맞는 일인지도 모르겠고 차라리 요즘 같은 불경기에 대기업에 들어가는 게 훨씬 좋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면서 “하지만 그 또한 쉬운 일이 아닌 것 같아 답답하다”고 털어놨다.

그래서인지 IMF둥이들은 외환위기라는 ‘국난’을 극복해 낸 기성세대에 대한 존경심이 앞선다고 입을 모은다.

서범석(20)씨는 “우리는 아무것도 몰랐던 일인데 알고 보니 나라가 망할 뻔한 사건이더라”며 “어른들이 이겨내 주셔서 감사하고 앞으로 그런 일이 없도록 노력하는 건 우리 세대의 몫”이라고 말했다.

고씨도 “외환위기 시절 엄마 친구의 아이들이 친척 집에 맡겨지는 걸 볼 때마다 그들이 마치 남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힘든 시기 잘 돌봐주신 게 감사할 따름”이라고 거들었다.

이와 함께 청년들의 고충도 이해해주길 바라는 목소리도 있었다. 황씨는 “사회적 위기를 극복한 기성세대가 청년들에게 ‘내가 말이야, 예전에는 더 힘들었는데’ 식의 태도를 보이는 건 오히려 세대 간 화합을 가로막는 장벽으로 작용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청년층과 기성세대 모두 서로에게 말 한마디, 행동 하나를 할 때 조금만 배려한다면 예쁜 사회가 만들어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배민영 기자 goodpoint@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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