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쓰비시 RVR 시승기

RVR은 미쓰비시의 컴팩트 SUV다. 아웃랜더의 뼈대를 밑바탕 삼되 짐 공간을 줄여 아담하게 빚었다. 엔진은 직렬 4기통 2.0ℓ 가솔린, 변속기는 CVT다. 굴림방식은 FF와 AWD 두 가지로 300만 원 차이다. 시승차는 FF였다. RVR의 매력은 균형 잡힌 상품성으로 간추릴 수 있다. 승차감과 핸들링, 성능과 연비 모두에 해당되는 이야기다.

 

 

 

 

미쓰비시의 로고는 그 어원처럼 ‘세 개의 마름모’란 뜻이다. 1870년 이와사키 야타로가 창업하면서 자기 집안 고유의 문장을 응용해 만들었다. 미쓰비시는 항공과 전자, 플라스틱, 철강, 건설, 항공우주 등의 계열사를 거느린 일본의 대표적 재벌이다. 1857년 일본이 미국의 무력에 굴복해 문호를 개방한 ‘메이지 유신’ 직후 선박운송업으로 사업의 기초를 닦았다.

 

미쓰비시가 덩치를 부풀린 과정은 ‘연쇄반응’으로 요약할 수 있다. 가령 선박운송에 필요한 석탄을 챙기기 위해 탄광사업을 시작했다. 배를 만들기 위해 조선소를 세웠다. 여기에 철강을 공급하려고 제철소를 차렸다. 해상운송을 위한 보험사도 설립했다. 이런 과정을 반복하며 미쓰비시는 ‘수직계열화’를 완성했다. 생산에서 공급까지 대부분을 계열사가 맡는다. 

 

자동차 역시 미쓰비시의 수많은 사업 분야 가운데 하나다. 미쓰비시 자동차는 ‘현대차의 스승’으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졌다. 현대차는 1991년 ‘알파’ 엔진을 시작으로 자생력을 갖출 때까지 미쓰비시의 기술에 의지했다. 1997년 미쓰비시 자동차의 전 세계 판매대수는 680만 대에 달했다. 삼성전자가 미쓰비시의 한 계열사보다 규모가 작던 시절이었다.

 

반면 오늘날 미쓰비시 자동차의 위상은 초라하다. 생산규모가 현대차의 3분의 1 정도로 줄었다. 그런데 미쓰비시 자동차가 부진에 빠진 이유 또한 ‘연쇄반응’이었다. ‘내실경영’에서 ‘확장경영’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우선 최대시장인 미국에서의 판매가 시원치 않았다. 딜러들은 과한 리베이트를 내걸었다. 팔기 급급해 신용조회도 대충 넘어갔다. 

 

 

 

 

소비자가 갚지 못한 할부금은 빚이 되어 쌓였다. 게다가 라인업이 소형차 위주였다. 수익성이 낮았다. 다임러가 지분에 참여하며 ‘수직계열화’도 무너뜨렸다. 원가절감 때문이다. 그 결과 품질관리에 빨간불이 켜졌다. 히트차종도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미국 법인에선 성희롱 소송, 일본에선 제품결함을 은폐했던 사실이 드러났다. 기업 이미지에 치명타를 입었다.

 

2004년 5월 미쓰비시는 ‘사업재생계획’을 선포한다. 실패로 돌아간 2001~2003년의 1차 재건계획 이후 두 번째 도전이었다. 직원의 22%를 내보냈다. 4500억 엔의 증자도 했다. 일본 내 공장 한 개를 포함 전 세계 생산거점도 줄였다. 플랫폼은 15개에서 2010년까지 6개로 줄이기로 했다. 또한, 미쓰비시의 유전자를 지닌 소형차와 SUV에 집중하겠다고 했다.

 

미쓰비시의 ‘사업재생계획’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내년엔 네덜란드 소형차 공장의 문을 닫는다. 일본차 업체 중 유럽의 생산 공장을 폐쇄하는 건 미쓰비시가 처음이다. ‘사업재생계획’의 결실도 하나씩 현실로 거듭나는 중이다. 그 대표적 사례를 우리 땅에서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바로 RVR이다. 미쓰비시의 다짐처럼 그들의 DNA가 두드러진 소형 SUV다.

 

RVR은 미쓰비시가 재기의 희망을 품고 만든 차다. 전에 없던 차는 아니다. 벌써 3세대 째다. 그러나 과거와 성격이 사뭇 다르다. 1~2세대는 왜건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반면 이번엔 뱃바닥을 껑충 높여 SUV의 분위기를 살렸다. 뼈대는 아웃랜더와 나눠 쓴다. 미쓰비시의 대표 SUV인 파제로는 트럭을 밑바탕 삼았다. 반면 아웃랜더는 승용차의 뼈대를 품었다.  

 

 

 

 

‘사업재생계획’에 따르면 미쓰비시는 SUV 플랫폼을 2개만 남기기로 했다. 현재 미쓰비시의 SUV는 총 4차종이다. 프레임 방식의 파제로, 모노코크 방식의 아웃랜더와 RVR로 나뉜다. 파제로 미니도 있다. 그런데 경차로 분류된다. RVR은 아웃랜더의 뼈대를 기본으로 덩치를 줄여 완성한 차다. 아웃랜더보다 360㎜ 짧고 30㎜ 좁으며 90㎜ 더 납작하다.

 

그러나 실내공간을 좌우할 휠베이스는 2670㎜로 똑같다. 서스펜션의 구성은 물론 휠과 타이어의 사이즈마저 판박이다. 결국 RVR은 아웃랜더에서 짐 공간을 축소한 버전인 셈이다. RVR은 디자인마저 아웃랜더를 쏙 빼닮았다. 그릴과 흡기구를 위아래로 품은 사다리꼴 주둥이가 고스란히 겹친다. 미쓰비시가 부각시키겠다고 강조한 DNA 중 하나다.

 

뒷모습은 단정하다. 테일램프 주위는 음각으로 팠다. 범퍼엔 오밀조밀한 주름을 넣었다. 그래서 지루하지 않다. 전반적으로 RVR의 디자인은 ‘전형적’이다. 뾰족이 튀거나 한쪽으로 치우지지 않았다. 균형이 잘 잡혔다. 파격 없이 ‘구성의 묘’에 집착했다. 그래서 잘 생겼다는 평을 듣는다. 한편으론 아쉽다. 실수를 두려워하는 일본인의 기질이 묻어나는 듯해서다.

 

실내 디자인과 감성품질은 평범하다. 계기판 구성은 얼마 전 시승한 랜서 에볼루션과 판박이다. 그러나 시트는 훨씬 높직하다. SUV의 느낌은 최저지상고보단 이처럼 높은 시야에서 비롯된다. 인스트루먼트 패널도 전반적으로 높게 달았다. 각종 스위치의 배치와 기능 조작은 처음이지만 낯익다. 미쓰비시의 영향을 받은 현대차에 익숙한 덕분일 것이다.

 

 

 

 

RVR을 직접 보고 두 가지 점에서 놀랐다. 우선 사진으로 짐작한 것보다 실물이 훨씬 아담하다. SUV를 연상했는데, 벤츠 B-클래스처럼 오붓한 해치백이었다. 반면 실내는 바깥에서 넘겨짚은 것보다 널찍하다. 시트 크기에 욕심을 부리지 않고, 기둥과 도어 트림을 적절하게 빚은 결과다. 짐 공간은 오토캠핑까진 어려워도 당일치기용 짐 싣기엔 부족함이 없다.

 

엔진은 직렬 4기통 2.0L 가솔린으로 가로배치다. 6,000rpm에서 150마력, 4,200rpm에서 20.1㎏·m를 낸다. 여기에 6단 수동 기능의 CVT(무단변속기)를 짝지었다. 서스펜션은 앞 스트럿, 뒤 멀티링크. 굴림방식은 AWD와 앞바퀴 굴림으로 나뉜다. 시승차는 앞바퀴 굴림이다. 300만 원만 더 내면 AWD를 고를 수 있으니 가격하한선을 위한 ‘미끼’의 성격이 짙다.

 

가속 때 사운드는 극적이다. 화끈하게 치솟은 회전수를 유지하는 CVT 특성 때문이다. 그러나 빠르게 가속한다는 확신은 주지 못한다. 0→시속 100㎞ 가속 11초대의 수치 역시 인상적이지 않다. 그러나 수동 모드로 위안 삼을 만하다. 랜서 에볼루션과 같은 시프트 패들 덕분이다. 금속 특유의 싸늘한 감촉을 느끼며 딸깍딸깍 변속을 주무르는 재미가 제법이다.

 

전동식 스티어링은 작동감이 정갈하다. 답력과 복원력도 적당하다. 몸놀림 역시 왜곡과 과장 없이 담백하다. 승차감과 핸들링 사이에 적절한 타협점을 찾았다. 브레이크도 상식적이다. 페달 밟는 깊이와 샘솟는 제동력은 늘 예측할 수 있는 간격을 유지한다. 운전재미가 기대 이상이다. 이번 RVR이 데뷔 이후 가장 많이 접한 칭찬일 것이다.

 

 

 

 

미쓰비시 RVR의 매력은 이처럼 균형 잡힌 상품성에서 찾을 수 있다. 크기와 차급에 맞는 내용을 갖췄다. 외모는 보편타당한 취향을 만족시킨다. 그래서 어디든 당당하게 끌고 나설 수 있다. 잘 생겼단 소리도 심심치 않게 듣는다. 자칭 심오한 매니아라면 거들떠보지도 않겠지만, 아담하고 몰기 쉬운 RV를 찾는 이에겐 흠잡을 데 없는 선택이다.

 

미쓰비시 스스로 굳이 떠벌이지 않았을 뿐 첨단 소재도 아낌없이 썼다. 무게를 줄여 연비를 챙기기 위해서다. 앞 펜더가 좋은 예다. 사빅 이노베이티브 플라스틱의 노릴 GTX 수지로 만들었다. 폴리페닐렌 옥사이드(PPO)와 폴리스티렌(PS)을 섞어 만든 기능성 플라스틱이다. 이 회사는 사우디아라비아의 국영 기업이자 중동 최대의 기업인 사빅의 자회사다.

 

하지만 ‘해피엔딩’을 낙관하긴 어렵다. RVR만 보고 있으면 문제가 없어 보인다. 재기를 꿈꾸는 미쓰비시가 자랑스러워할 만하다. ‘사업재생계획’의 시나리오를 충실하게 반영한 결실이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치 않다. 시선을 돌리면 경쟁자가 득실거린다. 게다가 대한민국은, 미쓰비시 RVR이 사사건건 비교되는 현대 투싼과 기아 스포티지R의 안방시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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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기범(자동차 저널리스트) | 사진 최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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