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환의 시간여행] [57] "모든 간판 한글로".. 경찰 동원해 '강요'.. 떼돈 번 간판업계 "세종 동상 건립" 결의
1958년 8월 초부터 서울 거리 곳곳에서 경찰관과 상점 주인들의 실랑이가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했다. 한자 간판이 걸린 식당, 술집, 양복점 등 가게마다 경찰이 들이닥쳐 "즉시 한글 간판으로 바꾸라"고 강요하자 업주들이 반발한 것이다. "한자 간판을 없애자"는 가두 확성기 방송까지 실시됐다. 신문은 "서울 장안 동리와 거리마다 간판 개작 때문에 야단법석 대소동이 일어났다"고 보도했다.

사태의 불씨는 1957년 말 확정된 '한글전용 실천요강'에 있었다. 1948년 제정된 '한글전용에 관한 법률'의 적용 범위를 구체화해 공공 기관뿐 아니라 관공서 감독 밑에 있는 민간 업체에 대해서도 한글전용을 권하도록 했던 것이다. 특히 건국 10주년을 맞는 1958년 8월 15일이 다가오자 이승만 정부는 "기념일까지 모든 한자 간판을 한글로 바꾸겠다"며 강력하게 밀어붙였다. 경찰은 야당 당사에도 찾아가 '民主黨(민주당)'이라는 한자 간판을 한글로 고치라고 요구했다. 민주당 관계자는 "경찰은 아직 '自由黨(자유당)'이란 여당 간판은 못 봤느냐"며 쓴웃음을 지었다.
우리글을 애용하자는 취지야 나쁠 것 없지만, 범죄 단속이라도 하듯 강압적으로 '명령'한 게 문제였다. 문화 행정에 속하는 일을 경찰 손에 맡긴 것부터 난센스였다. 경찰의 의식은 한글전용과는 거리가 있었다. 한글 간판 부착에 관해 지시하는 경찰서 공문에 "所期(소기)의 成果(성과)를 擧揚(거양)토록 如左(여좌) 指示(지시)"라는 문구를 쓸 정도였다.
신문에는 한글 간판 부작용에 관한 지적도 이어졌다. "어느 학교가 개교 기념 미술전람회를 하면서 '개교미전'이라고 순 한글로만 쓰면 '개 교미(交尾) 전시회'로 오독할 수 있지 않으냐"는, 좀 억지스러운 주장까지 나왔다. 간판 소동 속에서 유일하게 함박웃음을 지은 사람들은 매출이 급증한 간판 제작업자들이었다. 1957년 말 간판업자협회의 정기총회를 마친 회원 1520명은 "세종대왕 동상을 남산 꼭대기에 세우자"는 안을 만장일치로 가결하기도 했다(경향신문 1957년 12월 19일자).
언론이 '간판 파동'으로 이름 붙인 이 사태는 국회에서까지 논란이 됐다. 의원들 질타에 치안국은 "강제 조치는 취하지 않도록 하겠다"고 한발 물러섰다. 결국 건국 10주년 기념일까지 한글 간판이 늘어나기는 했지만 목표한 것처럼 100% 한글화됐다는 기록은 없다. 간판 파동은 멀어져 가던 민심을 더 떠나게 만든, 정권의 무리수가 되고 말았다. 애초에 제1공화국 정부는 간판 한글화를 왜 그토록 밀어붙였을까. "이승만 대통령이 서울 거리를 시찰하다가 '(한자 간판이 많아) 중국 시가(市街) 같다'고 혹평한 것을 들은 내무 당국의, 당황한 긴급조치"라는 당시 기사가 배경을 짐작하게 한다.
한글 간판 파동이 일어난 지 60년 된 오늘, 우리나라 전국 거리 곳곳에 또 한글 간판 붐이 일고 있다고 한다. '콩당콩당'(카페), '개 키우는 남자'(애완동물 가게) 같은 우리말 간판들이다. 서울 홍대앞, 대구 중구 등 10~20대들이 많이 찾는 곳일수록 귀여운 느낌의 한글 간판이 급속히 뜨고 있다고 한다. 누가 시키고 권장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우리 글자의 멋을 깨닫고 사랑하는 흐름이 확산되고 있으니 이보다 흐뭇한 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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