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차 구입을 앞둔 초보 가장의 쉐보레 크루즈 시승기
나는 이제 갓 결혼하고, 임신, 출산을 계획하고 있는 초보 가장이다. 딱, 쉐보레 크루즈의 타겟이다. 현재 1.6리터급 2인승 소형차를 타고 있으나 크루즈를 우리 가족 세 명(혹은 네 명?)의 첫 차로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는 입장이다.
덕분에 시승행사에 가는 길이 마치 내 차 사러 가는 길 같았다. 가격 때문에 말 많은 차라 다른 차 시승 때보다 더 설렜다. 혹시 비싼 만큼 그 값어치 하지 않을까 궁금했다. 모든 차는 타봐야 아는 법. 왕복 150km를 주행하며 직접 피부로 느껴봤다.
일단 주행성능부터.
차를 받고 나서 먼저 확 밟아봤다. 가속이 경쾌하다. 1.4리터 터보엔진은 153마력을 뿜어내는데, 애초 ‘1.4’라는 숫자만 보고 크게 기대하지 않았으나 의외로 발진이 전혀 굼뜨지 않았다.
최대토크 24.5kg.m은 2,400rpm부터다. 출발 후 어느 정도 가속이 붙고 나면 최대토크가 나오는 엔진이라, 시속 40km 이상 3단 영역에서 가속이 매우 경쾌하다.
가속페달을 80%쯤 밟으면 발 끝에서 딸깍하는 느낌이 난다. 킥다운이 되면서 가속하는 ‘오버부스트’ 기능이다. 140km/h 이상 영역에서는 다소 힘에 부치기도 하지만 고속 가속도 전반적으로 만족스러웠다.
그렇다고 힘만 좋은 준중형차에서 가끔 느껴지는 경박함은 없다. 준중형이라서 나와 엔진 사이에 개입하는 것들이 적을 것이라 생각했으나 실제로는 뭔가 많이 필터링을 하는 느낌이다. 힘과 정중함이 동시에 느껴지는 세팅이다.
감속도 마찬가지다. 브레이크 세팅이 아주 좋다. 내가 굳이 발끝을 신경 써서 세심하게 움직이지 않아도, 차를 원하는 속도로 부드럽게 세울 수 있다. 고속에서 급브레이크를 밟아도 차체 뒷쪽이 흔들린다거나 불안한 기색이 없었다.
정숙성 훌륭하다
고속 주행 중 크게 와닿은 것은 정숙성이다. 고속도로 시멘트 바닥을 주행할 때도 옆사람과 그리 크지 않은 목소리로 대화가 가능했다. 노면 소음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 부분에 신경을 많이 썼구나’라는 생각은 확실히 든다.
풍절음도 크지 않다. 공기저항계수가 0.28Cd다. 단, 고속도로 주행 중 뒷자리에서는 앞사람이 목소리를 조금 높여줘야 말이 들린다.
정속 주행 시 급가속하지 않는다면 엔진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는다. 쉐보레는 "급가속 시 엔진 소음 특성을 2,000헤르쯔로 맞춰, 유럽차 느낌의 아주 듣기 좋은 소리를 만들어냈다"고 했다. 솔직히 말하면 배기도 그렇고 대중 브랜드의 준중형 4기통 터보 엔진의 사운드가 감동할 만한 수준은 아니다.
수동 변속 방식이 바뀐 변속기
변속기는 말리부에도 사용된 젠3다. 많이 리뷰된 변속기다. 모두를 놀라게 한 변신이 있었으니, 바로 변속 방식이다.
‘D’에서 기어봉을 왼쪽으로 당긴 후, 앞 뒤로 밀며 변속할 수 있다. 쉐보레가 소비자들의 원성을 듣기는 했나보다. 정말 반가운 선택이다.
이 변속기는 업시프트보다는 다운 시프트가 신속하다. 업다운 모두 빠른 변속 속도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변속충격은 거의 없다. 최대 RPM은 6,500수준으로 여기서 더 올리기는 힘들다. RPM을 가능한 최대치로 올려도 자동 변속이 되지 않도록 한 방식은 여전하다.
코너링과 서스펜션
서스펜션은 앞쪽 맥퍼슨 스트럿, 뒷쪽 토션빔이다. 특히 뒷쪽은 멀티링크와의 차이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토션빔의 단점이 드러나지도 않는다. 아주 세팅이 잘 돼 있어서 지금껏 타본 토션빔 모델 중 가장 만족도가 크다. 토션빔인지 모를 수도 있다.
다만, 멀티링크 서스펜션을 단 아반떼 스포츠가 자꾸 떠오른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비싸게 등장한 크루즈 앞에서 이게 의식이 되는 건 당연하다. 세팅이 정말 좋았기로서니 망정이지 이것마저 놓쳤다면 큰일 날 뻔 했다.
스티어링 휠을 이리저리 돌려봤다. 좌-우 롤링이 크지 않고, 언더스티어 현상도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굽은 길에서 스티어링 휠을 90도 이상 잡아 돌리며 고속으로 진입해도, 타이어가 좀처럼 지면에서 떨어지거나 미끄러지지 않는다. ECU와 배터리를 트렁크 아래에 위치시켜 무게 배분이 앞뒤로 적절하게 이뤄진 것도 영향을 미쳤을 터다.
스티어링 휠은 R-EPS. 랙 앤 피니언 구조에서 전기모터가 좌우 바퀴를 연결하는 랙에 달려있는 타입이다. 랙 타입은 전기모터가 지면에 가깝게 있기 때문에 좀 더 내구성이 좋은 소재를 써야 하고, 구조도 다른 타입보다 복잡하다. 그래서 더 비싸다. 대신 랙을 직접 움직이게 되므로 핸들링이 직관적이다.
R-EPS를 달았다 하더라도 다른 것들이 뒷받침되지 못하면 모든 게 헛수고다. 크루즈는 초고장력 및 고장력 강판을 74%이상 사용했다고 밝혔다. 핸들을 돌리다 보면 차체가 든든한 게 여실히 드러난다.
쉐보레 레이싱 팀에서도 차체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현장에 있던 배우 겸 카레이서 안재모 씨는 “신형 크루즈로 레이스카를 제작할 때, 차체 보강을 안 해도 괜찮았다”며, “다른 구조물 설치를 위해 구멍내는 것조차 힘들었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쉐보레 소속 드라이버니까 저런 말 하겠거니 했는데, 직접 움직여보니 십분 이해가 됐다.
과속방지턱을 넘어봤다.
서스펜션은 폭 1m가량의 과속방지턱을 맞이하는 순간과 떠나보내는 순간을 부드럽게 처리한다. 넘은 뒤에도 남은 진동이 거의 없고, 넘어 간 뒤의 느낌도 불쾌감이 적다. 뒷좌석에 아내와 아이를 태운다면 안심이 될 것 같다.
과속방지턱을 몇 번 넘고 나니 다음 과속방지턱을 넘을 때는 차츰 속도를 높일 수 있었다. 속도를 높여도 부드럽게 받아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사선으로 넘어도 느낌은 크게 다르지 않다.
노면의 잔진동은 통통거리며 전달하는 느낌이다. 아무래도 이전 세대보다 200kg가 감량한 무게(1,250kg) 탓도 있는 듯 하다. 큰 요철은 부드럽게 걸러주지만 잔진동 필터링은 차급을 감안해야 한다.
달리기 성능은 전반적으로 크게 만족스러웠다. 이 정도면 국산 준중형에서는 거의 원톱이다. 편안함을 위주로 세팅했다더니 스포티하게 몰아부쳐도 될 만한 수준이다.
준수한 외모
개인적으로는 지금껏 만나본 쉐보레 디자인에서 가장 좋은 점수를 주고 싶다. 진화한 듀얼포트그릴을 중심으로 덩어리와 면을 잘게 나눴다. 선 변화를 활용해 그 어느 때보다 역동적인 얼굴이 됐다.
옆모습은 늘씬하다. 앞-뒤 바퀴 사이 거리는 딱, 2.7m다. 현대 싼타페와 같다. 길이는 현대 아반떼보다 약 10cm나 길다. 이를 바탕으로 보닛은 최대한 짧게, 실내공간은 최대한 넓게 만들었다.
말리부 출시 때, ‘뒷 모습이 아쉽다’라는 말이 돌았다. 크루즈도 마찬가지였다. 뒤에서 보면 차체가 좁아보인다는 말도 나왔다. 트렁크가 높기 때문에 일단 덩어리가 넓은 형상이 아닌 이유도 있다. 범퍼 하단에 디퓨저처럼 보이는 패널이라도 하나 덧댔으면 어땠을까.
실내로 들어가보니
실내 디자인은 형상 자체만 놓고 보면 만족스럽다. 시승 때마다 새로운 센터페시아를 익히는 시간이 필요한데, 크루즈에서는 그런 게 필요 없었다. 따로 들여다 보지 않아도 바로 모든 버튼을 쓸 수 있다. 버튼 크기, 촉감, 조작감 등 모두 합격점을 주고 싶다.
오랜 주행 후에도 크루즈 시트는 그리 불편하지 않았다. 특히 뒷좌석은 키 177cm인 기자가 앉아 있을 때, 무릎공간이 한뼘 정도 남았다. 등받이 각도도 편안하게 잘 잡혀 있다. 엉덩이를 뒷좌석에 딱 붙이고 앉으면 낮게 떨어지는 창문 라인 때문에 시야가 가리기도 하지만, 착좌감은 말리부 부럽지 않다.
트렁크 용량은 469리터로 경쟁모델중에서 가장 크다. 트렁크 좌-우 벽을 튀어나온 부분 없이 평평하게 뽑아냈기 때문에 짐 실을 때 걸리는 부분도 적다. 6:4로 뒷좌석을 접으면 더 넓게 쓸 수 있다.
편의장비 살펴보니
여러가지 편의, 안전장치도 있을 만큼 있다. 평행주차, 직각주차 시 스티어링 휠을 모두 알아서 돌려주는 기능은 우리 아내에게 패치로 깔고 싶다.
이 중에서도 차선유지보조 기능과 전방충돌경고장치가 특히 눈에 띈다. 차선유지보조기능은 여러 경쟁모델 중 크루즈에만 있는 비싼 장비다. 고속도로에서 써 보니 차선이탈이 거의 임박할 때 쯤 작동했다. 미리 개입하는 타입은 아니다. 보통 미국계 차들은 몇 번 작동하다 기능이 해제되곤 했는데, 크루즈는 상당히 긴 시간 계속 개입했다.
크루즈는 좋은 차다. 다만
이처럼, 쉐보레 크루즈는 잘 달리고, 잘 서고, 잘 돌아나가고, 실내 넓은 매력적인 차다. 하지만, 여기까지는 가격 생각을 하지 않고, 차를 바라봤을 때 얘기다.
크루즈는 국산 준중형 5차종 중에서 가격 스펙트럼이 가장 높은 곳에 퍼져 있다. 기본 가격은 1,890만 원으로 준중형 시작가가 가장 낮은 기아 K3 시작가 1,395만 원보다 495만원, 강력한 경쟁상대 아반떼보다 480만원 비싸다.
뭐, 사실 준중형차에서 깡통 사는 사람 잘 없으니 기본트림 가격 비교는 저쪽에 던져놓는다고 해도, 실제로 살만한 등급에서 가격부담은 여전하다.
크루즈 고객은 경쟁모델과 비슷한(혹은 더 비싼) 가격을 지불하고도 앞좌석 통풍시트, 허리 지지대, 조수석 전동 시트, 뒷좌석 송풍구 및 시트 열선, 뒷좌석 USB 포트, HID 헤드램프, 썬루프를 포기해야 할 가능성이 높다. 뭔가 많은 듯 하면서도 정작 들여다 보면 사람들이 은근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몇가지가 빠져 있다.
대시보드, 문짝 안쪽 유리 바로 아래 패널 등, 실제로 손이 많이 닿는 부분을 말랑말랑한 소재로 처리하지 않은 점, 6개 밖에 되지 않는 에어백과 별 네 개에 그친 충돌테스트(NHTSA) 점수, 순정 내비게이션을 선택했음에도 스마트폰 네비게이션을 더 잦게 사용하는 점도 감수해야 한다.
물론, 좋은 자동차의 기본기를 통풍시트가 있느냐 없느냐, 네비게이션이 친절하냐 아니냐 등, 편의장비로 평가할 수 없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준중형 차를 사는 고객들의 심리를 잘 생각해봐야 한다.
서두에서 밝혔듯 기자는 갓 결혼하고, 수년 내 출산을 계획하고 있는 초보 가장이다. 크고 좋은 수입차 한 대 사놓고, 세컨드 카를 찾는 게 아니다. 그 동안 모은 적금을 깨 선납금으로 내고 양육비와 할부금을 부담해야 하는 입장이다.
크루즈 구입을 고려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와 조건이 비슷하다. 근엄한 표정의 신사임당 그림 한 장이 매달 아쉽다. 경쟁 모델이 운동성능에서 크게 뒤쳐지지 않는다면 같은 값에 좀 더 푸짐한 차를 사기 마련이다. 결국 가격이 가장 중요 하다는 얘기.
쉐보레는 나보다 공부도 잘 했고, 훨씬 뛰어난 분들이 모인 자동차 회사이니 관련자들이 이를 모르지는 않을 터. 부족한 내가 봐도 소비자들의 선택을 좀 더 받기 위해서는 다른 대책이 필요해 보인다.
완성도가 크게 높아진 크루즈의 운동성능에 가치를 둘까, 아니면 그걸 포기하더라도 좀 더 가격이 저렴하면서 뭔가 하나라도 더 있는 차를 선택할까, 솔직히 아직도 결정하지 못했다.
“말리부가 첫 출시 이후에 상품성 개선 모델을 내놓았던 것처럼 크루즈도 그렇게 할까? 그 때 가서 살까?” 그런 생각이 든다.
*쉐보레는 3월 8일부로 크루즈 가격인하를 단행했습니다. 아래 관련기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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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빈 everybody-comeon@carla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