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국을 가로지르는 그 길, 현실의 코마코를 만났다

허연 2017. 2. 16.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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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연의 일본문학 기행-11] 에치고 유자와 역 서쪽 출입구를 걸어나오면 작은 역 광장을 지나자마자 곧바로 왕복 2차선 도로를 만난다. 이 도로는 소설 '설국'에서 무척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야스나리가 묵었던 다카한(高半) 여관에서 역을 연결해주는 유일한 길이자, 마을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큰 길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야스나리는 글을 쓰기 위해 마을에 묵는 동안 수없이 이 길을 산책했을 것이다. 그리고 때로는 이 길 위에서 고마코의 실제 모델인 게이샤 마쓰에(松榮)를 기다렸을지도 모른다. 고마코가 새침한 표정으로 발걸음을 재촉하곤 하던 모습도, 시마무라가 '도쿄'라는 현실로 돌아가기 위해 쓸쓸한 걸음을 내디뎠던 장면도 모두 이 길 위에 추억으로 새겨져 있었다.

 도로에 접어들어 상점 몇 개를 지나면 '설국관(雪國館)이라는 간판이 걸려 있는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설국'이 쓰인 다카한 여관에 도착하려면 아직 멀었는데 웬 설국관인가 의아했다. 들어가 보니 3개 층으로 되어 있는 건물에 '설국' 관련 전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지역의 향토문화전시장도 겸하고 있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전시장의 정식 명칭도 '유자와 마치 역사민속자료관, 설국관'이라는 긴 이름이었다.

 민속자료관에는 이 지역 가옥을 재현해 놓은 방이 있고 화로 주전자 등 생활용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옆에는 농사와 채집, 사냥 등에 사용했던 도구들과 오래된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다. 눈이 많이 내리는 지역의 오래전 생활상을 한 눈에 볼 수 있는데 일본 스키의 발상지 답게 스키 관련 자료들이 눈길을 끈다.

 야스나리의 흔적을 찾기 위해 그곳에 간 나는 1층 설국 관련 전시에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는데, 설국을 주제로 그린 일본화 14점이 어두컴컴한 전시실에 유물처럼 걸려 있었다. 그중 한 쪽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50호짜리 그림이 있었다. 후나미즈 노리오라는 화가가 그린 '고 마코(駒子)'라는 작품이었는데 채색이나 분위기가 너무도 생생했다. 또, 야스나리가 입었던 옷가지, 사용했던 찻그릇, 회중시계, 글씨 등도 전시되어 있었다.

 특별히 눈에 들어온 건 인위적으로 만들어 놓은 작은 방이었다. 방의 이름은 '고마코의 방'. 고마코가 창가에 앉아 누군가를 기다리는 모습이 모형으로 제작되어 있었다. 왜 하필 이곳에 '고마코의 방'을 만들었는지에 대한 궁금증은 설명서를 읽으니 곧 풀렸다.

소설 "설국"의 주인공인 코마코의 실제 모델인 마쓰에의 젊은 시절 모습.
 '설국관'이 있는 이 자리가 바로 고마코의 실제모델인 마쓰에가 살던 숙소였던 것이다. 1920~1930년대 온천 붐과 스키 붐이 불고 시미즈 터널이 완성되면서 이곳에 관광객들이 많이 몰려들었는데 그 무렵 게이샤들은 이곳에 있던 대기소에서 지내다 호출이 오면 손님들을 맞으러 나가곤 했다. 야스나리는 1934년 처음 유자와를 방문해 19세의 마쓰에를 만난다. 가와바타 35세 때의 일이다.

 설국관에 있는 자료에 보면 마쓰에의 본명은 고다카 기쿠(小高きく)다. '기쿠'는 국화라는 뜻이니 본명이 참 분위기가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마쓰에는 1915년에 태어나 1999년까지 살았으니 꽤나 장수한 셈이다. 마쓰에는 23세 때 유자와를 떠나 도쿄로 이사했고 27세에 결혼해 평범하게 살았다고 한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학교를 중퇴하고 10대 후반 게이샤가 된 그는 야스나리를 처음 만났던 날을 이렇게 술회한다.

 "큰 눈으로 무엇인가를 가만히 응시하는 말이 없는 사람이었어요. 내가 사미센을 타면 가만히 듣고 있었어요. 가와바타 씨는 술을 많이 안 했고 주로 제가 마셨어요."

 물론 소설 '설국'에 나오는 것처럼 둘 사이에 어떤 사연들이 있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하지만 야스나리가 이 앳되고 예쁜 게이샤를 보고 어떤 캐릭터를 떠올린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실제로 1957년 '설국'이 영화로 만들어졌을 때 이곳을 떠나 있던 마쓰에는 영화사 초청으로 촬영 현장을 방문하기도 했다. 1968년 '설국'이 노벨문학상을 받은 이후 야스나리와 마쓰에는 이곳에서 오랜만에 대면을 하기도 했다. 수상을 기념한 의례적인 행사였겠지만 이 자리에서 야스나리는 마쓰에게 감사의 인사를 했다고 전해진다.

 소설 속에서 고마코는 깨끗함과 당돌한 모습으로 그려진다.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고마코의 실제 모습이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 다행스럽게도 그 궁금증은 쉽게 풀린다. 마쓰에의 사진 몇 장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전시장에 걸려 있는 오래된 흑백사진이지만 그는 충분히 깨끗하다. 야스나리가 어떤 느낌을 받았을지 눈치 채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그렇다면 요코는 실존인물이었을까? 실존인물이 아니었다는 게 정설이다. 요코는 설국이라는 환상의 공간을 위해 새롭게 창조된 인물이 아닐까.

 [허연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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