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환의 흔적의 역사]'구구단, 남근, 가요'-백제의 빅3 목간

이기환 논설위원 2017. 1. 18.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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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목간은 매우 중요한 고고학자료이다. 생생한 서사가 기록된 당대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목간과 더불어 사랑받은 서사재료는 죽간이었다. 딱딱한 대나무를 짧게는 20㎝, 길게는 70㎝ 정도 일정하게 자른 뒤 다시 1㎝ 넓이로 쪼갠다. 이곳에 붓과 먹으로 문자를 쓴다. 책(冊)이라는 한자는 죽간을 매단 모습을 형상화 한 글자다. 전(典)자는 책을 들고 있는 모습이다.

■위편삼절의 뜻은

<사기> ‘공자세가’를 보면 흥미로운 대목이 나온다. 공자가 위편삼절(韋編三絶), 즉 가죽으로 엮은 책이 세 번이나 끊어질 정도로 독서에 열중했다는 것이다.

대나무가 흔치않은 한반도에서는 목간이 애용됐다. <삼국유사> ‘거타지조’에 흥미로운 대목이 나온다.

즉 신라왕의 막내아들인 아찬 양패가 당나라에 사신으로 갈 때 백제의 해적이 골도(골대도·백령도)에서 길을 막는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궁수 50명을 뽑아 호위시켰는데 백령도에 이르러 거센 풍랑이 일었다. 이떼 제사를 지나자 꿈에서 노인이 나타나 “궁수 중 한 사람을 이 섬에 두고 떠나면 괜찮다”고 했다. 잠에서 깬 양패가 “누구를 머물게 할 것이냐”고 묻자 여러 사람이 대답했다.

쌍북리에서 확인된 구구단 목간. 99 88과 같은 수는 9〃8〃로 생략했다. 표현 91 92 93이 아니라 99 89 79…식으로 써내려갔다. 20과 30, 40은 별도의 글자로 표시했다. 무엇보다 각 단 마다 구분선을 그었다.|윤선태 동국대교수 제공

“목간 50쪽에 궁수들의 이름을 써서 물에 띄워 가라앉는 것으로 제비를 뽑읍시다.”

그러자 거타지라는 사람의 목간이 물에 가라앉았다. 그를 머물게 했더니 순풍에 돛단듯 배가 지체 없이 나아갔다.

■논어목간, 주민등록 목간, 인덱스 목간….

목간은 종이가 보급된 시대에도 널리 쓰였다. 경제성과 내구성이 종이 보다는 한 수 위였기 때문이다.

한반도에서 확인된 목간은 지금까지 500여 점에 달한다. 목간은 주로 습기가 많은 곳에서 집중 출토된다. 왜냐. 목재는 산소가 차단된 물 속에서 좀처럼 부식하지 않기 때문에 수백 수천년 동안 보존되는 것이다. 때문에 우물이나 연못, 저수지, 배수지 같은 유적이라면 엄청난 목간들이 남아있을 가능성이 짙다. 안압지나 함안 성산산성 같은 곳이 대표적인 예이다. 지금까지 확인된 백제목간은 70여점이다. 신라 목간보다는 적은 편이다.

그러나 신라의 도읍지인 경주와 마찬가지로 백제의 마지막 수도인 부여 역시 유물의 지뢰밭이다. 어느 땅을 파도 백제 사비기의 문화층이 존재한다. 최근에는 능산리·관북리·쌍북리와 궁남지 등에서 백제 목간들이 상당수 발견된다.

종류도 다양하다. 물품 꼬리표 목간과, 두루말이 종이문서를 찾을 수 있도록 한 색인(인덱스) 목간, 그리고 춘궁기에 곡식을 빌려주었다가 추수기에 이자와 함께 원금을 돌려받았음을 기록한 일종의 환곡문서인 대식(貸食) 목간 등…. 또 인천 계양산성에서 확인된 것처럼 <논어> 제5장인 ‘공야장’이 일부내용이 적힌 경전 목간도 있다.

이밖에 궁궐 출입 때 신분을 증명하는 이른바 부신용 목간도 있고, 창고정리용 목간도 나온다. 그러나 관전자의 관심을 끄는 목간은 뭐니뭐니해도 ‘기타 용도’의 목간이다. 가장 관심을 끄는 백제의 ‘기타 목간 빅3’는 바로 ‘구구단 목간’과 ‘남근형 목간’, 그리고 이른바 ‘백제가요 목간’이다. 이 빅3를 차례차례 살펴본다.

■숫자가 나열된 목간의 정체

‘九〃八一 八九七□□ 七九六十三(9981 897□ 7963)….’

2011년 6월 사비 백제의 도읍지인 부여 쌍북리 주택 신축공사장에서 수수께끼 같은 목간 1점이 수습됐다.

발굴단(한국문화재보호재단)은 적외선 촬영 결과 이 목간들이 관청이 문서나 물건 등을 운송하면서 사용한 것으로 보았다. 운송할 물품의 포장이나 문서꾸러미 윗부분에 올려놓거나 목간의 구멍에 끈을 꿰어 고정시킨 상태로 사용했다는 추정이었다.

그런데 5년 뒤인 2016년 1월 16일 한국목간학회가 흥미로운 발표회를 열었다. 최근에 발견된 목간 신자료의 사례발표였다. 당시 학회 섭외이사로 발표회를 진행한 이병호 국립미륵사지유물전시관장과, 윤선태 동국대 교수 등의 이야기를 종합해보자.

“새로운 목간 자료들의 사진을 화면 상으로 쭉 본 뒤에 발표자와 질의응답시간이 지났습니다. 제대로 한번 더 판독해보려고 발굴단이 찍은 목간 사진들을 면밀하게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四〃, 三四, 二四’ 같은 숫자가 나열되어 있지 않은가. 목간학자들의 탄성이 터졌다.

“아! 저건 구구단이야. 저거 구구단 목간이야.”

학자들은 본능적으로 일본이나 중국에서 이미 확인된 구구단 목간이 국내에서 처음 출토됐다는 것을 간파했다.

“학회가 끝난 다음 발굴자(정훈진 한국문화재보호재단 조사연구팀장)에게서 적외선 사진 자료를 받아 집으로 가져왔습니다. 일요일 오후 초등학생 아들하고 사진을 보면서 목간에 적힌 구구단의 패턴을 찾아보았습니다.”

이병호 관장의 후일담이다. 지금 알려진 구구단, 즉 2×1부터 시작해서 9×9까지 가는 패턴이 아니었다. 또 9×9, 9×8…로 시작되지도 않았다.

■초등학생과 함께 찾아낸 숫자의 패턴

이 구구단 목간은 한쪽 면에서만 묵서가 확인되었고, 판독할 수 있는 글자는 103자였다.

9단부터 2단 순으로 기록되었고, 각 단 사이에 가로줄을 한 줄 씩 그어 경계선을 만들었다. 각 단이 시작하는 첫 행에서 동일한 숫자의 중복을 피

구구단 목간의 글자배열을 다시 재정리한 것.|정훈진 한국문화재재단 조사연구팀장 제공

하려고 반복부호(〃)를 사용했다. 예를 들어 9×9는 9〃, 8×8은 8〃 등으로 축약했다. 또 20(입), 30, 40의 표기법도 흥미로웠다. 결과가 뻔한 1×2, 1×3, 1×4…는 생략했다.

패턴도 지금의 구구단 패턴이 아니었다. 맨 윗단을 보면 ‘9×9=81, 9×8=72, 9×7=63…’이 아니라 ‘9×9=81, 8×9=72, 7×9=63…’로 이어졌다. 두번째 단 역시 ‘8×8=64, 7×8=56, 6×8=48’로 써내려갔다. 9×9, 8×9로 시작되고, 중복된 계산은 생략함에 따라 밑으로 갈수록 구구단은 줄어든다.

예컨대 6단의 경우 6×6부터 시작해서 5×6, 4×6, 3×6, 2×6으로 이어진다. 6×7, 6×8, 6×9는 7단, 8단, 9단에서 이미 계산됐다. 6단에서는 필요없게 된다. 3단은 3×3, 2×3, 2단은 2×2만이 남는다. 그래서 밑으로 갈수록 좁아지는 직각삼각형의 구구단 목간이 된 것이다.

여기서 백제인들의 실용성을 알아차릴 수 있다. 구구단을 단순히 적거나 외우려고 기록한 게 아니라는 것이다.

“구구단의 각 단을 명확하게 구분하고 시각화해서 각 단의 공식을 쉽게 볼 수 있도록 배열한 목적으로 고안한 ‘구구단 공식표’이 가능성이 큽니다.”(윤선태 교수·이병호 관장)

■중국·일본에는 없는 ‘칼’ 같은 구구단

무슨 말인가. 구구단 목간은 앞서도 밝혔듯이 중국과 일본에서도 발견된 사례가 많다.

예컨대 2002년 중국 후난성(湖南省) 룽산(龍山) 리예(里耶)에서 출토된 구구단 목간은 진나라 때인 기원전 3세기의 유물이다. 일본에서 출토된 구구단 목간도 많다. 일본 오사와야치(大澤谷內) 유적에서 출토된 목간과 나나야시로(七社) 유적에서 나온 목간 등도 있다.

그러나 중국과 일본의 구구단 목간은 부여 쌍북리 목간과는 확연히 다르다. 물론 중국·일본의 구구단 목간도 위에서 아래로 단을 내려가며 기록한 사례는 있다.

그러나 쌍북리 목간처럼 9단-8단-7단-6단-5단-4단-3단-2단 등으로 ‘칼’ 같이 구분하고, 각 단을 하나의 단에 완결해서 쓴 경우는 없다.

일본의 오사와야치 유적의 구구단 목간은 특히 이상하다. 틀려서는 안될 구구단 목간인데 중간에 ‘6×9’의 정답이 54가 아니라 74로 표기돼 있다.

광개토대왕 비문에 등장하는 ‘이구등조’ 내용. 광개토대왕이 2×9 =18살에 등극했다는 내용이다.

또 3×9도 27이 아닌 24로 돼있다. 이것이 주술적인 의미에서 일부러 틀리게 한 것인지, 아니면 구구단 전체를 외우지 못한 사람이 만든 목간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 각 단별 구분선이 ‘칼’ 같고, 계산마저 정확한 부여 쌍북리 구구단 목간과는 다르다.

■구구단의 용도는 검산용?

또하나 중국과 일본의 구구단 목간에는 ‘二三而六’이나 ‘一九又九’ 같은 표기법이 보이는 경우가 있다.

어떤 경우엔 이(而)나 우(又) 대신 여(如)자가 사이에 끼어있기도 한다. 이것은 손환일 박사의 견해처럼 단지 글자수를 맞추기 위한 허사일 수도 있다.

예컨대 답이 한자리수로 나오는 二三而六(2×3=6)과 두자리수로 계산되는 二六十二(2×6=12)와 글자수를 맞추기 위한…. 아니면 등호(=)일 수도 있다. ‘2×3=6’ ‘1×9=9’를 표시하는….

그렇지만 쌍북리 출토 구구단 목간에는 이런 글자(而, 又, 如)가 보이지 않는다. 그냥 ‘二〃四’(2×2=4)이고, ‘二四八’(2×4=8)이다. 중국와 일본에 비하면 아주 깔끔하다. 모든 면을 종합하면 쌍북리 목간은 그야말로 백제인들이 실제 계산을 하면서 썼던 실용적인 구구단 목간일 가능성이 크다.

부여 쌍북리 일대는 사비기 백제 시대의 관청과 관영 창고 및 공방, 그리고 관리시설들이 집중된 곳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백제 말단 관리들은 예산을 정확하게 계산해서 신청하고 결산해야 했다. 계산하면서 외운 구구단대로 정확하게 했더라도 재차 검산하는 과정이 필요했을 지 모른다. 이병호 관장은 “구구단 목간이 백제인들이 손에 쉽게 쥐고 활용할 수 있는 직사각형임을 유의하자”고 한다. 언제 어느 때라도 손쉽게 들고 사용하는 검산용 구구단표일 가능성이 짙다는 것이다.

■하필 구구단인 이유

일본 오사와야치에서 확인된 구구단 목간. 69=74, 39=24등 틀린 계산이 보인다.|손환일 박사 제공

그런데 궁금증이 생긴다. 왜 하필 구구단이라 했을까. 지금의 구구단은 2×1부터 시작해서 9×9로 끝난다. 그렇다면 ‘이이단’이라 할 수도 있지 않은가.

이유가 있다. 동양에서 9(九)는 숫자는 매우 경외로운 숫자다. 단수 가운데 가장 큰 수여서 무한의 의미가 있다.

앞길이 구만리라든지, 구중궁궐이라든지 하는 말이 여기서 나왔다. 게다가 九의 중국어 발음이 오랠 구(久)와 같아 ‘영원하다’는 의미로도 읽혔다.

또 하늘이 9층으로 되어 있다 해서 구중천(九重天), 혹은 구천(九天)이라 했다. 혼백이 구천을 헤맨다는 따위의 옛말이 그래서 나왔다. 그 9번째 층에 천제가 살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중국에서는 황제를 지칭하는 숫자가 九였다. <회남자> <여씨춘추> 등은 “하늘의 9방위는 아홉인데 가운데가 균천, 동은 창천, 동북은 변천, 서북은 유천, 서는 호천, 남은 염천, 서남은 주천, 북은 현천, 동남은 양천”이라 했다.

그랬으니 이이단이 아니라 구구단이라 했을 것이다. 유교 경전인 <역경>은 “이로써 구구로 시작하여 구구가(구구법에 따라 말을 잇는 동요), 구구표로 칭한다”고 했다. 구구단은 처음부터 9×9=81부터 시작됐던 것이다.

■‘구구단 외우기’도 재주다

중국인들이 구구단을 사용했다는 옛 기록은 자못 극적이다. 춘추시대 제나라 환공 때(재위 기원전 685~643)이니 2700년이나 된 이야기다.

즉 관중과 포숙 등 명재상을 등용한 빼어난 군주였던 환공은 뛰어난 인물을 뽑으려 ‘초현관(招賢館·현신을 초청하는 관청)’을 만들었다. 그런 뒤 관청 앞에 화톳불을 밤낮으로 밝혀두도록 했다. 유능한 선비라면 언제라도 찾아오라는 상징적인 의미였다. 그러나 1년이 지나도록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다. 마침내 한 사람이 나타나 “내가 놀라운 지식을 갖고 있다”고 소리치며 구구단을 외웠다. 기대를 가졌다가 실망한 환공이 “구구법이 재주냐”고 코웃음 쳤다. 그러자 그 사람이 조용히 말했다.

“물론 구구법이 능력이나 학식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주군께서 단지 구구법만 아는 저를 등용하시면 틀림없이 유능하고 재주 많은 사람들이 나설 겁니다.”

듣고보니 그럴듯 했다. 환공이 그 사람을 등용하고 환대하자 한달도 못돼 유능한 인재들이 몰려들었다.(<설원> ‘존현’)

이 고사는 2600년 전에도 구구단은 글좀 읽는다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외울줄 아는 기초적인 산수였음을 알 수 있다.

■광개토대왕은 2×9=18살에 등극했다

사실 한반도에서 구구단이 실생활에 사용되었음을 알려주는 문헌 및 고고학 자료들은 제법 있다.

우선 <삼국유사> ‘고조선조’에 등장하는 ‘삼칠일(三七日)’ 기록이 주목거리다. 즉 환웅이 괌과 호랑이에게 쑥과 마늘을 주면서 “너희는 100일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사람으로 변할 것”이라 했다. 그런데 “곰은 ‘삼칠일’ 동안 잘 버텨 사람(웅녀)이 되었다”는 것이다.

상당부 전문가들은 이 ‘삼칠일’을 3×7=21로 파악하고 있지만, 앞서의 기록(100일)과 상충되는 부분이 있어 확실치는 않다. 어쨌든 구구단은 일찍부터 배웠으리라 짐작된다. <삼국사기> ‘신문왕조’는 “682년(신문왕 2년) 국학을 설치하고 산학(算學)을 가르쳤다”고 기록했다.

그 유명한 광개토대왕능비(414년)에도 ‘이구등조(二九登祚)’라는 대목이 있다. 이는 광개토대왕이 2×9=18, 즉 18세에 왕이 되었음을 알려준다. 또 백제 <나주 복암리 출토 목간(610년)을 보면 ‘마중연육사근(麻中練六四斤)’이라는 부분이 있다. 또 대전 월평동산성에서 등산객이 수습한 ‘구구단 기와’도 주목거리다. 기와를 보면 ‘…오십사오구사십오사구삽십육’이라는 숫자가 한자로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이 기와는 등산객이 수습했다는 점에서 어느 시대의 것인지는 약간 미심쩍다.

어쨌거나 그저 숫자가 나열된 물표 정도로 치부되어 묻힐 뻔했던 쌍북리 백제 구구단 목간은 극적으로 되살아났다.

전문가들의 안목이 아니었다면 가장 오래된 구구단 목간은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일본학자들은 한반도에서 구구단목간이 발견되지 않자 “구구단은 한반도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중국에서 일본으로 직수입된 것”이라고 주장했다지 않은가. 극적으로 되살아난 백제 목간은 또 한 번 역사의 공백을 메워주었다.

이 순간 구팔칠십이(9×8=72), 칠육사십이(7×6=42) 등등을 외우고, 다시 한번 그 계산이 맞는지 직각삼각형 구구단 표를 들고 검산하는 백제인들을 떠올려 본다.

그 중 2000년 4월 부여 능산리 절터 주변 웅덩이에서 출토된 295번 목간처럼 호사가의 주목을 끈 목간은 없다. 이름하여 ‘남근형’ 목간이다.

이 목간의 크기는 길이가 22.6㎝(두께 2.5㎝)나 됐다. 목간의 밑부분은 약간 뾰족하게 다듬었고, 그것도 모자라 구멍까지 뚫었다.

한쪽 면에는 ‘천(天)’자와 ‘무봉(无奉)’자가 서로 방향을 거꾸로 해서 새겨져 있었다. 다른 한면에는 ‘道■立立立’이라는 글자가 확연했다.

땅을 향해 새겨진 ‘天’은 무엇인가. 또 남근 목간에 ‘설 립(立)’을 세 번이나 반복한 뜻은 무엇인가. 이것은 ‘서라(立)! 서라(立·)! 서라(立·서라)!’라는 뜻이 아닌가.

이 무슨 망측한 소리인가. 목간이 발견된 곳은 백제 각 지방에서 사비성으로 들어오는 나성의 대문 및 중심도로와 아주 가까웠다. 그야말로 백주대로에서 이상야릇한 목간이 발견된 것이다.

윤선태(동국대 교수)는 ‘道■立立立’의 도■에 주목했다. 적외선 사진으로 볼 때 ■을 제사를 나타내는 ‘示+陽의 오른쪽 자’로 해독했다.

<설문해자(說文解字)>을 보면 ‘양’은 ‘도로의 제사’, 즉 도상제(道上祭)로 정의됐다. 또 북송시대의 발음자전인 <광운> ‘양운(陽韻)’을 보면 도신, 즉 길의 신이라 했다. <예기> ‘교특생’은 “나쁜 귀신을 몰아내는 나례의식”이라 했다. 따라서 윤선태 교수는 “1면의 묵서인 ‘도양립립립’은 ’도로의 신인 양이 일어섰다는 의미로 해석된다”고 풀었다. ‘서라!(立)’을 세번 강조한 것은 감탄을 위한 강조법이라는 것이다.

또하나 남근형 목간을 보면 묵으로 쓴 글씨 말고, 음각으로 새겨넣은 ‘봉(奉) 의(義) 무(无) 천(天)자를 확인할 수 있다.

국어학자인 이승재 서울대 교수는 “이것이 부자연스럽다”고 한다. 같은 목간인데, 어느 부분은 묵서로 글씨를 쓰고, 또 어떤 부분은 칼로 글씨를 새겨넣었다는 게 이상하다는 것이다. 이교수는 이를 재활용의 뜻으로 풀었다. 먼저 칼로 글씨를 새겼던 나무를 다시 활용하면서 붓으로 글씨를 썼다는 것이다.

백제시대 최고의 가요가 기록된 것으로 보이는 목간. 김영욱 교수는 이 목간을 ‘숙세가’ 목간이라 칭한다.

■세종로에 남근을 세운 까닭

전문가들의 추정은 갈수록 흥미롭다. 백제는 지금의 서울 세종로 격인 중심도로에서 ‘길의 신’에게 제사를 드렸다는 것이다.

남근은 나라의 안녕, 그리고 악신·질병의 추·예방 등을 위해 숭배되고 신성시됐다.

<삼국유사>는 “지증왕의 생식기가 1척5촌(약 45㎝)이나 됐다”고 기록했다. 또 가락국 김수로왕은 “거대한 남근을 낙동강 양쪽에 턱 걸쳐놓을 정도”였단다. 그걸 모르던 길손이 앉아 곰방대를 탁탁 터는 바람에 왕의 ‘그곳’에 커다란 흑점이 생겼단다.

여하간 ‘길 제사’ 때 ‘세워~세워~세웠던’ 이 남근목간은 조선의 ‘장승’ ‘남근석’과도 맥이 닿아 있다.

이 전통은 도래인의 발자취가 닿은 일본까지 연결된다. 백제가 뿌린 ‘남근 신앙’이 일본열도까지 영향을 끼친 것이다.

일본의 헤이안시대 9세기대 율령 해설서인 <영의해>를 보면 “도향제(道饗祭)는 수도인 경성(京城) 사우(四隅)의 도로에서 제사지낸다”고 했다. 이것은 바깥으로부터 들어오는 鬼魅(도깨비)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노신에게 폐백을 들여 이들을 퇴치해주기를 바라는 제사의례였다. 여기서 ‘경성 사우’란 도읍지 사방의 외각을 의미한다.

남근형 목간이 출토된 능산리 절터가 바로 ‘경성 사우의 도로’라 할 수 있다. 각 지방에서 도성으로 사람과 물자가 드나드는 사비나성의 대문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크다. 더욱이 사비나성 자체가 도성의 수호를 목적으로 쌓은 것이 아닌가. 도성 출입을 통제하는 곳이기에 역병이나 온갖 사악한 기운을 차단하려고 제사를 지냈을 것이다.

따라서 남근 목간을 제사에 사용한 뒤에 나쁜 기운을 흘려보낸다는 의미에서 물웅덩이에 던져버렸을 것이다. 남근형 목간에 길의 신인 양(남근)을 세웠다(立) 세웠다(立) 세웠다(立)도 세번이나 강조한 이유는 뭘까. 이 말일게다.

“이제 남근이 섰다! 섰다! 섰다! 그랬으니 사악한 귀신과 도깨비들은 썩 물렀거라.”

즉 남근이 일어섰으니 귀신과 도깨비는 두려워 근접할 수 없을 것임을 선포한 의미한 것이다. 가만히 남근 목간을 보면 하단을 다듬어 쐐기 형태로 만들고, 가운데 3㎜의 구멍을 뚫었다. 받침대나 어딘가에 꽂아두고 일어섰다는 표현했음이 분명하다.

■가장 오래된 백제의 민요

능산리에서는 또하나 흥미로운 목간이 발견됐다.

길이 12.7㎝에 붓으로 쓴 소박한 글씨가 선명하게 남아있는 목간이다.

“숙세결업(宿世結業) 동생일처(同生一處) 시비상문(是非相問) 상배백래(上拜白來).”

국립부여박물관이 2008년 펴낸 소장품 조사자료집인 <백제목간>에 나온 해석문은 이렇다.

“숙세(전세)에 업을 맺었기에 (현세에) 함께 같은 곳에 태어났습니다. 잘잘못을 서로 물어(논하여) 우러러 절 올리며 사뢰옵니다.”

박물관측은 ‘숙세’ ‘결업’ ‘동생일처’ 등 불경의 요소가 보인다고 분석했다. 또 문장은 모두 4-4구인데 천자문이나 유교 경전인 <시경>, <서경> 등에 자주 보이는 문체라고도 했다. 그런데 국어학자인 김영욱 교수는 이 목간의 해석문을 단순하게 보지 않았다.

김교수는 일단 이렇게 해석했다. “전생의 인연으로/ 현세에 함께 하니/ 시비를 서로 물어/ 상배하고 사뢰져.”

이렇게 배열하니 백제인의 마음을 담은 소박한 가요로 읽혔다는 것이다.

■짙게 배어난 충청도풍 말투

“노랫말의 내용은 물론이려니와 목간의 외양이 서민적인 냄새를 물씬 풍기면서 그것도 찌그러지고 울퉁불퉁한 판목 위에 새겨진 정겨운 글씨라는 점에서 필자의 마음을 더욱 사로잡았다.”

김교수에 따르면 ‘숙세’는 과거사. ‘동’은 현세를 뜻한다. ‘동생(同生)’은 도반이나 부부, 형제, 이웃을 일컬으며 ‘시비’는 ‘시비지심’으로 진리 혹은 사실을 밝힌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상배(上拜)의 상(上)은 불타나 상제 혹은 존경의 대상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백래(白來)’는 ‘사뢰러 오다’는 뜻도 되지만 ‘내세를 사뢴다’는 식의 불교적 해석도 가능하다.

김교수는 이 목간의 내용이 불교의 윤회사상이 짙게 베어있고 사언사구의 일정한 형식으로 구성된 것을 주목했다.

또 한국어 어순과 한문이 혼재한 백제 고유의 문체가 확인되고 백제인의 정서가 그대로 묻어내기까지 했다. 여기에 불교적 내세관까지…. 김교수는 이 목간의 내용을 ‘숙세가’라 이름붙이고 가장 오래된 ‘백제시가’로 판정했다. 백제인의 민요라는 것이다. 김교수는 논문의 각주에서 ‘텍스트가 지닌 언술을 더듬어보면 이런 뉘앙스로 읽을 수 있다’고 해놓고 다음과 같이 풀었다.

‘부처님이 맺어준 인연으로 우리 함께 한평생 살아가는데 세속의 시비 쯤이야 가려서 무엇하겠소.’

이렇게 해석하니 백제인의 화해정신과 깊은 신앙심을 읽을 수 있다. 무엇보다 지금까지 면면히 이어진 백제인 특유의 여유까지 느낄 수 있다. 영락없는 충청도 사람의 가요가 아닌가. 김영욱 교수의 해석대로라면 ‘숙세가’는 당대 백제인이 창작한 백제 시가이다. 현재까지 발견된 백제 시가 중 가장 오래된 작품이기도 하다.

“정읍사가 전해지지만 그것은 구비전승된 후대의 문헌에 정착된 것이다. 숙세가는 공무도하가에서 느낄 수 있는 세속적인 인연의 애절함과 달리 세속에서 벗어난 듯한 초탈함을 느낄 수 있다. 넉넉함과 여유도 느낄 수 있지 않은가.”

<참고자료>

윤선태, <목간이 들려주는 백제 이야기>, 주류성,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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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환 논설위원 http://leekihwan.khan.kr/

<이기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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