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로 본 세상]<슬램덩크>-그 한마디를 하기 위해 먼 길을 돌아오다

2017. 6. 21.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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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좋다, 하고 싶다라는 말은 사실 쉽게 나오지 않는다. 우리는 10대나 20대, 가슴 벅차게 꿈꾸던 그 무엇을 어느 깊숙한 곳에 간직한 채 묻어두기도 한다. 정대만은 용기를 냈고 그 진심은 그 자리에 선 모두에게 그대로 가서 닿았다.

대학원 석사과정생 시절,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었던 어느 날이 있었다. 당장 해야 할 발제도, 읽어야 할 자료도 많았다. 그에 더해 ‘선배들과 어떻게 하면 잘 지낼 수 있을까’, ‘내일 오전 8시30분까지 출근해 학과사무실 문을 열어야 하는데 참 싫다’, ‘카드값이 10일째 밀렸는데 신용도가 얼마나 떨어졌을까’, 하는 쓸데없는 걱정도 그날따라 크게 다가왔다. 발제문을 쓰다가 싸이월드 다이어리에 “공부가 재미있을 줄 알았는데 재미가 없다. 그런데 지금 그만둘 수도 없잖아” 하는 내용을 쓰고는 노트북을 덮었다.

사실 ‘그만둘까’ 하는 생각을 석사과정과 박사과정 8학기 동안 적어도 열 번 넘게 했던 것 같다. 어쩌면 하나의 발제문을 쓸 때마다 열 번씩의 후회를 했는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부족함으로 인해 발제문에 제대로 한 줄 보태지도 못한 채 새벽을 하얗게 지새워 본 대학원생이라면 이해할 것이다. 그렇게 꾸역꾸역 쓴 발제문을 가지고 수업에 들어갈 때의 민망함, 발제 후 질의 시간에서 받는 비판과 격려들, 그래서 후줄근한 마음, 좋아서든 부끄러워서든 마시게 되는 술 한 잔, 그때의 감정들이 1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종종 떠오른다.

이노우에 타케히코 작가의 만화 「슬램덩크」에서 정대만이 안 선생님에게 다시 농구를 하고 싶다고 말하는 장면. / 대원씨아이

인생의 힘든 순간마다 찾던 만화책

노트북을 덮었던 그날은 특별히 더 힘들었던 것 같다. 연구실에서 주섬주섬 자료 몇 권을 챙겨서는 집으로 갔다. 침대에 누워서 우울한 마음으로 내가 집어든 것은 <슬램덩크>였다. 인생의 힘든 순간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 만화책을 찾았다. 현실을 잊고 싶다기보다는 용기와 위로를 받고 싶어서였다. 그리고 그날은 결국 울음이 쏟아지고 말았다. 정대만이 안 감독 앞에서 무너지며 “안 선생님…, 농구가 하고 싶어요” 하는 모습을 보면서, “교수님…, 논문이 쓰고 싶어요” 하고 말하는 나를 동시에 떠올린 것이다. 방황을 겪고 돌아온 정대만과 자료를 독해하지 못해 논문에 진척이 없는 나를 동일시하기는 민망하지만, 그때는 괜히 농구와 논문을 대입시켜 읽고는 울었다. 그러다가 곧 북산고등학교의 전국대회 진출기로 넘어가서 “그래, 나는 할 수 있을 거야. (천재니까)” 하는 강백호의 근거 없는 자신감에 위로를 얻고는 잠들어 버렸다. 다음 날 잠에서 깬 나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출근해서 학과사무실의 문을 열고, 조교 근무를 서고, 수업에 들어가고 하는 일상을 계속했다.

<슬램덩크>는 나에게 그만큼 특별한 만화책이다. “무인도에 간다면 어느 책을 가져가겠습니까?” 하는 질문을 받고 “<슬램덩크>요, 혹시 3권을 가져가야 한다면 22권부터 24권까지를 가져갈게요” 하고 답한 일도 있다. 그 어느 훌륭한 고전보다도 북산고와 산왕고의 전국대회 승부를 다룬 그 3권이라면 무인도에서도 살아갈 위로를 늘 받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1983년생인 나는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슬램덩크>를 보면서 자랐다. 어머니 손에 이끌려 간 피아노 학원에 그 만화책이 몇 권 있었다. 음표 그리는 것을 잊고 매일 그것을 보다가 선생님에게 자주 손바닥을 맞았다. 그래도 몰래 보면서 키득거렸다. 나중에는 <소년 챔프>에 연재되는 것을 기다려 매주 조금씩 읽다가 단행본이 나오면 다시 한 번 대여소에서 빌려보곤 했다. 고등학교 때는 친구들과 농구를 하다가 중요한 순간에 슛을 성공시키고 나면, 종종 주인공 강백호의 명대사를 인용하며 거만한 표정을 짓고는 “왼손은 거들 뿐이지” 하고 말했다. 나뿐 아니라 많은 친구들이 그랬다. 강백호, 정대만, 서태웅, 송태섭, 채치수, 권준호, 윤대협, 황태산, 박경태, 이정환, 신준섭, 홍익현, 김수겸, 정우성, 이명헌, 신현준, 김낙수 등등, 슬램덩크에 등장하는 모두에게는 저마다의 매력적인 스토리가 있었고 우리는 그 중 어느 누구에게 자신의 삶을 대입하며 빠져들었다.

얼마 전 <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의 백영옥 작가를 만났다. 그가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하면서였다. 그런데 내가 <빨강머리 앤>을 제대로 읽은 적이 없는 것처럼, 그는 <슬램덩크>를 잘 알지 못했다. 그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하다가 “아, 슬램덩크는 30대 남자들의 빨강머리 앤이에요!” 하고 말했다. 그렇게 말한 나는 만족스러웠다. 정말이지 충분한 설명이 된 것 같아서였다. ‘슬램덩크 키즈’는 이제 거의 30대 중반을 넘어섰고 40대에 접어들었다. 점점 식어가는 그들의 가슴을 뛰게 할 만한 공통의 분모 중 하나는, 그 세대의 감성을 대변할 수 있는 유력한 무엇은 아마도 슬램덩크일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사회라는 코트에 선 슬램덩크 키즈들

실제로 30대 웹툰 작가들이 가장 많이 패러디하는 작품 중 하나는 <슬램덩크>다. 특히 조석은 <마음의 소리> 900화 특집에서 <슬램덩크>를 보며 만화가의 꿈을 키웠다고 밝히기도 했다.

나를 비롯한 ‘슬램덩크 키즈’들은 이제 어느덧 자신의 의지와는 별로 상관없이 사회라는 코트에 섰다. 강백호처럼 좋아하는 여학생을 따라온 것도 아닌데, 채치수처럼 전국 제패의 꿈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아니면 서태웅처럼 화려한 플레이어도 아닌데 손에는 이미 농구공이 들려 있고 버저비터는 몇 초 남지 않았다. 패스할 곳도 보이지 않고 슛을 쏴야 한다. 나는 그때 잠시 ‘타임’을 부르고, <슬램덩크>를 다시 펴는 것이다. 논문 심사를 앞두고 위로 받고 싶을 때, 사랑하는 이에게 고백을 하고 가슴이 진정되지 않을 때, 괜히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싶을 때, 그런 인생의 어느 순간마다 <슬램덩크>를 곁에 두고 읽었다. 결혼식 전날 밤에도 나는 강백호와 정대만의 서사를 다시 한 번 쭉 따라갔다. 위로, 진정, 망각, 어떤 감정 때문이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지금도 정대만을 보며 울었던 ‘그날’이 종종 떠오른다. 정대만은 주인공인 강백호보다도 오히려 더욱 많은 팬덤을 보유한 매력적인 캐릭터다. 시합의 주요 고비마다 3점슛을 터뜨리며 ‘불꽃남자’로서의 존재감을 보이는 그는 보는 이의 가슴을 뛰게 만든다. 그러나 “농구가 하고 싶어요” 하는 말과 함께 안 선생님 앞에서 무릎 꿇은 그의 모습이 역시 <슬램덩크>의 가장 명장면 중 하나다. 그 한마디를 하기 위해 그는 많은 길을 돌아와야 했다. 무엇이 좋다, 하고 싶다라는 말은 사실 쉽게 나오지 않는다. 우리는 10대나 20대, 가슴 벅차게 꿈꾸던 그 무엇을 어느 깊숙한 곳에 간직한 채 묻어두기도 한다. 정대만은 용기를 냈고 그 진심은 그 자리에 선 모두에게 그대로 가서 닿았다.

그 장면이 더욱 가슴에 남는 것은 정대만의 고백을 그저 지긋이 바라보는 것만으로 아무런 질책 없이 받아들여주는 ‘안 선생님’과 같은 어른이 있었기 때문이다. 용기 내어 무엇이 좋다고 고백하더라도, 그것을 좋아하면 안 되는 이유를 설명하거나 그 말을 꺼내기까지의 과정을 문제 삼는 이들을 우리는 주변에서 아주 많이 보아왔다. 그래서 정대만과 안 선생님의 모습은 무언가를 포기해야 했던 평범한 우리들에게 하나의 감동으로 다가온다.

나는 계속 <슬램덩크>를 읽는다. 앞으로는 읽어야 할 ‘그날’들이 더욱 많아질 것만 같다. 그러나 그때마다 <슬램덩크>의 무수한 캐릭터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나를 위로하고 응원해줄 것으로 믿는다.

<김민섭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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