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은영의 화해] 다섯 살 딸에게 욕하는 아내.."결혼생활보다 아이 미래가 먼저"
아이 엄마가 다섯 살 된 딸에게 폭언을 합니다. 밤에 한 번 잠들면 다시 일어나선 안 된다, 정해진 시간에 밥을 먹어야 한다 같은 규칙을 정해 놓고 이걸 어기면 소리를 지르고 ‘미친X, 개X, 지랄하네, 너 같은 딸을 낳은 내가 죄인이다’ 같은 말을 해요. 그러지 말라고 차분히 얘기하면 훈육하는 데 끼어든다고 더 크게 소리를 지르고 온갖 욕을 다 합니다. 아이는 울다가 잠들고… 이게 거의 매일 반복됩니다.
직장 때문에 주말 외에는 아이를 잘 보지 못하는데 이런 엄마와 함께 있을 딸을 생각하니 불안해 견딜 수 없습니다. 아이도 점점 폭력적으로 변하는 것 같습니다. 예전엔 놀아주다가 제 뜻대로 안 되면 그저 토라지던 아이가 지금은 제 화를 못 이겨 저를 때리고 ‘미친놈, 지랄하네’ 같은 엄마가 하는 욕을 그대로 합니다. 엄마가 아이에게 명령한 뒤 항상 열까지 카운트를 세는데 그 행동을 저에게 똑같이 합니다.
결혼 전에도 아내에겐 일방적인 면이 있었습니다. 회사에 다닐 땐 출근했다가 쉬는 시간에 도망쳐서 집에 오기도 했고 제 친구들이 마음에 안 든다고 연락을 끊으라고 강요했습니다. 그것 때문에 청첩장까지 나온 상황에서 결혼을 무르고 싶다고 부모님께 말씀 드렸는데, 살면서 좋아지지 않겠냐고 달래셔서 결국 결혼을 하게 됐습니다.
그러나 결혼 생활은 원만하지 않았고 저는 정신과 상담을 받았습니다. 아내는 병원에 가지 못하게 했지만 이혼할 각오까지 하고 병원에 갔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그 병원을 알아내 찾아간 모양입니다. 의사 말로는 혼내서 돌려보냈다고 합니다. 얼마 후 관계가 또 악화돼 자살을 결심하고 병원에서 준 약을 술과 함께 한꺼번에 먹은 적이 있습니다. 그 뒤로 기억이 끊겼는데 제가 의식이 없는 와중에 아내를 때렸고 경찰이 출동해 파출소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아내는 병원에 실려 갔고요. 양가에선 이혼하는 걸로 생각했고 저는 지방에 내려갔습니다. 아내는 당시 임신 중이었는데 제가 있는 곳으로 찾아와 무조건 잘못했다고 빌었습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아이를 낳았고 결국 다시 살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도 두 차례 더 자살 시도를 했습니다)
아내에게 욕설에 대해 얘기한 적도 있습니다. “애가 크면 당신한테도 이년 저년 할 텐 데 어떻게 하려고 그러냐”고 했더니 아내는 “나는 그렇게 컸기 때문에 이렇게 밖에 못한다. 당신이 대신 많이 사랑해줘라”고 하더군요. 아내는 자기 가족 특히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습니다. 양육 방식이 강압적이었던 모양인데 자세히 묻지는 않았습니다. 기분 좋을 땐 얘기를 잘 하다가도 한 번 화가 나면 걷잡을 수 없어져서 대화가 힘듭니다. 평소 아이 얘기 빼곤 거의 부부 간 대화가 없습니다. 그것도 아이를 위한 게 아니라, 애가 자꾸 깨서 짜증이 난다는 식입니다. 제 대답도 정해 놓았습니다. “알았다”는 말 외에는 하지 말라고 합니다. 책에서 무슨 방법을 봤다고 하면 자기를 가르치려 한다며 화를 냅니다.
지금 제 유일한 희망은 딸이 빨리 중학생이 돼서 기숙학교로 보내는 것뿐입니다. 엄마로부터 탈출시키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 전까지 제가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알고 싶습니다. 방관하는 제 자신이 너무 싫고 죄스럽습니다. 아이가 불쌍해 아동학대로 경찰에 신고도 두 차례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애를 구해야겠다는 생각에 아내를 밀치고 같이 욕하면서 아이를 뺏으려고 했습니다.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출동한 경찰은 “애 키우다 보면 훈계할 수 있는 거 아니냐”고 하더군요. 할 말이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경찰의 눈에 죄인은 저였을 겁니다. 어질러진 집 안, 우는 아이, 화난 남자.
제가 남자로서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한 것을 압니다. 미안해하고 후회하고 있습니다. 아내가 저렇게 행동하는 원인 중에 제 잘못이 있다는 생각도 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내가 왜 그러는지 알려는 마음도 거의 없습니다. 솔직히 포기 상태입니다. 저 자신에 대해서도요. 저는 이걸 아무한테도 말하지 못합니다. 저는 폭력을 휘두른 사람이니까요. 제 전화기엔 회사 사람 외엔 누구의 연락처도 없습니다. 아내가 이메일과 전화를 감시해 다 지웠습니다. 병원에도 가지 못하게 합니다. 이 상담이 저의 유일한 창구입니다. 제가 알고 싶은 건 하나입니다. 아내가 아이에게 소리 지르고 욕할 때 상관하는 게 맞을까요? 저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요?
(정지민씨, 가명ㆍ42세ㆍ연구원)
“지민씨는 당신의 아내가 어떤 사람인 것 같은 가요. 아내가 딸을 사랑한다고 생각하나요. 자신의 양육 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걸 알고 있을까요. 아내는 마음에 철창이 있는 사람입니다. 가장 사랑하는 딸, 삶을 같이 꾸려가는 남편, 자신에게 제일 중요한 사람들에게 넓은 초원과 푸른 하늘을 보여주는 대신 좁은 철창 안으로 밀어 넣는 사람이에요.
도대체 왜 그럴까요. 저는 지민씨의 아내가 자신의 문제를 모른다고 확신합니다. 안다고 피상적으로 착각할 뿐이에요. 우리가 자신의 문제를 정말로 자각한다면 삶에 작은 부스러기 같은 변화라도 생깁니다. 그게 모여 덩어리가 되고 가치관의 변화로 이어지죠. 아내는 자기 문제가 뭔지 몰라요.
아내도 가엾은 사람일 거란 생각이 듭니다. 친정 아버지의 강압적인 양육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는지는 몰라도, 현재 아내의 태도를 통해 얼마나 힘든 어린 시절을 보냈는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어요. 그러나 이해한다고 해서 그래도 된다는 건 아닙니다.
제가 보기에 아내의 모든 문제는 불안에서 출발합니다. 아내는 불안의 정도가 너무 높은 사람이에요. 보통은 불안을 호소하는 식으로 표출하지만 아내는 타인을 과도하게 통제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불안을 진정시키려고 합니다. 남편과 딸이 대표적인 희생양이죠. 이런 사람들에겐 자기 통제의 틀이 있어요. 그 틀 안으로 자신과 타인이 들어올 때 비로소 안전하다고 느낍니다. 안전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안심을 해요. 남이 아니라 자기 마음이 안정되는 거죠. 예를 들어 ‘외출했다 돌아오면 손을 세 번 씻어야 한다’가 자신이 만든 틀이라면 아이가 두 번만 씻었을 때 이 사람은 견디지 못해요. 겉으로는 아이가 병에 걸릴까 봐, 아이를 염려해서 그러는 거라고 포장하죠. 하지만 이 사람의 궁극적인 목적은 자기 마음이 편해지는 거예요.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해 남들을 자기 틀 안으로 꾸역꾸역 집어 넣고 괴롭힙니다. 사람을 철창에 가두고 ‘여기 있으면 좋아, 행복해, 안전해’라고 하는 거예요. 당하는 사람은 미칠 지경이죠. 지민씨의 아내에게 이야기해주고 싶어요, 당신은 아이가 아니라 당신 자신을 위해 그러는 거라고. 이걸 깨닫지 못하는 한, 당신이 하는 모든 행동은 일종의 학대라고요.
사실 그 불안의 원천은 본인이에요. 아이가 그걸 약간 건드릴 수는 있겠죠. 그래도 근본적으로 조절되지 않고 소화되지 않는 그 불안은 자기 거예요. 그런데 이런 사람들은 불안의 원인을 늘 남에게 돌려요. 네가 손을 제대로 씻었으면, 네가 제때 잠들었으면, 내가 이렇게 불안하지 않았을 거잖아. 그러니 그 순간엔 화를 내고 욕지거리를 해도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쉽게 말해 ‘맞을 짓을 했잖아, 맞을 짓을 안 하면 되잖아’라는 거예요.
무서운 건 이런 사람들이 가진 과도한 통제의 틀이 이론적으로는 정답에 가깝다는 겁니다. 손 잘 씻어서 나쁠 거 없잖아요? 누구도 반기를 들지 못하는 정답이죠. 그러니 자기가 만든 정답의 틀에서 벗어나면 이들은 못 견딜 뿐 아니라 일종의 사명감까지 느낍니다. 때려잡아서라도 애를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해요. 욕설을 하고 모욕하고 학대에 가까운 행동으로 아이를 대해요. 제가 말하고 싶은 건 당신이 아무리 엄마라고 해도 애한테 그럴 권리는 없다는 겁니다. 설령 부모라고 해도 다른 사람을 비하하고 모욕할 권리는, 이 세상 누구에게도 없어요.
그렇다면 지민씨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명심해야 할 것은 이 문제는 아내의 문제라는 거예요. 지민씨와의 관계에서 생겨난 문제가 아니에요. 즉 지민씨의 노력 여하에 따라 상황이 달라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아내가 소리 지르고 화를 낼 때 지민씨가 그걸 참고 하라는 대로 따른다고 해서 아내가 ‘아, 남편이 나를 배려해주는구나, 나도 적당히 해야지’라고 생각할까요? 그렇지 않아요.
학대를 방관하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아빠는 아빠로서 아이를 보호하는 데 모든 초점을 맞춰야 해요. 아이에게 욕을 하면 ‘하지마’라고 하고, 때리면 안고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그래야 아이도 엄마의 행동이 옳은 게 아니란 걸 인지할 수 있어요. 아빠가 가만히 보고만 있으면 아이가 옳고 그름에 대해 얼마나 혼란스럽겠어요. 그러나 거듭 얘기하지만 지민씨가 참고 애쓴다고 해서 아내가 바뀔 거란 생각은 하지 마세요. 지민씨는 그냥 할 일을 하면 됩니다, 아빠로서요.
아내의 행동이 계속 반복된다면, 그래서 아이를 보호할 필요성이 절실해지면 이혼도 고려해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단순히 엄마와 아이를 떨어뜨리라는 게 아니에요. 이혼했다고 해서 모녀 관계가 끊어지지 않습니다. 아내처럼 강박적인 사람에겐 주변의 모든 사람이 짐이에요. 그 짐으로부터 아내를 풀어주고, 딸을 엄마의 강박에서 해방시켜주라는 겁니다. 가끔씩만 만난다면 오히려 관계가 좋아질 수 있어요. 그러나 이대로 큰다면 딸이 엄마의 판박이가 될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겠죠. 아내가 자신의 아버지와 동일한 행동을 보이듯이 말입니다.”
정리=황수현 기자 sooh@hankookilbo.com
* 오은영의 ‘화해’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오은영 박사가 지면을 통해 진행하는 정신 상담 코너입니다. 해결되지 않는 고통 때문에 힘겨운 분이라면 누구든 신청해 보세요. 사연은 한국일보 사이트(http://interview.hankookilbo.com/store/advice.zip)에서 상담신청서를 내려 받아 작성하신 후 이메일(advice@hankookilbo.com)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선정되신 분의 사연과 오은영 박사의 상담 내용은 한국일보 지면에 소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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