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 나의 길] "사각 링엔 한방이 있지만 인생엔 한방이 없어요"

박병헌 2017. 2. 19. 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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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강사로 변신한 전 프로복싱 세계챔피언 박종팔씨/어머니 여의고 무작정 상경/중학교 입학했지만 방황의 나날/아버지 몰래 가출 서울행 기차에/배달원 등 밑바닥 생활에도/죽기 살기로 오직 복싱에 매달려
‘사각의 링에는 한방이 있지만 인생에는 한방이 없다’는 강연으로 유명강사가 된 전 프로복싱 세계챔피언 박종팔(59)씨는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몸이 선수시절만큼 여전하다. 체중은 선수시절 때와 비슷한 85㎏으로 군살이 거의 없다. 얼굴에는 건강미가 넘친다. 박씨가 여전히 몸을 잘 관리하고 있는 이유는 곧 촬영에 들어갈 ‘복서’라는 영화에 출연하고, 다음달에는 종편 MBN의 다큐 프로그램에 출연해 링에 올라야 하기 때문이다.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동 박씨의 자택을 찾은 기자는 은퇴한 지 30년이 다 된 그와 악수를 나눴을 때 주먹이 일반인에 비해 1.5배가량 크고 악력이 여전함을 느꼈다.
프로복싱 전 슈퍼미들급 세계챔피언 박종팔씨가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동 자신의 집 현관에 세워져 있는 대형 판넬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남양주=남제현 기자

링에서 포효하며 미들급 절대강자로 군림했던 ‘돌주먹’ 박씨는 ‘인생 3라운드’란 주제로 대학, 관공서, 기업체 등에서 강연하며 삶의 의미를 전파하는 인기 강사로 변신했다. 잘나가던 복싱선수가 1라운드였다면 사업가로 좌절했던 게 2라운드, 인생의 행복함을 느끼고 다시 시작하는 지금이 3라운드인 셈이다.

프로복싱 미들급(72.57㎏ 이하) 신인왕에 오르고 한 달 만인 1977년 11월 프로에 데뷔한 뒤 1989년 은퇴할 때까지 53전을 싸워 46승 가운데 39번은 KO승이었다. 5패를 당했는데 그중 4번은 KO패였으니 지든 이기든 KO로 승패가 결정되는 ‘모 아니면 도’여서 그의 이름 석자는 팬들 뇌리에 오래 남아 있는 것 같다. 한국이 낳은 세계챔피언 중에 그처럼 화끈한 복서는 없었다.


한국 미들급 챔피언, 동양 미들급 챔피언, 동양 라이트헤비급(79.3㎏ 이하) 챔피언, IBF(국제복싱연맹) 슈퍼미들급(76.2㎏ 이하) 챔피언, WBA(세계복싱협회) 슈퍼미들급 챔피언 등 링에선 해볼 건 다 해봤다. 전국에 땅과 집을 사는 재미로 링에 올랐다는 그는 거금을 벌어놓고 은퇴한 뒤 선후배들의 끝없는 배신과 사기에 나락으로 떨어졌고, 몇 차례 자살을 시도하다가 다시 일어섰다.

어려서부터 힘이 셌던 그가 권투 글러브를 끼게 된 것은 전남 무안에서 무작정 상경한 뒤 철물점을 운영하던 사촌형 일을 도와주다 인연을 맺게 됐다. 무안북초등학교 5학년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중학교에 진학하려 할 때 울화가 치밀어 마음을 잡을 수가 없었다. 무안북중에 입학했지만 학교는 다니는 둥 마는 둥 했고, 책이 눈에 들어올 리 만무했다. 학교를 한 달 정도 다니다가 아버지가 농사지은 유채씨 두가마를 시중의 절반값으로 몰래 팔아 1만4000원을 마련한 뒤 서울행 기차에 올랐다.

9시간 걸려 서울역에 도착해서 물방개 야바위를 발견했다. 대야 안쪽에 빙 돌아가며 칸막이를 만들어 놓고 물방개가 들어가는 칸에 돈을 건 사람이 이기는 도박이었다. 호기심 많은 소년은 물방개 야바위꾼에게 홀려 주머니를 다 털렸다. 사촌형이 사는 흑석동까지 물어물어 걸어가야만 했다. 흑석동 달동네를 헤맨 끝에 마침내 철물점을 찾아냈고, 그의 서울 생활은 그렇게 시작됐다. 나중에 셋째아들의 소재를 파악한 아버지는 사촌형에게 정기적으로 쌀을 보내주셨다.

“영등포역으로 쌀 찾으러 다니다가 노량진에서 동아체육관을 발견했어요. 당시 인기가 있던 레슬링을 배우려고 했는데 자꾸 그 복싱체육관이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무작정 관원으로 등록했지요.”

기약도 없이 사촌형에게 눌러붙을 수는 없었던 그는 운동할 수 있게 하루 2시간을 빼 달라는 조건으로 철물점 건너편의 중국집 배달원으로 취직했다. 대신 월급은 남들의 3분의 1만 받겠다고 했다. 손해 볼 게 없는 주인은 단박에 오케이했다. 특별한 기술 없어도 만만하게 할 수 있는 게 중국집 음식 배달이었다. 새벽 운동 나가면서 동료를 깨울까 봐 잠은 홀에서 의자를 붙여 놓고 잤다. 그는 월급 1만5000원 받고 배달일을 했고, 틈틈이 주방에 들어가면 면 뽑는 기술도 배웠다. 무거운 철가방을 갖고 달동네를 누볐으니 하체훈련으로는 최고였다. 권투장 관비가 5000원이었으니 돈은 남았다.
“당시 동아체육관에는 관원들이 500명이 넘었어요. 그래서 맘대로 주먹을 뻗을 수 없을 정도였어요. 그렇지만 죽기 아니면 살기로 열심히 운동에 매진한 결과 실력을 인정받아 샌드백도 쳤고 링에도 올랐지요.”

그가 복싱을 하는 것을 고향의 아버지가 알았던 것은 신인왕을 차지한 뒤였다. 당시 권투는 싸움꾼이나 하는 운동 정도로 여겨져 집안의 반대가 적지 않을 것으로 생각돼 일절 알리지 않았다. 신문을 보고서 아버지의 만류가 있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한국 챔피언이 되고 나니 김현치 관장이 흑석동 산동네에 부엌 딸린 방을 얻어 줬다. 주먹이 세지고 명성도 올라가니 형편도 나아졌다. 밤마다 옥상에 올라가 개인운동을 열심히 했다. 빨랫줄에 수건을 매달아 펀치볼 치듯이 펀치를 날렸고, 길을 걸을 때면 스텝을 좌우로 밟고 주먹을 뻗는 동작을 반복했다.

“오로지 주먹 하나로 세계를 제패하겠다는 생각에 완전히 미쳤죠. 똑같이 두 주먹을 갖고 싸우면서 더 때리고 덜 맞기 위해서는 그럴 수밖에 없지요.” 못 먹고 어려웠던 시절이었지만 세계챔피언이라는 확실한 목표가 있었기에 행복했다.

KO 퍼레이드를 펼치며 링에 자주 올라갈수록 파이터 머니는 커졌다. 이 돈으로 땅을 사고 집을 샀다. 부동산은 모두 아내 명의로 해뒀다. 같은 체육관에서 함께 운동하던 김득구가 1982년 11월 링에서 뭇매를 맞고 죽는 걸 봤기에 자신도 훗날 같은 꼴을 당할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1983년 5월 미들급 동양챔피언 박종팔은 3년 선배인 나경민과의 특급 라이벌전에선 3000만원을 받았다. 당시 프로야구에서 잘 나가던 김봉연 박철순 이만수 등이 연봉으로 2400만원을 받던 때였다.

1984년 7월 머레이 서덜랜드(영국)를 KO로 눕히며 IBF 슈퍼미들급 왕좌에 등극한 뒤 3년 동안 8차례 타이틀을 방어했지만 가슴 한구석은 늘 휑했다. 후발 단체 IBF 타이틀에 대한 경시 풍조 때문이었다. 그래서 WBA 슈퍼미들급 챔피언이 공석이 되자 미련없이 IBF 벨트를 반납했고, 1987년 12월 헤수스 가야도(멕시코)를 부산으로 불러들여 2회 27초 만에 KO로 눕히고 꿈에도 그리던 월드챔피언이 됐다. 그의 살인적인 왼손 몸통 공격과 오른손 스트레이트에 웬만한 선수들은 다 나가떨어졌다. 전성기를 구가하던 당시 그의 파이트머니는 서울 강남의 아파트 7채 값에 달하던 1억5000만원이었다.

“권투야말로 가장 원시적입니다. 한계 체중이라는 자신과의 싸움을 거친 뒤 주먹 하나로 상대를 눕히거나 또는 쓰러져야 하는 잔인한 운동입니다. 남이 도와줄 수 없지만 주먹하나로 부와 명예를 이룰 수 있는 매력도 있습니다.”

이듬해 3월 폴리 파시레론(인도네시아)을 눕혀 1차 방어전에 성공한 그의 2차 방어전 상대는 강타자 오벨메히아스(베네수엘라)였다. 6년 전 논타이틀전에서 KO의 치욕을 당한 박종팔은 오벨메히아스에게 또 무릎을 꿇었다. 당대 최고의 복서로 통하던 마빈 헤글러(미국)에게 도전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쳐 아쉬움은 컸다.


89년 겨울 후배 백인철에게 9회 KO패를 당한 뒤 그는 더는 일어서지 못했다. 모은 재산으로 먹고살기에 충분했기에 미련없이 링을 떠났다. “KO패를 당하는 것은 대부분 체중 실패에서 비롯됩니다. 돌도 씹어먹던 나이에 아무것도 먹지 않고 12∼13kg을 강제로 뺀다는 것은 반죽음이지요. 숱한 강펀치를 맞고 쓰러졌으면서도 후유증이 없어서 천만다행입니다.”

은퇴할 때 그의 재산은 90억원에 육박했다. 하지만 세상물정을 모르던 박씨는 인천 간석동에 차린 복싱체육관, 복싱 프로모션 사업과 단란주점 등 손을 대는 일마다 모두 실패하면서 나락으로 떨어졌다. 선후배, 지인들은 너나없이 달려들어 돈 뜯어내려고 하이에나처럼 덤볐다. 돈을 빌려 가면 안 갚고, 배신당하고,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당했다. 강남에서 단란주점을 할 때에는 건설 시행업자들이 1500만원치의 술을 먹은 뒤 5000만원짜리 어음을 내놓아 거꾸로 3500만원을 거슬러 준 뒤 어음이 부도가 나 돈을 못 받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사람을 잘 믿는 성품이라 차용증이나 공증 같은 것은 생각지도 않고 살았다. 그러는 사이 재산은 거덜났고, 그의 가슴속은 울화로 가득 찼다.


아내마저 폐암으로 세상을 뜨자 박씨도 살아갈 마음을 잃었다. 주먹 하나로 세계를 제패했던 박씨이지만 세상이 무서워졌다. 새벽마다 불암산에 올라가 투신할 자리를 찾았다. 다섯 군데를 봐 놨다. “너무나 멍청했고, 바보였죠. 그게 억울해서 죽으려 했던 겁니다.”

은둔과 방황에 마침표를 찍고 수면위로 올라온 것은 2010년 지금의 아내 이정희(61)씨와 재혼하면서부터다. “지인으로부터 아내를 소개를 받았어. 빈털터리였지만 돈이 많은 것처럼 뻥을 쳤어요. 엄마같은 포근함을 느껴 붙잡았지요”라고 껄껄 웃는다. 아내는 그에게 용기를 주고 격려했다. 아내는 박씨를 늘 ‘우리 챔프님’이라고 부르며 공경한다.

박씨는 요즘 예전과 완전히 다른 삶을 살고 있다. 아내 손에 이끌려 시장도 가고, 솥뚜껑만한 손으로 장바구니도 든다. 세상살이가 떳떳하기에 창피함은 없다. 2012년에 ‘IBF 30년을 빛낸 복서’에 선정된 것을 계기로 강연을 시작했다. 그는 “링에 오를 때는 팬츠만 입고 수천명 앞에 서는 데도 긴장하지 않았는데 강연 때는 100여명 앞에서도 떨리더라”고 말한다. 원고지 50장 분량의 강연 내용의 원고는 모두 아내가 작성해 준다.

2년 전 이사온 불암산 자락의 집터는 무려 1만평이나 된다. 산밑이라 공기도 아주 좋다. 세상과 하직하기 위해 무수히 올랐던 불암산 자락에다 도시생활에 지친 사람을 위한 힐링센터와 황토 찜질방을 짓는 게 박씨의 꿈이라고 했다. 집 앞 정원의 잔디밭과 텃밭은 아직도 힘이 뻗친다는 박씨가 모두 조성했다. 아침 7시에 아내와 집을 나서면 집 주변을 공사하느라 저녁 6시가 되어서야 집에 들어간다. 물론 점심도 집뜰에서 해결한다. 남들처럼 직장생활을 평생 못해 본 것에 대한 동경일 게다. “은퇴한 뒤 인생에도 한 방 있는 줄 알고 한 방을 노리다 KO 됐지만 이젠 더도 말고 판정승을 거두고 싶다”는 챔피언의 얼굴에는 평온한 미소가 가득했다.

남양주=박병헌 선임기자 bonanza7@segye.com

◆박종팔 프로필

△1958년 8월 11일 전남 무안 출생 △무안북중 중퇴 △1977년 프로복싱 미들급 신인왕 △1978년 11월 한국권투위원회(KBC) 미들급 챔피언 △1983년 동양태평양복싱연맹(OPBF) 미들급 챔피언 △1984년 7월 국제복싱연맹(IBF) 슈퍼미들급 챔피언 △1987년 12월 세계복싱협회(WBA) 슈퍼미들급 챔피언 △1989년 은퇴, 통산전적 46승(39KO) 5패 2무 △2016년 경남 고성 공룡세계엑스포 홍보대사 △현재 178㎝, 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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