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기판의 나뭇잎, 참 오랜만이다. 저 잎사귀를 마지막으로 본 혼다 차가 뭐였더라. 맞다, 2세대 인사이트였다. 1세대 인사이트는 1999년 혼다가 처음 양산한 하이브리드 자동차(HEV). 물고기처럼 날렵한 몸매의 2인승 쿠페로, 직렬 3기통 1.0L 엔진과 전기 모터를 짝 지었다. 데뷔는 프리우스보다 2년 늦었다. 하지만 미국 시장엔 보란 듯이 먼저 진출했다.

혼다의 포부는 컸다. 매달 6,500대씩 팔 계획이었다. 하지만 2006년까지 1만7,020대 파는 데 그쳤다. 2009년, 혼다는 야심차게 2세대 인사이트를 선보인다. 안팎 디자인을 확연히 바꿨다. 반면 전기 모터가 보조적 역할에 머무는 마일드 하이브리드에 대한 고집을 꿋꿋이 지켰다. 20세기 말, 하이브리드 자동차의 흐름은 토요타와 혼다가 주도했다.
HEV 도전 빨랐으나 시행착오 겪어

둘 다 엔진과 전기 모터, 배터리를 조합한다는 점에선 같다. 하지만 방향은 사뭇 달랐다. 토요타는 복잡하고 심오한 메커니즘을 추구했다. 관련 특허를 싹쓸이해 배타적인 하이브리드 왕국을 건설하고자 했다. 혼다는 한층 쿨했다. 보다 쉽고 합리적인 방식을 추구했다. 토요타가 완벽주의자였다면, 혼다는 현실주의자였다. 기업 문화의 차이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토요타의 하이브리드 카는 이른바 스트롱 하이브리드 방식. 저속이나 정속주행 등 특정한 상황에서, 엔진이 꺼진 채 전기 모터만으로도 달릴 수 있다. 반면 혼다는 마일드 하이브리드 방식. 전기 모터는 엔진을 보조하는 역할에 머문다. 그래서 혼다는 하이브리드 시스템을 ‘통합 모터 보조(Integrated Motor Assist)’라고 불렀다. 각각의 방식엔 장단점이 있다.

스트롱 방식엔 강력한 모터와 용량이 큰 배터리가 필요하다. 따라서 제조원가가 치솟고, 차체가 무거워진다. 나아가 기존 엔진을 그대로 쓰기 어렵다. 마일드 방식은 그 반대다. 모터의 개입이 제한적인 대신, 시스템 무게가 가볍고 원가가 낮다. 게다가 가변 밸브 장치 등 혼다의 장기인 엔진 기술을 십분 살릴 수 있다. 몸놀림도 자연스럽다.
하이브리드 구동계에 대한 혼다의 주장은 나름 명분이 있었다. 엔진과 전기 모터의 훈훈한 공생을 추구했다. 그러나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너무 컸다. 소비자는 혼다의 사려 깊은 철학보단 환상적인 연비를 기대했다. 평가자의 시선도 다르지 않았다. 당시 인사이트나 시빅 하이브리드를 몰아보고 크게 실망했다. 이후 혼다 하이브리드에 대한 관심이 식었다.

지난 1월 중순, 다시 호기심이 샘솟았다. 혼다 어코드 하이브리드 신차 발표회를 지켜보고 나서였다. 혼다코리아는 이 차를 선보이며 ‘하이브리드 전문가’란 슬로건을 앞세웠다. 국내 출시 2달여 만에 어코드 하이브리드를 다시 만났다. 어코드는 1976년 데뷔 이후 40년 동안 160개국에서 2,100만 대 이상 팔린 혼다의 베스트셀링 중형 세단이다.
보수적이되 세련된 ‘훈남’ 외모

지금 모델은 2012년 나온 9세대로, 2015년 부분변경(페이스리프트)을 통해 화장을 고쳤다. 금형을 다시 짜야 하는 몸매는 그대로 둔 채 앞모습을 집중적으로 바꿨다. 혼다의 프리미엄 브랜드 어큐라의 상징 ‘반짝이’ 크롬 장식을 그릴에 듬뿍 발랐다. 여기에 석청의 단면 연상시키는 모양의 LED를 좌우 각각 9개씩 심은 헤드램프를 어울려 젊고 미래적이다.
이번 어코드의 디자인에 대한 국내외 언론의 반응은 대체로 호의적이다. 특히 주력 시장인 미국에선 주요 매체 대부분이 ‘잘 생긴 외모’를 신형 어코드의 장점으로 꼽았다. 최근 신차 가운데 이 정도로 크롬을 부각시킨 브랜드는 혼다와 메르세데스-벤츠가 대표적이다. 서로 방향은 조금 다르지만, 둘 다 ‘떡칠’했다는 느낌보단 세련된 분위기로 잘 승화시켰다.

옆모습은 부분변경 전과 차이 없다. 2.4나 3.5와 달리 어코드 하이브리드는 사이드 스커트를 덧씌워 좀 더 날렵해 보인다. 데뷔 이후 6년 정도가 흐르다 보니 철판을 현란하게 다루는 기교까진 기대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 점은 나름대로 어코드의 정체성을 뚜렷이 드러내는 포인트가 되었다. 우직하고 간결한 모습이 선이 굵은 외모의 ‘훈남’을 연상시킨다.

실내도 부분변경 때 소재를 바꾸는 등 꼼꼼히 개선했다. 그러나 파격은 없다. 많이 파는 차답게 유행보다 정석에 충실한 교과서적 구성이다. 어코드 실내엔 혼다의 고집과 색깔이 진하게 묻어난다. 가령 속도계는 제도판 눈금자처럼 정교하게 새겼다. 특정 숫자를 키우거나 간격에 왜곡을 두지 않았다. 편의성이나 멋보다 기능에 ‘올인’한 정밀기계를 연상시킨다.



센터페시아엔 모니터를 두 개 심었다. 연비나 누적주행거리 정보는 위층 7.7인치 디스플레이, 멀티미디어 관련 기능은 아래층 7인치 터치스크린으로 모았다. 애플 카플레이를 지원하고, 아틀란 3D 네비게이션도 품었다. 한글화도 완벽하다. 실제 버튼은 공조장치 관련 기능 정도다. 자주 쓰는 오디오 볼륨 스위치마저 터치식인데, 감도가 기대만 못해 성가셨다.
엔진과 전기 모터 비중 뒤집은 파격
혼다 어코드 하이브리드의 엔진은 직렬 4기통 2.0L 가솔린 i-VTEC. 143마력, 17.8㎏·m를 낸다. 이 엔진은 압축비보다 팽창비가 높은 앳킨슨 사이클 방식이다. 밸브로 비슷한 효과를 내는 밀러 사이클이 아니다. 크랭크축에 별도의 장치를 더한 진짜 앳킨슨 사이클이다. 그 결과 엔진이 공기를 빨아들이거나 배기가스를 뿜는 데 드는 수고를 덜 수 있다.

그만큼 효율을 높일 수 있다. 대신 힘을 내는 회전수 범위가 좁다. 이 단점을 원반형 전기 모터 두 개로 지웠다. 하나는 발전용, 다른 하나는 구동용이다. 전기 모터의 최고출력은 184마력, 최대토크는 32.1㎏·m. 기존 혼다의 ‘통합 모터 보조’ 파워트레인에서 전기 모터는 엔진을 보조했다. 반면 이번 i-MMD(intelligent Multi Mode Drive)’는 정반대다.

중저속에선 전기 모터가 구동을 전담한다. 엔진은 전기를 발전해 모터로 직접 쏘거나 배터리를 채운다. 고속에선 엔진이 앞 차축 디퍼렌셜과 직결해 차를 끈다. 혼다 하이브리드 시스템은 토요타처럼 별도의 동력분할기구가 없다. 따라서 무단변속기로 힘을 뭉치고 희석시킨다. 엔진 직결 모드는 최고속 기어비만 쓴다. 그래서 시속 80㎞ 이상에서만 가능하다.

배터리는 고밀도 리튬이온 방식으로, 뒷좌석과 트렁크 사이에 은밀하게 숨겼다. 72개의 셀로 구성했고 용량은 13㎾h다. 주행거리와 상관없이 10년 동안 보증한다. 배터리 부피를 최소화해 널찍한 짐 공간을 챙겼다. 혼다코리아의 자료에 따르면, 어코드 하이브리드의 트렁크엔 골프백 4개 또는 19.5인치 크기의 자전거를 거뜬히 실을 수 있다.
하이브리드 자동차답게 시동 버튼은 전원 개념이다. 요즘처럼 따뜻한 날씨엔 누르면 소음과 진동 없이 계기판만 환히 밝힌다. 변속 레버는 전기차처럼 ‘B’ 모드까지 챙겼다. 제너레이터의 저항을 적극적으로 걸어 배터리 충전(회생제동)의 효과를 극대화한다. 시속 80㎞ 이상에선 큰 의미 없을 스포츠 드라이브, 시속 40㎞까지 소화할 EV 모드도 마련했다.
감성적 매력과 맞바꾼 환상적 연비

혼다는 엔지니어의 피가 흐르는 회사다. 그만큼 고집과 철학이 뚜렷하다. 창업자 혼다 소이치는 괴짜로 유명했다. 가령 제대로 차를 생산하기 전에 F1부터 진출하고, 토요타가 내수시장에서 조심스레 반응 살필 때 대뜸 미국에 하이브리드 자동차를 먼저 내놨다. 유행에 흔들리지 않는 혼다 특유의 신념은 어코드 하이브리드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일단 다들 궁금해 할 연비부터. 시승은 두 가지 버전으로 진행했다. 첫째는 성능의 한계를 가늠하기 위한 변화무쌍한 패턴의 가혹 주행, 두 번째는 일상적인 출퇴근을 가정했다.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가혹 모드에서 어코드 하이브리드의 평균연비는 16~17㎞/L. 출퇴근 모드에선 20~21㎞/L를 기록했다. 연비가 궁극의 목표라면, 이 차를 믿고 사도 좋다.

게다가 여느 하이브리드 자동차와 다른 점이 있었다. 하이브리드 자동차를 몰면, 본의 아니게 의기소침해지곤 한다. 특히 중저속에서 엔진이 깨어나지 않을까 신경 쓰게 된다. 그래서 가속 페달을 더 조심조심 다루게 된다. 그런데 어코드 하이브리드는 중저속에서 엔진을 발전용으로 쓴다. 때문에 이 같은 스트레스에서 자유로웠다. 나만의 강박일진 모르겠지만.
출퇴근 모드에서 정숙성은 훌륭하다. EV 모드는 적막 그 자체. 너무 조용하다 보니 보행자 안전을 위해 컴퓨터 부팅할 때 연상시키는 효과음을 인위적으로 낸다. 그러나 질주할 땐 상황이 바뀐다. 가속 페달을 깊숙이 밟으면 엔진의 비명이 제법 스민다. 혼다 어코드 하이브리드의 0→시속 100㎞ 가속 시간은 7초대 중반. 가족용 패밀리 세단으로 부족함이 없다.

그러나 감성적인 면은 아쉽다. 가령 시스템의 특성상 엔진 사운드와 가속에 살 붙여나가는 패턴이 일치하지 않는다. 스포츠 모드에서 이 같은 위화감은 오히려 더 크다. 엔진 반응의 민감도를 높이기보단 발전량을 늘리는 까닭이다. 미쉐린 에너지 세이버 타이어는 구름저항을 줄이기 위해 접지력과 절충했다. 그래서 굽잇길을 만나면 욕심을 다독이게 된다.
소신과 목적 뚜렷한 ‘연비 왕’ 세단

혼다 어코드 하이브리드는 추구하는 목적이 명확한 차다. 오랜 역사로 쌓은 신뢰와 준수한 외모, 널찍한 실내, 검증된 내구성에 동급 최고 연비로 방점을 찍었다. 준자율주행처럼 호기심 끄는 기술은 없지만, 2열 열선과 차선경보, 멀티앵글 후방카메라, 언덕길 밀림방지, 스마트폰 무선충전, HDMI 단자, 원격시동처럼 실제 유용하게 쓸 장비는 알차게 갖췄다.
어코드 하이브리드는 최신 유행 좇아 차를 고르는 이에겐 밋밋하고 심심할 수 있다. 그러나 필요한 구성만 소신껏 고르는 이들에겐 기꺼이 권할 만하다. 가격은 4,320만 원. 하이브리드 자동차 구매 지원금 100만 원 등 최대 270만원 상당의 세제, 공영주차장 반값 할인(수도권 중심), 서울 남산터널 혼잡통행료 면제 등의 혜택도 덤으로 기대할 수 있다.
글 김기범 편집장(ceo@roadtest.kr)|사진 최진호(pd@gooood.co.kr)
사진 최진호(pd@goooo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