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섭의 링사이드산책] 교육자에 가까운 복싱인, 박봉관의 라이프스토리

2017. 5. 6. 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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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회의 주인공은 예산중·고등학교 복싱부(덕산중 포함)를 1998년 창단부터 지금까지 햇수로 20년째 지도하며 외길인생을 걷고 있는 박봉관(1968년생, 예산) 관장입니다. 어려서 육상에 소질을 보인 박 관장이 복싱을 하게 된 계기가 흥미롭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떡장사를 하며 10남매를 키웠는데 막내인 박봉관이 어머니를 도우면서 떡을 도끼질하듯이 매일같이 절구로 반복해서 찧었지요. 일상화된 이 동작 덕에 상체근육이 놀랍게 발달했고 후에 복서로 입지를 구축하는 데 큰 도움이 됐습니다. 육상으로 만들어진 체력에 파워까지 보태진 겁니다.

충남 예산은 1929년 9월 17일 종로구 관훈동에 한국 최초의 복싱체육관인 조선권투구락부를 설립한 성의경의 고향입니다. 예산은 아마추어 국가대표인 신은철(대전대), 김재경(동국대), 신동길(경희대), 배경석(경희대) 등을 배출했고, 프로복서로는 박봉관을 비롯해 차상준, 유화룡, 문태진, 김원경 등이 나고자란 곳입니다. 역사적으론 백제부흥운동의 마지막 거점지이자, 흑치상치장군이 백제의 재건을 위해 싸웠던 임존성이 있던 곳이죠.

전국체전 결승전을 준비하고 있는 선수시절의 박봉관(가운데).


전국체전 결승에서 패한 후 프로행

박봉관은 예산고에 입학하면서 예산체육관의 권국상 관장 문하에서 복싱을 수련했지만 크게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습니다. 이후 군복무를 마친 후 청양군청에 입단 선수생활을 이어가던 박봉관은 1991년 72회 전국체전 충남대표로 출전, 결승에 진출했지만 부산시체육회 소속의 이훈(68년생, 현 국군체육부대감독)에게 패했습니다. 이 경기 후 프로로 전향한 박봉관은 상경해, 양광체육관의 장관호 사범(현 KBC심판부장)의 지도로 MBC신인왕전에 출전, 4전승(3ko승)으로 우승과 함께 감투상을 받으며 주목을 받았습니다.

1992년 박봉관은 크게 도약하기 위해 양광체육관에서 현대체육관으로 이적, 체계적인 트레이닝을 받습니다. 이후 기량이 일취월장하며 7전전승(4ko승)을 기록합니다. 신인왕전을 포함해 11전 11승(7ko)의 무서운 신예 박봉관은 12전째 ‘동양의 쿠에바스’라 불리는 동양웰터급챔피언인 박정오(1967년생, 화순)의 12차방어전의 도전자로 내정됩니다. 그리고 화제만발의 그 경기는 불꽃 튀는 난타전 끝에 무승부로 끝났습니다. 당시 박정오는 32전27승(20ko승)3무2패를 기록 중이었는데 11차례의 방어전 중 8차례를 KO로 장식한 강타자였습니다. 당연히 언더독으로 평가받던 박봉관에겐 무승부만 해도 크게 선전한 경기였습니다.

이후 박봉관은 박정오가 세계타이틀매치를 치르기 위해 반납한 동양챔피언타이틀을 놓고 ‘잡초복서’ 윤석현과 1995년 4월 타이틀결정전을 갖습니다. 6회 윤석현의 부상으로 인한 판정승을 거두며 마침내 동양챔피언에 등극합니다. 하지만 그 영광은 짧기만 했습니다. 그해 11월 도쿄에서 지명도전자인 요시노 히로유키(일본)와 맞붙었는데 스프리트 디시전(1-2 판정)으로 패한 것입니다. 복싱 마니아들은 아시겠지만 원정에서 1-2판정은 최소한 대등했거나, 내용상 이겼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박봉관은 이 경기 후 은퇴합니다. 1980년대 황충재-황준석-이승순이 황금의 웰터급에서 활동했다면, 1990년대는 박정오-윤석현-박봉관이 ‘웰터급 트로이카’를 구축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필리핀 선수와 국제전에서 KO승을 거둔 박봉관의 모습. 프로복서로 파죽의 연승을 달릴 때다.


고향에서 복싱을 가르친다

박봉관은 은퇴 후 1998년부터 덕산중학교에서 지도자생활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놀라웠습니다. 2001년까지 4년 동안, 후에 국가대표로 성장하는 전병국(서울시청)을 비롯해 강문구 김기원 정성철(이상 한체대) 윤경한(서울시청) 등 ‘덕산 독수리5형제’가 전국을 평정한 것입니다. ‘시골촌놈’들의 광란의 질주에 박봉관은 일약 명장의 반열에 진입했습니다. 박봉관은 2004년 예산중학교로 팀을 옮긴 후에도 폭풍질주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조해동-해성 형제(나란히 한체대)를 필두로, 김민우(서울시청), 정지용, 김경식(한체대), 이명관(한체대), 조원빈(용인시청) 박정현 등이 박봉관의 금맥에서 나왔습니다. 이들이 소년체전과 전국체전에서 딴 금메달만 16개나 됩니다. 여기에 각종 전국대회를 포함하면 금메달은 무려 40개가 넘습니다.

1캐럿짜리 다이아몬드를 건지기 위해서는 약 250톤의 광석이 채굴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금메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의 금메달에는 수많은 희생과 고통이 수반되야 합니다. 대학 진학도 그렇습니다. 시골에서 복싱을 배워 한체대 등 명문체대에 입학해 국가대표로 활동하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입니다. 공부로 치면 지방에서 공부해 서울대에 진학하는 것과 견줄 만합니다. 확실한 것은 복싱 지도자 박봉관이 이룬 성공의 크기는 복싱계가 다 인정한다는 사실입니다.

최근 박봉관의 제자 중 화제를 모은 선수는 국가대표 이명관(1992년생, 현 남해군청)입니다. 김주성(한체대)이라는 선수가 2016년 리우 올림픽 선발전에서 국가대표 간판인 밴텀급의 함상명(용인대)을 꺾으며 파란을 일으켰는데, 이명관은 이 김주성을 제압하고 태극마크를 달았습니다.

왼쪽부터 박봉관 관장, 조성민 선수, 김영균 예산중교사.


교육자가 인정한 ‘이 시대의 참스승’

인구 8만의 군(郡) 지역에서 새로운 복싱역사가 쉼없이 탄생하고 있으니, 아마 ‘한국복싱의 아버지’로 불리는 성의경 선생이 지하에서 흐믓한 미소로 띠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인생을 복싱에 투자한 까닭일까요? 박봉관 관장이 아내를 만난 것도 2002년 예산체육관이었습니다. 회원으로 등록한 김지영(1979년생) 씨와 열애 끝에 결혼에 골인한 것이죠. 아내 김지영 씨가 이란성쌍둥이였는데, 박봉관의 초등학교5학년인 두 자녀도 이란성쌍둥라고 합니다.

박봉관 관장은 2014년 상가건물(180평)을 경매로 낙찰받아 옥상에 살림집까지 차렸습니다. 아이들을 먹이고 재우며 합숙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산중학교의 김영균 교사(1960년생)는 박 관장이 아이들을 자식처럼 돌보면서 운동하는 모습을 보면 넉넉하게 지원하지 못하는 미안함과 더불어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고 말했습니다. “저도 교육자지만 박봉관 관장님이야말로 이 시대를 대표하는 참스승이죠.”

최근 만난 박봉관 관장은 제게 소박한 꿈 한 가지를 밝히더군요. “작년 전국체전과 올해 연맹회장배에서 우승한 예산고 3학년의 조성민(코크급)이 올해 전국체전에서 목표했던 금메달을 품고 한체대로 진학했으면 한다”고요.

박봉관 관장(왼쬭)과 아내 김지영 씨(가운데). 오른쪽은 장모 손정숙 씨다.


박봉관은 프로복싱에서 정확히 4년 8일 동안 14전을 싸우면서 4,000만 원의 돈을 모아서 예산으로 내려왔다고 합니다. 그 종자돈이 고향예산에서 박봉관에 의해 민들레 홀씨처럼 잘 뿌려져 20년이 훌쩍 지난 지금 박 관장은 자기건물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복싱을 마음껏 가르치며 나름 풍요롭게 살고 있습니다.

문득 박봉관과 같은 체육관소속으로 두 체급 세계챔피언에 오른 후배복서가 생각납니다. 개인적으로 필자가 좋아하는, 심성이 선한 복서였는데 아마 총수입이 박봉관의 10배 이상은 됐을 겁니다. 그런데 그는 현재 녹록지 않은 삶을 살고 있습니다. 손자병법에 나오는 전승불복(戰勝不服)이란 말이 생각합니다. 전쟁의 승리는 반복되지 않는다는 뜻이죠. 승리에 도취돼 있을 때 이미 패배는 등뒤에서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문성길복싱클럽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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