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의 공간>분리된 '두 삶'이 공존하던 곳.. 식민지 지식인의 '이유있는 방황'

기자 2017. 5. 26.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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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강사와 T교수’가 처음 발표된 1935년 당시 서울 거주 일본인은 서울 전체 인구의 약 25%에 달했다. 조선인과 일본인 거주지역은 대략 청계천을 기준으로 조선인의 북촌과 일본인의 남촌으로 나뉘어 있었으며 북촌을 대표하는 공간이 종로라면, 남촌을 대표하는 공간은 을지로·명동 등의 충무로(혼마치) 일대였다. 사진은 ‘인쇄 골목’으로 탈바꿈한 을지로의 모습이다. 김낙중 기자 sanjoong@
김강사와 T교수.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80) ‘김강사와 T교수’의 배경…서울 종로·충무로 일대

‘김강사와 T교수’는 일제강점기는 물론이고 현대문학사 전체로 확장해보아도 손꼽을 만한 지식인 소설이다. 일제강점기 하층민의 삶에 주목한 소설은 적지 않지만, ‘김강사와 T교수’처럼 최상층 지식인의 고뇌를 다룬 소설은 드물다. ‘김강사와 T교수’는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고민하는 지식인의 보편적 문제를 다룬 소설이면서, 동시에 식민지 지식인의 민족적 아픔을 담고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식민지배자 일본인과 식민지인 조선인이라는 그 폭력적 위계는 이 작품에서 경성이라는 도시의 분리를 통해서 실감 나게 드러난다. ‘김강사와 T교수’는 크게 세 가지 판본(1935년 1월에 발표된 ‘신동아’판, 1937년 2월에 일본어로 발표된 ‘문학안내’판, 1939년 ‘유진오단편집’에 수록된 학예사판)이 존재하는데, 식민도시이자 이중도시로서의 경성이 지닌 특징은 1939년 판 ‘김강사와 T교수’에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다.

‘김강사와 T교수’ 이외에도 유진오의 소설에는 서울의 지역색이 풍부하게 드러난 경우가 많다. 서울의 빈한한 거리 풍경이 자세하게 드러난 ‘스리’나 ‘오월의 구직자’, “거룩한 어머니의 손길”로 비유되는 향수로 삼종 증조부의 별장 창랑정(현 마포구 현석동에 위치)을 회고한 ‘창랑정기’, 종로 뒷골목의 카페에서 일하는 여급 푸로라가 등장하는 ‘나비’, 서울의 변두리였던 홍파동과 왕십리를 통해 전향 지식인의 소시민적 삶을 드러낸 ‘산울림’ 등을 들 수 있다. 이것은 “서울서 나서 서울서 자라난 나”라는 작가의 고백처럼, 서울 가회동에서 태어나 평생 4대문 밖을 벗어난 적이 없는 실제 삶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김강사와 T교수’의 주요한 갈등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인 김만필과 일본인 T교수 사이에서 발생한다. 일제의 폭압이 맹위를 떨쳐 양심적 지식인의 활동이 위축되던 1930년대 중반이 배경인 이 작품에서, 과거 사회주의 운동에도 관여한 바 있는 김만필은 동경제대 독일문학과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수재지만 일 년 반 동안 룸펜생활을 한다. 결국 그는 평소 경멸해오던 동경제대 교수, 조선총독부 과장, 전문학교 교장에게 부탁을 하고서야 강사 자리 하나를 얻어내는 데 성공한다. 이러한 청탁의 연쇄고리보다 김만필을 더욱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이 취업이 “정강이의 흠집”에 해당하는 경력, 즉 과거 사상 단체인 문화비판회 활동을 철저히 숨김으로써 가능했다는 사실이다.

그토록 힘들게 얻은 자리이지만, S학교에서의 생활은 결코 순탄하지 않다. 그곳에는 교활하기 이를 데 없는 일본인 교수 T가 버티고 있는 것이다. T는 늘 웃음을 띠고 있는 외양과는 달리 교활하고 비겁한 인물로서, 어느 조직에나 있을법한 전형적인 모사꾼이다. 도련님 또는 책상물림의 티가 뚝뚝 묻어나는 김강사와 닳고 닳은 T교수의 대비를 통하여 이 작품은 지식인의 이상과 현실의 간극을 날카롭게 형상화하고 있다. 더욱 중요한 것은 T교수가 이전에 사회주의 활동을 한 김강사의 일거수일투족을 “탐정견”이나 “셰퍼드”처럼 끊임없이 감시하며, 결국에는 김강사를 파멸시킨다는 점이다. 이러한 T교수는 일제의 간교함과 억압을 대표하는 인물로서의 전형성을 지닌다고 볼 수 있다.

강사와 교수를 주요인물로 내세운 소설답게 작품의 주요한 배경은 서울의 S전문학교이다. 이 학교는 유진오가 졸업했으며, 그 후에는 조수와 부수를 거쳐 예과 강사까지 역임했던 경성제대와 33년부터 강사로 활동했고 이후에는 교수로 재직했던 보성전문을 합쳐 놓은 것으로 보인다. S전문학교의 당당한 교사는 작품 발표 당시 유진오가 전임강사로 근무하던 보성전문의 본관을 닮아있다. 이 본관은 1934년에 준공되었으며, 영국의 케임브리지대와 미국의 예일대 본관을 모방하여 건축된 고딕풍의 호화찬란한 건물이었다. 그러나 구체적인 학교의 실상은 경성제대를 그대로 빼닮았다. 모든 교직원이 일본인으로 되어 있는 것이나 학생 역시도 일본인들 위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경성제대의 특징에 부합하는 것이다.

S전문학교는 근대적 이성을 내세워 조선을 야만시하며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했던 일제를 상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은 공간의 대비를 통해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S전문학교의 당당한 철근 콘크리트 삼층 교사는 그 주위의 돼지우리같이 더러운 올망졸망한 집들을 발밑에 짓밟고 있는 것같이 솟아 있는 것”이다. 김강사는 취임식을 앞두고, “아침을 먹고 나온 하숙집 풍경, 그 더러운 뒷골목 속에 허덕거리고 있는 함께 있는 사람들, 하숙료를 못 내고 담뱃값에 쩔쩔매는 영화감독, 일 년 열두 달 감시를 못 벗어나는 요시찰인인 잡지 기자, 아침부터 밤중까지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푸성귀 장사, 밥값 못 낸 손님들을 붙들고 꽥꽥 소리를 지르는 하숙집 마나님”과 “이 당당한 건물, 가슴에 훈장을 빛낸 장교, 모닝의 교수들 사이”에는 도대체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인가라는 의문을 갖는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두 세계 사이에 서 있던 김강사는 일본인들의 세계인 S전문학교에서 결국 더러운 뒷골목으로 표상되는 조선인들의 세계로 곤두박질치게 된다.

김만필의 시련은 일본인 교원만 가득한 S전문학교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조선인으로서 처음 교원이 된 김만필은 일본인들만 가득한 교관실에서 철저하게 홀로 남겨진다. 일본인 교원들은 신출내기이자 조선인인 김만필에게 아무런 말도 걸지 않는 것이다. 교관실에서는 노골적이고 맹목적인 식민주의적 담론이 공공연히 유통되기도 한다. T교수는 자신이 조선의 민속에 대해 연구를 했다며, 거짓말하는 여자한테는 똥을 먹인다거나, 조선 여자들이 살결이 고운 이유는 오줌으로 세수를 하기 때문이라는 식의 어처구니없는 망발을 내뱉는다. 동료 일본인 교원들이 모두 낄낄거리며 웃는 그 참담한 교관실에서, 조선인 김만필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런 풍속이 어데 있단 말씀이오, 나는 듣도 보도 못했소”라는 말을 “겨우” 던지고는 교관실을 빠져나오는 것뿐이다.

결국 T교수의 감시와 일본인 교원들의 따돌림으로 김강사는 강박 관념에 쪼들리는 신경쇠약 환자같이 항상 마음의 위협을 느낀다. 이것은 조선인이며 과거에는 사회주의 활동에도 열심이었던 김강사에게는 “당초부터 정해진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이곳에서 김만필이 겪는 이 괴로움은 유진오의 실제 삶과 무관하다고 할 수 없다. 유진오 역시 누구보다 뛰어난 학자였지만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끝내 경성제대 교수가 되지는 못한 것이다.

일본인 관리(교수)와 조선인 강사의 처지는 그들이 사는 집에서도 확연하게 구분된다. H과장의 집은 북악산 밑 관사촌이며, T교수의 집도 “훌륭한 문화주택”이다. 관사촌은 삼청동 일대로 짐작되는데, 삼청동은 조선 시대는 물론이고 일제강점기에도 아름다운 풍광과 총독관저나 조선총독부와의 근접성으로 인해 고급주택촌이 형성되어 있었다. 이에 반해 김강사는 근처의 “뒷골목 속 더러운 하숙”에서 지내며, 그는 하숙 온돌에 누워 “빈대 피 터진 벽”을 바라보고는 한다.

이러한 김강사와 T교수의 대비는 경성의 조선인과 일본인 전체로까지 확장해 볼 수 있다. 조선인 김강사와 일본인 T교수가 분명하게 구분되듯이, 1930년대 중반 서울은 일본인 거주지와 조선인 거주지가 선명하게 구분되었다. 실제로 식민지 시기 경성은 이중도시라고 할 만큼 많은 일본인이 조선인과 함께 살고 있었던 것이다. ‘김강사와 T교수’가 처음 발표된 1935년 당시 서울의 전체 인구는 약 44만 명이었고, 그중의 25% 이상이 일본인이었다. 그러나 조선인과 일본인의 거주구역은 조금 과장하자면 국경선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대략 청계천을 기준으로 하여 전통적인 조선인 거주지 북촌과 일본인 거주지인 남촌으로 구분되었다.

북촌을 대표하는 조선인의 공간이 종로라면 남촌을 대표하는 일본인의 공간이 혼마치(本町·충무로 일대)이다. 혼마치를 중심으로 하여 오늘날의 남대문로에서 태평로, 회현동, 을지로, 명동 등에 일본인의 주요 거주지였던 남촌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공간상의 특징을 반영하듯 T교수가 김강사를 데리고 다니는 곳은 철저히 남촌에 한정되어 있다. 둘은 처음 동경 여자라는 모던 여성이 일하는 세르팡 술집에 갔다가, 이후에는 아사히마치(旭町·지금의 회현동)에 있는 일본인 오뎅집으로 가서 술을 더 먹는다. 오뎅집을 나와서는 남촌의 상징인 미쓰코시 백화점 앞에서 택시를 타고 헤어지는 것이다.

일본인의 경성과 조선인의 경성은 매우 대조적으로 형상화된다. 연말을 맞이하여 일본인의 중심인 ‘본정(혼마치)통’은 매우 번잡하지만, 조선인들의 무대인 종로는 “일루미네이션만 헛되게 빛나고 세모 대매출의 붉은 깃발이 쓸쓸한 섣달 대목 거리의 먼지에 퍼덕이고 있을 뿐”이다. 새해가 되어도 종로 거리에는 “장식 하나 없고 살을 에는 매운바람이 먼지를 불어 올릴 뿐”인 것이다. 이처럼 초라한 종로의 뒷골목에는 “김만필과 비슷한 경우에 처해 있는” 젊은 사내들로 우글거린다. 일제강점기 “본정이 부유한 일본인의 상징이라면 종로는 빈곤한 조선인의 상징”(전우용, ‘종로와 본정’, ‘역사와 현실’, 2001, 189)이라는 역사적 사실이, ‘김강사와 T교수’에는 압축적으로 드러나 있는 것이다. 수백 년의 역사를 지닌 종로의 위축과 고작 수십 년의 역사를 지닌 본정의 융성은 식민지라는 조건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주요 고객인 조선인들의 빈곤화와 북촌의 슬럼화로 인해 종로는 몰락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총독부의 각종 지원정책으로 인해 본정은 나날이 번화해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실제로 김강사가 S전문학교로 가는 도중에 전차 창으로 보이는 북촌의 풍경은 “더러운 바라크 집들이 톱니빨같이 불규칙하게 늘어서” 있다.

이중도시로서의 경성은 유진오의 ‘가을’(‘문장’, 1939.5)에도 잘 나타나 있다. 유진오는 일제의 탄압이 극심해진 1930년대 후반에 ‘시정(市井)의 리얼리즘’, 즉 단장을 들고 거리로 나가 시정 사람들의 일상적인 생활을 살펴봄으로써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하는 것을 창작방법으로 내세운다. ‘가을’은 주인공 기호의 산책이라는 행위를 통해 시정의 리얼리즘이 미학적으로 구현한 작품으로서, 시정 편력의 행위는 자연스럽게 1930년대 말의 서울 시내를 구석구석 드러내는 효과를 발휘한다. 답답한 마음에 산책을 나온 기호는 혜화정(혜화동), 창경원(창경궁), 원남정(원남동) 네거리, 종묘 뒤 큰 거리, 돈화문 앞 파출소, 운이정(운니동), 본정(충무로), 황금정(을지로), 안동 네거리, 창경원 정문 앞, 동소문을 지나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도 본정의 술집에서는 이랏샤이마시, 스깡히도다와네, 맛다꾸다요, 시마이나사이요, 마다 하지맛다 등의 일본어가 자연스럽게 울려 퍼진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서울의 거의 절반이 일본인과 일본어와 일본풍으로 채워져 있었다는 사실은 가슴 아프지만 묻어둘 수만은 없는 서울의 또 다른 얼굴이다. 이경재

문학평론가·숭실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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