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덤문화와 문빠

홍성윤 2017. 6. 2. 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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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읽는 서브컬처-49] '문빠'. 두 글자에 불과하지만 여간 어려운 단어가 아니다. 자임하는 쪽과 호명하는 쪽의 온도차가 분명해 적절하게 쓰기도 어렵지만, 쓰고 난 이후의 후폭풍이 매섭기도 하다.

하지만 문빠의 정치적 함의, 언론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재생산되는 프레임, 대중적 인기냐 과격한 지지냐 하는 가치 판단을 잠시 내려놓을 수 있다면 문빠는 정치인 혹은 지도자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 아이돌 팬덤과 어떤 식으로 결합하고 닮아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재미있는 사례다.

이번 '쉽게 읽는 서브컬처'에서는 문빠와 아이돌 팬덤의 유사성에 대해 키워드를 중심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빠

[팬덤] 빠순이·빠돌이(이하 빠, 영어식 표현은 fanboy·fangirl)라는 단어는 원래 비하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오로지 연예인 오빠만 바라보는 열성팬 '오빠순이'의 준말로, 선호하는 수준을 넘어 과도한 관심과 몰입으로 주변에 피해를 주는 이들을 일컫는 명칭이다. 하지만 현재는 그 의미가 확대됨에 따라 부정적 뉘앙스가 희석돼 아이돌이 아닌 다른 연예인, 유명인, 브랜드, 행위 등에 빠져든 마니아나 일반 팬 역시 '빠'라는 카테고리로 부르고 있다. 빠의 대척점에 있는 단어로 '까'(영어식 표현은 hater)가 있다. 비난하다는 뜻의 은어 '까다'에서 온 표현으로, 대상에 대해 공격적으로 비판하는 사람을 뜻한다.

드라마 `응답하라 1997`의 주인공 성시원. H.O.T, 그중에서도 멤버 토니의 광적인 팬으로 그려진다. 아이돌 그룹 `에이핑크`의 멤버인 정은지가 연기했다. /사진출처 = tvN
[문빠] 우선 문빠의 뜻부터 짚어보자. 문빠란 '문재인 대통령'과 '빠'를 합성한 단어로 문 대통령의 열성 지지자를 뜻한다. 유사어로 그의 성씨에서 유래한 '달레반'도 있으나, 아프가니스탄의 무장단체이자 테러조직인 탈레반에서 따온 만큼 반문 진영에서 지지자들의 과격함을 비꼬는 부정적인 뉘앙스가 강하다. 그럼 문빠는 몇 명이나 될까. 문 대통령의 대선 득표율(41.08%)이나 국정수행 지지율(84.1%, 리얼미터 5월 4주차 설문 기준)로는 열성 지지자를 가려낼 수 없으니 가늠할 수 있는 수치를 기준으로 살펴보자. 2016년 9월 출범한 문 대통령 통합 온라인 팬클럽 '문팬'(5월 30일 기준 회원 수 2만1089명, 중복회원 포함)을 비롯해 젠틀재인(4만4403명), 문사모(1만5732명, 현재는 비공개로 전환) 등 팬카페 3곳의 회원 수를 모두 합치면 8만1224명에 육박한다. 이는 5월 18일자 보도된 한 언론사의 '문빠, 힘인가 독인가'라는 기사에서 집계한 4만3049명보다 88% 많은 수치다. 이 밖에도 카페에 가입하지 않았지만 SNS나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알음알음 활동하는 '샤이 문빠'를 포함하면 그 수는 더 커지게 된다.

하지만 자만은 금물. 국내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아이돌 엑소(EXO)의 팬클럽 EXO-L의 회원 수는 404만6035명(5월 30일 기준)이다.

특히 문 대통령은 대선 선거운동 기간에 온라인 커뮤니티마다 지지자들을 대상으로 '인증 동영상'을 올리기도 했다. 한 기사에서 문 대통령 지지층이 많은 온라인 커뮤니티로 엠엘비파크, 뽐뿌, 오늘의 유머, 클리앙, 루리웹 등을 꼽자 언급이 안 된 다른 커뮤니티에서는 "반성한다" "왜 우리는 빼느냐"는 반응이 나오기도 했다.

지난 5월 1일 대선을 앞두고 문재인 대통령(당시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가 경기도 의정부시 의정부역 앞에서 열린 집중유세에서 지지자가 만든 응원 피켓을 들어 보이고 있다. /사진출처 = 연합뉴스
#입덕

[팬덤] H.O.T부터 팬질을 시작해 god를 거쳐 동방신기 사생팬까지 요직을 두루 경험한 김서 씨(34·가명)는 "빠순이가 되는 건 어느 한순간"이라고 말한다. 꾸준히 관심을 갖고 있던 와중에 호감이 쌓이고 쌓여 팬이 되는 것이 아니라, '꽂히는' 사진(짤) 한 장, 영상 하나가 계기가 돼 팬이 된다는 얘기다. 이를 두고 오타쿠(=덕후)에 입문했다는 뜻으로 '입덕'이라고 부른다. 교통사고처럼 부지불식간에 팬이 되어 있다고 해서 '덕통사고'라고도 한다.

입덕이 한순간이듯 뜨는 것도 한순간이다. 아이돌 그룹 EXID는 멤버인 하니의 무대 직캠 하나로 음원 순위 역주행 신화를 쓰며 인생 역전에 성공했다. (PHARKIL이라는 팬이 올린 해당 영상은 조회 수 2300만건을 돌파했다.) 또 일본의 아이돌 하시모토 간나는 '기적의 한 장'이라고 불리는 사진 한 장으로 '천 년에 한 번 나올 인재(1000年に1人の逸材)'라는 별칭을 얻으며 전국구 스타로 발돋움했다. 이 사진 역시 전문 사진작가나 소속사가 아닌 40대 팬이 찍은 것이다.

일본 아이돌 하시모토 칸나를 일약 전국구 아이돌로 만든 `기적의 한장`(왼쪽)과 역주행 신화를 새로 쓴 EXID의 직캠 영상.
[문빠] 인터넷 커뮤니티나 SNS의 타임라인을 살펴보면 문 대통령 입덕을 고백하는 글들이 눈에 띈다. '나의 이니(문재인) 입덕 영상 올려본다' '친구가 "문제가 되는 게…"라고 했는데 "문재인이 왜?"라고 했다' '새벽까지 유툽(유튜브)에서 영상 찾아보느라 일하다가 코피가 터졌다' 등 입덕의 경로와 정도도 다양하다. '문재인 대통령 입덕 증상 10가지'를 소개한 기사도 온라인에서 화제가 됐다. 기사에서 소개한 증상은 △아침에 일어나 문재인을 검색한다 △뉴스에 나온 문재인 사진을 보고 나도 모르게 웃고 있다 △휴대폰에 문재인 사진이 2개 이상 있다 △문재인의 과거 사진을 찾아본다 △문템(문재인 아이템)을 찾아보고 산다 등이 있다.

입덕 영상·입덕 짤은 개인마다 다르다. 누구는 잘생긴 외모에 열광하고, 혹자는 의외의 모습에 매력을 느낀다. 아이를 안아주는 문 대통령에게 입덕했다고 고백하는 이들도 있다. 최근 급부상한 입덕 짤은 '문집사' 시리즈다. 반려견 마루와 반려묘 찡찡이를 기르는 문 대통령의 소소한 일상이 담긴 사진들은 이모티콘까지 만들어질 정도로 인기다.

문재인 대통령에 `입덕`했음을 밝히는 SNS와 인터넷 커뮤니티의 게시글들. `덕통사고`나 `(문 대통령에) 치었다`라는 표현도 쓴다.
#짤줍

[팬덤] 입덕했다면 이제 짤(짤방)을 수집할 차례다. 짤은 인터넷 커뮤니티 디시인사이드의 하위 게시판인 갤러리에서 이미지가 없어 게시물이 삭제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첨부한 이미지를 두고 '짤림 방지(짤방)'라고 부른 것에서 유래했다. 이후 짤은 이미지를 뜻하는 인터넷 은어가 됐다. 팬덤에서는 자신이 선호하는 아이돌의 각종 사진, 영상, 움짤(GIF 형식의 움직이는 짤방) 등 이미지 파일을 수집하는 행위를 '짤줍(짤방을 줍다)'이라고 한다. 엑소의 시우민 팬이라는 이민경 씨(35·가명)는 "이쁘게 나온 짤들을 모아 '내 새끼 자랑하는 용도'로 트위터에 올린다"고 했다. 이씨는 "고퀄리티 짤은 내려받아 폴더별로 정리해두고 컴퓨터나 스마트폰 배경으로도 해둔다. 한데 모아놓고 가끔씩 정주행하면 개안(開眼)하는 느낌"이라고 덧붙였다.

아이돌 그룹 세븐틴의 짤을 검색해 저장하는 모습. 정작 세븐틴보다 팬들의 애칭인 `셉틴`으로 검색해야 더 양질의 짤을 구할 수 있다.
[문빠] 대통령 짤줍은 난이도가 낮다. 우선 통신사와 언론사에서 실시간으로 생산하는 양질의 뉴스 사진 및 영상은 물론 청와대와 문 대통령 개인 SNS를 통해 공개되는 자료가 워낙 많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일정이 없는 날이 거의 없다 보니, 매일매일이 짤줍의 나날이다. 포털 사이트 메인 화면도 적극 협조해주는 팬질인 셈이다. 열성 팬들은 과거 기사와 저서 등을 뒤져 희귀한 짤을 발굴하기도 한다. 보도 영상과 다큐멘터리 등에서 주요 장면을 편집해 움짤로 만들거나, 일일이 캡처해 올리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는다.
네이버 `문재인` 이미지 검색 결과.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하루가 멀다하고 `오늘의 문재인`같은 짤줍 게시물이 올라온다.
#포교

[팬덤] 좋은 건 나만 볼 수 없다. 팬들은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홍익인간의 이념에 따라 SNS와 인터넷 커뮤니티, 팬카페 등에 열심히 모은 짤들을 방출한다. 일련의 과정은 팬덤 내에서는 공유와 공감의 기제로, 외부에서는 전도(傳道)의 메커니즘으로 작동한다. 자신의 입덕 포인트에 공감해주는 사람이 나타나면 동지를 만난 것처럼 반갑고, 자신이 올린 포교용 짤을 보고 뒤따라 입덕한 이들을 보면 곳간 가득 군량미를 채워놓은 책사의 마음처럼 뿌듯하다.

일부 팬들은 개인 촬영장비를 사용해 촬영한 고화질 사진과 영상을 팬카페와 SNS, 유튜브 등에 게시한다. 팬덤에서는 이를 직찍(찍덕 팬이 직접 촬영한 사진), 직캠(직캠러가 직접 촬영한 영상)이라고 한다. 무대 전체가 아닌 멤버 개개인에게 포커스를 맞춘 개인 직캠도 존재한다. 직캠은 단순히 팬이 생산한 자료를 넘어 엄청난 파급력을 지닌 홍보 요소가 되기도 한다. 앞서 언급한 EXID의 하니 직캠이 대표적인 예고, 2015년 9월에는 아이돌 그룹 여자친구의 멤버들이 빗속에서 공연하다 8차례나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 공연하는 모습이 해외 매체를 통해 기사화되기도 했다.

최근엔 '나눔'이라는 문화도 생겨났다. 포스터, 사진엽서, 스티커, 인형 등 아이돌 관련 상품을 다른 팬에게 무료로 양도하는 이벤트다. SM은 자사가 운영하는 코엑스 아티움 일부를 아예 팬덤 간의 나눔을 위한 공간으로 개방하고 있다.

아이돌 그룹 엑소의 `짤 방출` 블로그 검색 결과(왼쪽)과 온라인 커뮤니티 `인스티즈` 게시판의 문재인 대통령 관련 검색 결과. 문 대통령의 애칭인 `이니`라는 키워드로 올라오는 경우가 많다.
[문빠] 문 대통령의 수많은 별명 중 하나가 '파파미'다. '파도 파도 미담'을 뜻하는 이 별명은 문 대통령 지지자들의 주요 포교 전략이다. 그에 관한 미담을 텍스트, 카드뉴스, 영상 캡처 등 다양한 형태로 게시하고 글 말미에 문 대통령의 외모패권주의 짤을 하나 심어놓는 식이다. 파파미뿐만 아니라 공무의 순간, 사적인 사진도 다양한 방식으로 포교의 수단이 된다.

포교가 반드시 '짤줍→방출'의 패턴인 것은 아니다. 트위터나 페이스북, 인스타그램의 경우 '공유'나 '좋아요' 기능이 짤줍 및 포교의 역할을 갈음하기도 한다. 문 대통령에게 찰싹 붙어 있는 반려묘 찡찡이, 찡찡이의 용변을 치우는 대통령의 사진은 트위터에서 5만회 이상 리트윗됐다.

#굿즈

[팬덤] 팬덤의 권력지형도를 직접 보고 싶다면 공방 직관(공개 음악방송 직접 관람)을 하면 된다. 나름 세력이 있는 아이돌이라면 간주 때마다, 사비(サビ, 반복되는 후렴구를 뜻하는 일본식 용어) 때마다 멤버 이름을 연호하며 외치는 팬들의 손마다 풍선이나 야광봉이 들려 있을 터다.

아이돌 연관 상품을 뜻하는 '굿즈(Goods)'의 기원은 색깔 풍선이다. 한국 아이돌 팬덤 문화의 시초라고 보는 H.O.T와 젝스키스는 각각 흰색과 노란색 풍선(그리고 우비)을 응원 도구로 사용했다. god는 아예 '하늘색 풍선'이란 팬덤 헌정곡을 부르기도 했다. 차별되는 색은 한정돼 있고, 아이돌은 자꾸 데뷔하는 바람에 후대로 갈수록 색상명이 복잡해지고 있다. 틴탑의 상징색은 '펄 라이트 라벤더', B1A4는 '파스텔 애플라임', f(x)는 무려 '펄 라이트 페리윙클'이다. 최근에는 차별화와 상품화에 유리한 야광봉이 대세 응원 도구로 자리 잡고 있다.

굿즈는 팬덤의 응원 도구와 콘서트·앨범 발매 이벤트 굿즈를 넘어 황금알을 낳는 MD(Merchandise) 산업으로 커지고 있다. SM엔터테인먼트와 YG엔터테인먼트 등 연예기획사는 상설 매장과 온라인 매장을 운영하며 상품들을 쏟아내고 있다. 코트라는 주요 연예기획사 5곳(SM, YG, JYP, CUBE, FNC)의 2014년 사업보고서를 인용해 굿즈 및 초상 관련 상품 연매출이 750억원에 달한다는 분석을 내놨다. MD 관련 매출이 빠르게 늘고 있는 추세라 현재 관련 매출 규모는 1000억원 이상으로 추산된다. 여기에 팬덤 내에서 자체적으로 생산·판매하는 비공인 굿즈도 있다. 직접 촬영한 사진을 엮어 포토북을 내거나 메신저 이모티콘, 스타를 본뜬 인형을 만들기도 한다.

다양한 아이돌 굿즈. 하단 이미지 좌로부터 빅뱅 야광봉, 엑소, 아이콘, 슈퍼주니어의 굿즈. 상단 이미지는 빅뱅 콘서트를 가득 채운 야광봉. /사진출처 = 각 소속사
[문빠] 문 대통령도 굿즈가 있다. 소위 문템이라고 하는 문 대통령 연관 굿즈의 시발점은 바로 타임지 아시아판이다. 문 대통령은 대선 직전 출간된 타임지 아시아판 표지를 장식했다. '협상가(The Negotiator)'라는 제목과 함께 포스가 넘치는 표정의 문 대통령을 담아낸 타임지 최신호는 출간 전에 품절되기도 했다. 5월 8일 2차 예약판매 때는 분당 42권씩 팔리는 등 상반기 베스트셀러 선두를 차지했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주간 발행하는 정책정보지 '위클리 공감'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그가 등장하는 표지만으로도 품절 사태가 날 정도니 자서전 인기야 두말할 것도 없다. 문 대통령의 자서전 '운명'은 대형 서점 베스트셀러 1위에 등극했다.

이에 인터넷 서점들은 물 들어올 때 노를 젓는 모양새다. 예스24와 알라딘은 문 대통령의 도서 '대한민국을 묻는다'와 함께 일정 금액 이상을 구매하는 고객에게 대통령 포토카드 5종을 증정하는 이벤트를 열었다. 또 예스24는 타임 아시아판을 포함해 일정액 이상 구매하면 타임지 표지와 동일한 포스터를 준다. 포토카드, 포스터 증정은 일반적으로 아이돌의 신작 앨범 홍보와 판매 촉진을 위해 주로 활용하는 마케팅 전략이다.

여야 원내대표 오찬에서 대통령이 착용한 112주년 독도주권 선포의 날 기념으로 제작된 '강치' 넥타이도 바로 매진됐고, 그가 등산 때 즐겨 입는 주황색 등산복은 4년 전에 단종된 상품이지만 제조사인 블랙야크 측은 제품을 재출시하기로 결정했다. 이 밖에도 부암동의 한 카페에서는 문 대통령이 즐겨 마시는 블렌딩 레시피가 문 블렌드란 이름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네티즌도 자체 생산에 뛰어들었다. 5월 24일 팬카페 '젠틀재인'에서는 달력과 버튼 등 카페에서 제작한 굿즈를 공구(공동구매)하고 있다. 또 한 회원은 "가진 굿즈가 없어서 하나 만들어 봤다"며 종이와 컬러 프린터를 활용해 만든 문 대통령 종이공작 인형 사진을 게시하기도 했다. 작성자는 출력 가능한 설계도를 공유해 회원들이 직접 만들어볼 수 있게 했다. 이 밖에 네티즌들은 SNS에 더불어민주당의 상징색인 파란색 물건 사진을 올리며 '이니블루'라는 해시태그를 붙이기도 한다.

문 대통령 당선 이후 인기를 끌고 있는 문템들. 좌측부터 위클리공감, 문 대통령 등산복, 문 블렌드 커피, 타임지 아시아판, 젠틀재인 달력과 강치가 그려진 넥타이.
#사생

[팬덤] 사생, 사생팬은 무대 밖 스타의 사생활까지 쫓는 극성 팬을 뜻한다. 이들은 공식 무대나 행사 외에 사적인 일정도 포함해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한다. 드라마 '응답하라 1997'에서 (귀엽게) 묘사된 것처럼 숙소나 자택을 찾아가 무작정 앞에서 기다리거나, 아예 택시를 대절해 차량을 추격하기도 한다.

1990년대 초창기 아이돌 팬덤 문화에서는 연예인과 팬의 접점이 방송 외에는 지극히 제한적인지라 갈 곳 없는 팬심이 사생의 형태로 분출되는 일이 잦았을뿐더러 '인기 연예인이라면 감내해야 하는 상황'이라는 인식이 팽배해 사생팬의 존재는 묵인됐다. 하지만 1998년 가수 김창완이 11년간 자신을 괴롭혀 온 스토커를 고소하면서 도를 넘어선 사생팬의 심각성이 공론화됐다. '빠'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는 대부분 이 지점에서 기인한다.

2000년대 중반께 사생팬 활동을 했던 김서 씨는 "아이돌그룹 멤버들끼리 놀러 가는 곳까지 쫓아다니는 경우도 많은데 멤버들에게조차 좋은 소리를 못 듣는 경우가 많았다"며 "멤버 숙소 앞에서 밤늦게까지 기다리고 있노라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혀 차는 소리도 많이 들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사생팬 활동에 대해 "좋아하는 스타에게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시작하는데 남들이 모르는 정보를 알게 되고 공유하게 되면서 정보 자체에 집착하게 되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드라마 `응답하라 1997`의 주인공이 H.O.T의 멤버 토니의 집 앞에서 `사생`팬질을 하는 모습. 골판지 상자에 들어가 노숙까지 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사진출처 = tvN
[문빠] 대통령 주변 사람은 누구나 사생이 된다. 기자도 마찬가지다. 문 대통령뿐만 아니라 원래 일국의 대통령은 말 한마디, 사소한 개인 일정도 모두 뉴스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한복 색깔은 '패션 외교'가 되고, 이명박 전 대통령의 먹방은 '서민 행보'로 분했다. 청와대 사진작가는 대통령의 공식 일정 외에도 인간적인 모습을 렌즈에 담아낸다. 국가가 허락한 사생인 셈이다.

일본의 경우는 더하다. 각 언론사 정치부에는 '소리방(總理番)'이라고 하는 총리 당번 보직이 있다. 누구와 만났는지, 어디를 갔는지, 무엇을 했는지 새벽부터 한밤까지 총리의 일거수일투족 일분일초를 지켜보고 알리는 역할이다.

여기에 더해 지지자들 역시 사생을 자처한다. 팬카페 '젠틀재인'에는 문 대통령의 일정을 좇아 현장사진과 영상을 촬영하고 업로드하는 사진·영상팀이 따로 있다. 기사로는 소개되지 않는 고화질 짤들이 팬덤 내부에서 생산되고 유통된다.

대통령의 일거수일투족은 곧 뉴스다. 좌측부터 박근혜 전 대통령의 `한복외교`, 이명박 전 대통령의 `먹방`, 문 대통령의 반려묘 찡찡이와의 투샷.
#2차창작

[팬덤] 슬래시 소설이라는 장르가 있다. 시초는 SF드라마 '스타트렉'의 두 인물 커크 선장과 스폭을 동성 커플로 설정한 커크·스폭 팬픽이다. 팬픽은 팬이 원작의 인물과 배경을 바탕으로 창작한 소설을 뜻한다. 아이돌 멤버를 등장인물로 삼아 쓴 소설도 팬픽의 범주에 들어간다.

팬픽에서 그리는 동성 간의 낭만적인 연애 혹은 성적인 관계는 생산자·소비자의 실제 성 정체성과는 무관하다. 말 그대로 가상의 이야기로서 소비하기 때문이다.

만약 이성(異性) 캐릭터가 이야기에 개입하는 경우에는 아이돌과 팬인 자신이 이어질 가능성과 충돌하게 된다. '완벽한 세계'를 유지하기 위해 팬덤은 아이돌 내부에서의 관계에 집중한다.

팬아트도 있다. 소위 '금손' 팬들은 아이돌의 특징을 잡아 귀엽거나 멋진 캐릭터로 그려낸다. 이민경 씨는 "팬아트는 모에화를 통해 캐릭터를 잡아준다는 측면에서 홍보 효과가 크다"고 강조했다. 발빠른 SM은 팬아트를 모아 볼 수 있는 전문 플랫폼 '팬북'을 운영하고 있다.

팬덤의 2차 창작을 놓고 단순히 아이돌에 열광하는 소비자를 넘어 새로운 가치와 문화를 창조하는 생산자의 영역에 진입하는 단계로 보기도 한다. 미디어학자인 헨리 젠킨스 MIT 교수는 자신의 저서 '팬, 블로거, 게이머:참여 문화에 대한 탐색'(비즈앤비즈)을 통해 "(2차 창작은) 팬들이 능동적인 문화 수용자로서 원전을 재해석하고 창조한 독창적인 대중문화"라고 설명한다.

아이돌 관련 팬픽은 선정과 게재에 있어 민감할 수 있어(공수 선정의 문제 등) 무한도전 팬픽 관련 이미지로 갈음한다. 지난 해 6월 무한도전 방송분에서는 막내작가가 쓴 `박명수/정준하 팬픽`이 화제가 됐다. /사진 출처 = MBC
[문빠] 대통령도 모에화 광선을 피할 수 없다. 비디오게임 커뮤니티 루리웹의 한 회원은 문 대통령을 SD캐릭터화한 캐릭터를 선보였고, 문 대통령과 찡찡이를 주인공으로 하는 이모티콘 팬아트를 선보인 네티즌도 있다.

브로맨스도 피할 수 없었다. 5월 9일 대선일 저녁 안희정 충남지사는 대선 승리가 확실시된 문 대통령에게 볼 뽀뽀를 했다. 그리고 그 사진은 다음날 월스트리트저널 1면에 실렸다. 안 지사는 '이불킥'이라며 후회하는 척 하더니 본인의 페이스북에 네티즌이 그린 볼 뽀뽀 팬아트를 올리며 의혹(?)에 불을 지폈다(팬아트에는 '오늘부터 1일이다'라고 적혀 있다).

대통령을 소재로 하는 2차 창작물의 등장은 이례적이다. 팬덤 문화에 익숙한 세대들이 정치의 영역에서도 동일한 방식으로 활약하면서 가능해진 일이다.

문 대통령을 소재로 한 팬아트들. 좌측부터 루리웹 회원 우켈켈박사의 TS(성별바꿈) 팬아트, 토끼6의 모에화 팬아트, 이모티콘 형식으로 공유되고 있는 팬아트.
대선 다음날 월스트리트저널 1면을 장식한 문 대통령과 안 지사의 볼 뽀뽀 사진(왼쪽). 안 지사는 이날 볼 뽀뽀를 소재로 그린 팬아티를 SNS에 업로드했다.
#팬덤_정치를_만나다_정치_팬덤을_만나다

[팬덤]과 [문빠]는 닮았다. 사소한 계기로 입덕해, 어느 순간 '다른 이름으로 이미지 저장'을 누르고 있고, 품절 임박이라는 소리에 굿즈를 결제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SNS와 카톡에는 연일 '얼굴패권주의' '꽃보다 청와대' 같은 짤방이 공유된다. 이대로 정치인은 아이돌이 되는 건 아닐까 우려 섞인 이야기도 나온다.

시민들이 정치에 참여하는 방식은 시대에 따라 변해왔다. 아고라 광장은 다음 아고라의 게시판이 됐고, 투쟁과 시위는 촛불로 이어졌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 때 의원들을 향한 '문자 폭탄'과 '카톡 제보'는 청문회의 주요한 변곡점이 되기도 했다. 팟캐스트와 썰전은 정치의 외연을 넓혔다. 정치에 스며든 팬덤 문화 역시 젊은 세대가 스스로에게 익숙한 언어로 번역된 정치 참여다. 정치권 역시 그들의 언어로 호응하고 있다.

[홍성윤 프리미엄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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