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워인터뷰>"민족·민중주의 탓 勞使政 협력체제 붕괴.. 低성장 불러"

이민종 기자 2017. 3. 31.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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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에 걸쳐 고대에서 현대까지 우리나라 3000년을 경제학적 관점으로 독자 연구한 ‘한국 경제사 Ⅰ·Ⅱ’를 펴낸 이영훈 전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가 지난 20일 서울 관악구 봉천로길 낙성대경제연구소에서 한국의 근대화 생성 과정과 배경, 의미 등을 설명하고 있다. 곽성호 기자 tray92@
1970년대 초 운동권 학생이었던 이영훈 전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젊은 시절 민족주의에 심취해 있었지만 나이 50이 넘어서까지 수많은 책을 보고 공부한 끝에 그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곽성호 기자 tray92@

‘한국 경제사’ 완간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

한국 경제사학계에는 가장 논쟁적인 인물이 한 명 존재한다. 그와 ‘대척점’에 선 학계, 시민사회단체, 노조 등은 ‘뉴라이트 운동이 성공을 거둘 수 있게끔 맹활약한 인물’ ‘왜곡된 역사관의 소유자’ ‘해괴한 주장과 자기 모순적 논리의 전개자’라며 비판적인 시선을 보낸다. 한 자치단체의 공무원 노조는 그의 강의를 거부하기도 했다. 올해 서울대 경제학부에서 정년퇴임한 뉴라이트 계열의 대표적 경제학자인 이영훈(66) 전 교수에게 집중된 ‘화살’이다. 하지만 또 다른 한쪽에서는 남이 갖추지 않은 식견과 노력, 예지력으로 학문적 소신을 발휘하는 학자, 자유민주주의 수호자, 촌철살인의 대중적 역사 강사로 조명하고 있다. 한 시대를 살면서 이처럼 엇갈린 평가의 대상이 되기란 쉽지도 않을 뿐더러 비슷한 예도 많지 않다. 마르크스주의에 심취했고 민주화운동으로 제적을 당하고 위장취업을 했던 민주화운동 1세대에서 보수사학자로 전향한 이력은 더 이채롭다. 공개 장소에서 멱살을 잡혀 쫓겨나가는가 하면, 인터넷에선 비방 글로 수모도 겪었다. 민족주의의 환상을 심어준 잘못된 역사교육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교과서포럼 공동대표를 맡았고, 일본의 식민통치가 결과적으로 한국의 근대화에 기여했다는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창했다.

이 전 교수는 최근 기원전 3세기부터 현재까지 한국 경제의 오랜 흐름을 정리한 대작 ‘한국 경제사 Ⅰ·Ⅱ’(일조각)란 저서로 다시 주목 받고 있다. 강단에서는 물러났지만 공개 강의도 활발하다. 그가 설파하고 천착하고 있는 경제사학적 관점에서 한국 경제의 근원은 무엇이며, 자신에 대한 세간의 평가에 대해서는 어떤 반론을 펼칠지 궁금했다. 한국 경제의 궤적, 흐름을 어떻게 좇고 바라보느냐는 점 역시 마찬가지다. 지난 20일 서울 관악구 봉천로길 낙성대경제연구소에서 이 연구소 이사장을 맡고 있는 이 전 교수를 만났다. 짙고 숱이 많은 눈썹이 인상적인 노학자는 말문을 열자 거침이 없었다.

―‘한국 경제사 Ⅰ·Ⅱ’를 오랫동안 공을 들여 썼다고 들었다.

“두 권 합쳐 1380쪽이다. 10년 걸렸다. 애초 모 출판사로부터 한국 경제사 관련 대학 강의에 적합한 교재를 써달라고 해 시작했다. 그런데 쓰기 시작해서 1년 반 정도 지나 완성하고 보니 너무나 불충분하고 도식적이었다. 출간을 포기하고 전면적인 연구서를 써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당시 2003∼2004년에는 한국 경제사 연구가 급격히 변화하고 있는 시기로, 새로운 학설 등이 많이 등장했다. 예컨대 조선 후기 물가사, 물가 임금 이자율 등 경제 통계들이 막 개발되는 등 수량적 자료에 토대를 둔 연구가 진행됐다. 새롭게 변화한, 새로운 정보에 기초해서 전면적인 재구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문명이 시작된 이후 3000년 가까이 되는 한국의 경제사를 연구서 수준으로 완성하게 됐다.”

―강조하고 싶던 내용이 있다면.

“우리 한국인들의 존재 형태, 가족 형태다. ‘사회적 존재 형태’ ‘국가적 존재 형태’가 시대마다 꾸준히 발전해왔다는 점을 규명하고 싶었다. 한국사를 4개의 시대로 구분했다. 제1시대는 기원전 3세기부터 기원후 7세기로 취락의 시대, 촌(村)의 시대다. 이때의 소규모 세대는 사회생활이나 생산과정 등 국가의 수치 단위로는 역할을 하지 못했다. 제2시대는 8∼14세기로 정(丁)의 시대다. 통일신라, 고려 시기로 이때는 취락이 아니라 많게는 15개 정도의 소규모 세대가 하나의 복합체로서 결합하는 ‘하우스 홀드 콤플렉스(Household Complex)’가 생산과 국가적 수치의 단위를 형성했다. 제3시대는 15∼19세기로 호(戶)의 시대다. 조선 시대에 세대복합체가 해체되고 소규모 가족, 소농이 생산과 국가적 수치의 기본단위가 됐다. 20세기부터는 개인의 시대인 제4시대로 구분했다. 이 시대에 한국인들은 근대적 가족과 개인으로 성립하게 된다.”(김재호 전남대 경제학부 교수는 이에 대해 마르크스주의적 역사법칙, 삼분제와 같은 유럽 중심주의적 시대구분과는 맞지 않고(이 전 교수가) 완전히 새로운 시대구분을 제시했다고 했다. 김낙년 동국대 경제학과 교수는 “전체의 논지가 대단히 개성적이고 기존의 역사 평가나 서술 방식으로부터 벗어나 있다”고 분석했다.)

―소농 경제의 성립이 주는 의미가 있나.

“개별 소규모 가족이 생산 단위로 자립한 소농경제가 성립한 곳은 세계사적으로 많지 않다. 서유럽, 아시아에서는 일본·한국·중국 남부 정도다. 소규모 가족이 생산과 사회생활, 국가적 수치의 기본 단위가 되려면 높은 수준의 집약적 ‘소농농법’이 성립해야 하는데 쉽지 않다. 소농경제가 형성되기 위해서는 굉장히 면밀한 계획이 필요하고, 실천력, 상황 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적응력, 강인한 근로 규율 등이 필요하다. 이게 모여 한국 사회가 지닌 사회적 자본의 기초가 됐다. 역사적 발전 과정의 소산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전 교수는 ‘한국인들의 가족적, 사회적, 국가적 존재 형태가 4시대에 걸쳐 근대적 개인에 이르기까지 점진적으로 꾸준히 진화해 왔다’는 점을 밝히는 데 방점을 뒀다고 부연했다. 이 책은 ‘제42회 월봉저작상’ 수상작으로 선정됐다. 이 전 교수는 4월 14일에 상을 받는다.

―이번 책에서도 식민지근대화론을 강조했다. ‘일본의 한반도 지배는 근대문명의 이식 과정’이었다고 밝힌 데 대해 과거부터 비판의 목소리가 있었는데.

“한국인들이 아직도 민족주의적 감정에 묻혀 있어서 그런 것이다. 역사는 결코 한 민족 단위나 문화 단위로 고립적으로 발전하지 않는다. 기원전 3세기에 북한 지역에 한 사원이 설치됐고 앞서 기원전 4세기에는 요동·요서 지역의 청동기 문화가 고조선과 함께 한반도에 유입됐다. 이게 한반도에 퍼져 기원후 2∼3세기까지 국가라는 하나의 정치체제, 조직을 만들었다. 13세기경 몽골 지배는 한국 문명사에 큰 변화와 발전을 불러왔다. 이전과는 다르게 문명 수준이 높아졌다. 성리학적 세계관이나 국가관이 유입됐고 조선왕조 창건의 토대가 됐다. 조선왕조의 성립 자체도 한반도만의 것으로는 설명하기 어렵다는 의미다. 유교 자체가 외래 문명이다. 19세기 개항 이후 140∼150년간은 서양에서 발생한 근대 문명이 선교사, 일제, 미국 등을 통해 유입되는 과정을 거쳤다. 크고 넓은 역사적 시각을 지녀야 한다. 근대 문명의 본질은 ‘사적 자치의 주체’(민법 용어)로서의 개인의 성립이다. 신체의 자유와 재산권의 주체로서 개인이 성립하고 사회 경제적 기초 단위가 되는 게 근대 문명이다. ”

―19세기까지만 해도 민족 개념이 없었다고 보는지.

“그렇게 보는 게 바르다고 생각한다. 민족이란 말 자체가 20세기 들어서 일본으로부터 수입됐다. 1907년에 최초로 ‘황성신문’에서 민족이라는 표현이 등장했고 3·1운동 때에야 보편화했다. 민족은 외래어 사전에 있었다. 조선의 양반들은 ‘중화 세계의 젠틀맨’으로 자신들을 인식했다. 하층민들과 완전히 다른 존재로 처신했다. 중국의 천자가 있고, 조선의 왕(제후)이 있고 그 아래 양반이 있다고 생각했다. 조선, 반도의 사람들만이 운명 공동체라거나 민족이라는 인식은 없었다고 본다.”

―고려는 474년, 조선은 518년간 통치했다. 단일 왕조의 영속성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한국사회는 자연적, 인종적 조건에서 굉장히 동질적인 사회다. 이민족이 거의 없다. 다양한 이민족이 섞여 살면 사회적 긴장이 높아지고 마찰이 강해진다. 고려나 조선왕조의 통치 능력이 특별해서라기보다는 이런 조건 때문에 중앙집권성이 아주 강력하게 작용해서 장기 존속할 수 있었다. 게르만족의 이동 같은 큰 도전이나 이민족에게 정복당한 후 원래 왕조가 사라졌다거나 문화를 말살당한 경험도 없다. 이 덕분에 중앙집권이 오래 유지됐다.”

―조선의 패망과 일본의 침략, 과정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나.

“당시는 일국 쟁패, 약육강식의 제국주의 시대다. 자신을 지킬 수 없는 민족은 소멸했다. 조선 왕조는 자신을 방어할 의지나 군사력, 국제감각이 없었다. 갑오경장(1894∼1896)때 고종은 인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법을 만들겠다고 했지만 지키지 않았다. 신분제도를 철폐하고 양반 특혜를 없애고 국민 군대를 조직하고 죽기 살기 식으로 일본, 러시아와 전쟁을 했으면 한반도처럼 규모가 큰 나라가 식민지가 됐을 리 없다. 국왕의 권력을 입헌제로 바꾸고 인민의 재산, 생명을 함부로 뺏을 수 없게 하는 등의 개혁을 해야 하는데 고종은 이를 거부했다. 중국이 망하자 러시아와 일본이 한반도를 두고 각축을 벌였는데 일본 입장에서 조선은 조만간 러시아의 식민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고, 포기할 수 없는 일본의 전략적 요충지로 간주했기 때문에 러시아와 전쟁을 벌였다. 미국, 영국 등의 국제사회는 전쟁 후 그 전리품으로서 한반도를 일본에 넘겼다.”

이 전 교수의 설명은 침략은 정당화될 수 없겠지만, 내부의 문제도 결코 도외시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로 들렸다. 당시 조선 왕조는 개혁은커녕 나중에는 오히려 탄압했다.

이 전 교수는 “농민 일부는 일본과의 병합에 오히려 찬성하는 경우도 있었다”며 “재판 없이 사람을 죽이고 억압하는 왕조보다, 일본이 낫다는 생각마저 하게 된 것인데 이게 숨길 수 없는 우리 역사의 비극이고 모순”이라고 했다.

―토지 수탈 같은 문제는 어떻게 보나.

“내가 욕을 많이 먹지만 일관되게 주장하는 게 있다. 일제는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토지를 그냥 수탈한 적이 없다. 교과서에서는 일제가 전 국토의 40%를 토지조사를 통해 수탈했다고 쓰여 있는데 이걸 사실이 아니라고 했더니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결국 이 기술(記述)은 교과서에서 사라졌다. 1967년부터 40년 가까이 없는 사실로 국민을 교육해 온 셈이다. 토지의 40%를 빼앗아 국유지로 삼았다거나 쌀의 50%를 실어 날랐다는 건 사실이 아니다. 군산항에 있는 야적시설이나 창고 등은 수출기구다. 일본에서 쌀값이 조선 평균보다도 30% 높기 때문에 일본으로 쌀을 수출한 것이다. 일본으로 수출된 쌀의 절반가량은 일본인 지주들이 수출했다. 시장경제 체제가 작동하고 있다는 이해가 없어서 총독부가 수탈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렇게 40여 년간 가르치다 보니까 한국인들은 그 시대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고 수탈의 기억만 잔뜩 쌓였다.”

―왜 그렇게 가르치게 됐다고 보나.

“일제를 극복하면서 태동한 역사학이 민족성을 개입시킨 담론과 해석을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196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를 거치면서 수탈론은 점점 강화됐다. 한 시대의 역사학이 민족주의 역사학으로 완전히 경도됐다. 그래서 그 시대를 냉정하게 객관적, 과학적으로 평가하지 못한다. 단순히 그 시대를 ‘야만의 시대’ ‘노예’ 상태로만 기억하는 것은 잘못됐다. 그 시대에 한국인들은 근대적 사적 주체로서, 개인으로서 성립했다. 모든 문명의 진보는 전통 문명과 외래 문명의 충돌을 통해서 발전해 왔고 20세기는 우리에게 그런 역사였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물론 일제에 의해 이식된 근대는 완전한 근대가 아니었다. 사적 주체로서 여러 권리는 인정됐지만, 정치적 권리는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게 식민지적 특질이다. 해방 이후 미국을 통해서 근대화, 제2의 물결이 불었을 때 한국인들은 정치적 자유까지도 향유하는 진정한 의미의 사적 자치의 주체로 성립됐다. 크나큰 문명사적 전환에 속한다.”

이 전 교수는 이 부문에서 자신의 학문적 접근, 결과를 놓고 일제 통치를 미화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에 대해 ‘애석함’을 표출했다. 반일감정에만 사로잡혀 역사 자체를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고, 일본에 의해 근대 문명이 이식됐다는 내용 하나만 갖고 일제를 미화한다고 (자신의 학문적 접근, 시각, 연구 결과를) 곡해하고 있다고 반박했다. 자신의 역사관이 삐뚤어졌다고 하는 데 대해서도 민족주의, 민중주의에 기운 편협한 평가라고 지적했다. 근대 문명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고 역사 발전의 복잡성, 모순성을 이해하는 절차가 생략된 데서 비롯된 것으로 분석했다. 외래 문명의 충격이 없고 외부의 영향이 배제된 역사는 정체하거나 소멸하고 발전을 기대할 수 없는데, 우리나라의 경우 일제, 미국 문명의 형태로 발현된 엄정한 사실을 외면하고 단순히 빼앗기고 얻어맞은 것으로만 인식하면 결국 선진화의 길은 요원하다고 했다.

그는 “책에도 썼지만, 일본의 민법을 조선에서도 시행한다는 조선민사령이 1912년에 나왔는데 민법이 성립하면 이를 근대사회로 부른다”고 했다. 일본이 한국에 민법을 시행한 것이 한국인을 위한 것은 아니며 한국 지배를 위한 것이지만 한국 근대사회 성립의 가장 중요한 지점임은 분명하다고 했다. 제도를 통해, 임금을 주고 노동력과 자원을 활용하고 형식적이지만 사적 주체의 권리를 인정해 효과적으로 지배했다는 게 핵심이라고 했다. 화제를 이의 연장선상이기도 하지만 해방 이후, 현대로 돌렸다.

―1948년 대한민국 건국의 의미를 어떻게 보고 있나.

“대한민국의 성립은 근대 문명을 수용하고, 근대화의 제2의 물결로서 인간을 ‘정치적 자유인’으로 만드는 크나큰 변혁에 속한다. 대한민국 성립 당시 일본이 만든, 총독부가 시행하던 민법을 번역한 수준을 그대로 받아썼다. 부끄럽지만 이것을 직시해야 한다. 반면에 북한은 경제적, 사회적 근대화의 모든 법과 제도를 폐기해버렸다. 그 결과 ‘조선 왕조’로 회귀해 버렸고 문명의 막다른 골목에 처했다. 나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역사를 냉철하게 보면 이것이 사실이다. ‘38선 이북’은 공산주의자들이 통치하는 체제로 인간의 사적 자치의 주체로서 개인의 권리를 부정한다. 따라서 한국이 완전한 근대 국민국가로서 역사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북한 동포도 자유로운 개인으로 설 수 있게 해야 한다. 이 범주를 빼고 서로 다른 정치체제를 인정하는 선에서 연방적으로 통일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환상에 불과하다.”

―정치적 혼란, 저성장은 왜 파생했다고 보는지.

“지금 상황은 한마디로 갈등의 시대다. 고도 성장기에는 정부와 기업과 종업원이 협력했다. 고도성장은 운이 좋거나 제도가 좋기만 해서 되는 게 아니다. ‘국가적 혁신 체제’가 잘 작동한 결과다. 한 국가의 각 주체가 상호 유인의 동기를 갖고 강력한 협력 체제를 구축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결과다. 그런데 이러한 협력 체제가 붕괴했다. 민족주의, 민중주의 때문이다. 재벌, 대규모 기업 집단이라는 것은 한국만의 독특한 혁신 체제의 산물이다. 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마치 재벌이 특혜나 정경유착을 통해서 부정한 이득만을 취해왔다는 식의 근거 없는 민중주의적 슬로건이 정치를 지배하기 시작하고, 그 정치적 신념을 공유하는 집단이 정치권력을 장악하면서부터 기업을 규제하고 억압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정부와 기업이 상호 갈등적이며 기업을 억압한 매우 상징적인 사건이 바로 대우그룹의 해체라고 할 수 있다.”

―기업을 협력 파트너가 아닌 일방 제재 대상으로만 여긴다는 의미인데.

“기업인 처벌만 놓고 봐도 재산형으로 상각이 가능한 수준의 죄목을 갖고 구속 등 신체형을 가하고 있다. 기업 억압적인 정치환경에다, 기업과 종업원의 관계도 상호 유인적 협력체계가 무너졌다. 대기업과 공기업의 강성 노조는 그들만의 특권을 추구하는 노동집단을 만들었다. 중소기업 이하로 내려가면 종업원 입지가 불안해서 노조 조직률은 오히려 떨어지고 보호받을 수단이 없다. 이런 추세가 20여 년을 지속해왔다. 앞으로 이를 바꾸지 않으면 상대적인 고성장 시대도 절대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조기 대선이 임박했다. 지난 30년간 5년 단임의 대통령제가 반복됐는데 ‘공과’를 어떻게 보나.

“국가 경제의 지향점에 대한 비전이 없었다. 경제민주화가 과거 고도성장기의 비전, 슬로건을 지우고 난 다음에는 모든 경제정책이 ‘내부지향적’으로 돼버렸다. 1980년대 중·후반부터 무역수지가 흑자로 돌아서니 선진국에 도달한 것처럼 착각했다. 그런데 내부지향적 경제정책을 쓰는 국가치고 선진화된 국가가 없다. 고도성장기의 ‘외부지향적 정책’을 한 단계 끌어올려서 문화 자체의 국제화, 사회의 완전한 개방을 이뤄냄으로써 수출만으로는 달성할 수 없는 부분을 인적 교류와 자본 교류를 통해 메우고 동북아의 중심으로 자리매김하는 정책을 취했어야 한다. 그렇게 됐다면 청년 실업이 발생할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이제라도 수출 주도형 자립적 국가 경제 수립이라는 방향을 더욱 업그레이드해서 국제화된 사회로 한국 사회를 탈바꿈시킬 수 있게 종합적인 선진화 플랜을 추진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강력한 정치 리더십이 필요하다. 일본과의 불필요한 역사 분쟁도 현명한 선에서 종결하고, 협력 체제를 건전하게 복구해야 한다. 일본과 협력을 강화하면 중국에 대한 지렛대도 커진다. 우리는 세계 제2의 경제 대국과 제3의 경제 대국 중간에 있다. 일본은 세계 제1의 공업기술 국가다. 유리한 주변 조건을 활용하면 발전의 기회가 있다고 본다.”

―동북아 정세, 경제와 관련해 그야말로 꼬여 있는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 논란은 해법이 있을까.

“한국의 대북정책이 워낙 물러서 자충수를 둔 것이다. 지금이라도 입장을 명확하게 하고 일본과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노선을 확고히 해야 한다. 이게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중국이 (한국을) 눌러도 된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한국의 노선을 명확히 표명하면 오히려 중국으로부터 더 큰 협력을 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강인한 정치적 리더십이 부족해서 지금 같은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차기 정부가 출범하면 시급하게 풀어야 할 경제 현안은.

“하루빨리 일본과의 관계를 건전한 협력 체제로 복구하는 것이 중요하다. 대내적으로는 기업들과 건전한 협조 관계를 구축해야 한다. 특혜를 주라는 게 아니라, 기업들과 한국 경제의 미래 비전을 공유하는 정책 환경을 조성하라는 의미다. 모든 정책의 중심에 기업을 놓고 기업의 애로를 해결하고, 기업의 개발을 돕고 기업의 투자를 지원하는 방향으로 경제 정책을 친기업적으로 전환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고용 문제도 자연스럽게 해결된다. 차기 정부가 집권하면 ‘기업 누르기’가 더 강화될 것 같은데 그래서는 희망이 없다.”

이 전 교수는 대통령 파면 이후의 정국에 대해 무거운 화두를 던졌다. “단순한 정치적 위기가 아니며 대한민국의 근대 국민국가 건설 프로젝트 상에 심각한 위기가 발생한 것”이라고 규정했다. 모든 국가가 근대화 70년을 즈음해 위기를 겪곤 하는 전철을 밟고 있다고 했다. 정쟁 수준의 갈등이 탄핵으로 비화한 게 오랫동안 대한민국 민주 정치사에 큰 상처로 남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대한민국이 앞으로 많이 어려워질 것 같다. 그런데 그것이 역사의 상궤(常軌)라고 생각한다”며 “근대화, 선진화라는 것이 절대 녹록지 않고 이처럼 좌절을 겪는 것이 역사의 정상적인 형태임을 증명하고 있을 뿐”이라고 긴 여운을 남겼다.

인터뷰 = 이민종 부장(경제산업부) horizon@

정리 = 최재규 기자 jqnote91@munhwa.com jqnote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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