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 정치 슬로건 경쟁]시대를 바꾼 사람에겐 시대정신 녹여낸 '한 줄'이 있었다

김형규 기자 2017. 3. 17.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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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2016년 미국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슬로건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자”(왼쪽 사진), 러시아 혁명 당시 레닌이 내걸었던 “빵, 토지, 평화”(가운데), 1997년 한국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를 당선시킨 “준비된 대통령”. 민중의 요구와 후보의 정체성이 조화를 이룬 한 줄의 문장은 유권자의 마음을 움직인다.

선거를 통한 대의 민주주의가 일반화된 현대 사회에서 정치 슬로건은 더욱 중요해졌다. 각 캠프는 지지자를 결집시키고 반대자를 돌려세울 말 한마디를 찾기 위해 골몰한다. 단순히 그럴듯해 보이는 말로는 통하지 않는다. 슬로건은 동시대를 사는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어야 하며 동시에 후보의 정체성과도 조화를 이뤄야 한다. 법률가 출신이 ‘경제 대통령’을 자처하거나 전과가 있는 사람이 ‘깨끗한 지도자’를 강조하면 역효과가 난다.

선거 전략은 프레임을 만드는 것이고, 슬로건은 결국 이 프레임이 한 줄의 문장으로 외화된 것이다. 프레임이란 생각의 틀이다. 미국의 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가 저서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에서 지적한 것처럼 어느 한쪽이 특정 이슈를 선점해 프레임을 형성하고 나면 다른 쪽은 아무리 노력해도 끌려가는 모양새가 될 수밖에 없다.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놓고 싸움을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프레임 전략의 첫 번째는 선거의 성격 규정이다. 이번 선거는 어떤 선거이고 누구를 뽑아야 하는가. 이 질문의 답을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사람들에게 각인시킬 수 있다면 이미 반은 이긴 싸움이다.

1998년 여당인 한나라당 소속으로 경기도지사 선거에 나선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는 ‘대한민국 손학규’를 슬로건으로 내세웠다. ‘경기도를 위해 대통령과 맞설 수 있는 사람’이라고 선거 벽보에 써붙였다. 지역 살림을 책임질 지방자치단체장을 뽑는 선거에서 대한민국을 강조한 것부터 어색했다. 임기를 시작한 지 반년도 안된 대통령과 각을 세운다는 전략도 생뚱맞다는 지적이 나왔다. 4년 뒤 같은 선거에 나선 손 전 대표는 지역 일꾼 이미지를 강조하는 쪽으로 슬로건을 바꿨다. ‘경기도를 땀으로 흠뻑 적시겠습니다.’ 그는 재수에 성공했다.

두 번째 프레임 전략은 왜 나여야만 하는가, 그리고 상대방은 왜 아닌가를 설득하는 것이다. 2004년 재선에 도전한 미국 조지 부시 대통령은 민주당 존 케리 후보에게 오직 총사령관 이미지에서만 앞섰다. 현직 대통령으로 이라크 전쟁을 수행했기 때문이다. 그는 어딜 가나 “이번 대선은 테러와 맞서 싸울 것인가 굴복할 것인가를 선택하는 선거”라는 주장을 반복했고, 결국 상대를 ‘허약하고 부실한 후보’로 낙인찍음으로써 재선에 성공했다.

박성민 정치컨설팅그룹 민 대표는 “정치 슬로건은 구체적으로 인물과 비전, 이슈 등 어느 것을 강조할 것인지 전략에 따라 종류가 갈린다”면서 “상대적으로 우위를 점한 후보는 당연히 인물을 강조하는 전략을 택하고, 지지율이 엇비슷할 경우엔 비전으로 승부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사태가 한창이던 1997년 대선 때 김대중 후보가 내건 ‘준비된 대통령’이 좋은 사례다. 독자적인 경제론을 설파한 저서 <대중경제론>을 쓸 정도로 경제지식이 해박했던 김대중 후보는 국가부도 위기를 극복할 적임자라는 점을 강조해 역사적 정권교체를 이뤄냈다. 이 과정에서 대선 4수라는 부정적 이미지는 오히려 위기를 극복할 경륜으로 인식됐다. 준비된 대통령이라는 구호는 반대로 상대방은 준비가 안됐다는 의미까지 담아낸 촌철살인의 구호로 지금도 회자된다.

반면 2002년 대선 때 대통령 직무수행 능력 이미지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던 여당 후보 이회창의 슬로건은 실패한 전략이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당시 이회창은 ‘나라다운 나라’를, 야당 후보 노무현은 ‘새로운 대한민국’을 슬로건으로 발표했다. 박 대표는 “이 후보가 인물에 집중하는 대신 특징 없이 엇비슷한 비전을 내놔 강점을 살리지 못했다”고 분석했다. 상대적으로 열세인 후보는 특정 이슈를 부각하는 슬로건으로 관심을 모으기도 한다.

성공한 슬로건은 정치사에서 여러 차례 반복된다. 트럼프의 ‘위대한 미국의 재건’은 1980년 대선에서 이미 로널드 레이건이 써먹어 성공한 구호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케네디 대통령도 1960년 대선에서 ‘위대함의 시대’(A time for greatness)라는 비슷한 슬로건을 썼다. 2002년 대선 때 권영길 민주노동당 후보가 TV 토론에서 히트시킨 “국민 여러분 살림살이는 좀 나아지셨습니까?”란 말 역시 레이건이 현직 대통령인 지미 카터와의 대선 토론에서 사용한 말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2012년 대선 벽보에 쓴 ‘준비된 여성 대통령’은 15년 전 김대중 후보의 성공작을 차용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선거에서 패배한 문재인 후보가 내세운 ‘사람이 먼저다’라는 구호는 1992년 미국 대선에서 승리한 빌 클린턴의 ‘사람을 앞에 둔다’(Putting People First)와 의미가 통한다.

정치권에서 슬로건 경쟁이 요즘처럼 치열해진 것은 군부독재가 끝나고 대통령 직선제가 실시된 1987년 13대 대선 이후부터로 본다. 특히 두 번 연속 정권을 뺏긴 보수 쪽이 절치부심하며 홍보 전문가를 대거 영입한 2007년 대선부턴 주요 캠프들마다 경쟁적으로 대규모 물량을 투입해 슬로건과 대통령 이미지(PI) 등 전체적인 메시지 전략을 관리하고 있다.

슬로건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는다. 밑바닥 민심을 파악하기 위한 집단심층면접(FGI) 조사와 시뮬레이션 워크숍 등 과학적 방법이 먼저 동원된다. 여론 수렴을 통해 대략의 시대정신이 포착됐다면 여기에 후보가 추구하는 핵심 가치와 비전 등이 결합된다. 철학과 정책을 녹여 슬로건을 구체화하는 작업엔 캠프의 전략·홍보 담당자는 물론 카피라이터와 광고 전문가, 디자이너, PD, 시인 등 다양한 전문인력이 머리를 맞댄다. 여기서 몇 가지 안이 추려지면 후보가 최종적으로 슬로건을 선택하게 된다.

후보가 슬로건을 최종 결정하는 건 그가 선거의 주인공이자 총책임자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선거기간 유권자들을 가장 가까이에서 만나며 현장 분위기를 체화하는 당사자라는 이유도 있다. 연설과 유세, 간담회 등 각종 행사를 거듭하며 후보는 어떤 발언에 청중이 반응하는지, 같은 내용이라도 표현을 어떻게 바꾸는지에 따라 반응이 달라지는지 체감하게 된다.2012년 대선 당시 손학규 캠프가 히트시킨 슬로건 ‘저녁이 있는 삶’도 그렇게 나왔다. 메시지 담당 비서관이 처음 제안한 이 문구가 별로라고 생각해 실제 연설에서 읽지 않았던 손 전 대표는 비슷한 내용의 국회 교섭단체 대표 연설이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자 다음번 라디오방송부터 ‘저녁이 있는 삶’을 강조했다. 직장인 등 젊은 유권자들에게 큰 인기를 끌면서 후에 노래로도 만들어지고 손 전 대표의 저서 제목으로도 활용됐다.

이 슬로건을 만드는 데 일조한 손낙구 보좌관은 “민주노총 시절 ‘주 40시간 노동’을 ‘주 5일 근무제’로 표현을 바꾸자 분위기가 확 달라지는 걸 보면서 슬로건의 중요성을 깨달았다”며 “평소 쌓인 정책에 대한 고민이 쉬운 언어로 일반 국민들에게 다가갔을 때 기대 이상의 소통이 이뤄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좋은 슬로건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을 하기는 쉽지 않다. ‘저녁이 있는 삶’만 해도 연예인과 유행어만 기억나고 제품은 기억하지 못하는 상업광고처럼 후보를 당선시키는 덴 실패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내 꿈이 이뤄지는 나라’를 슬로건으로 내세웠지만 결국 4년 만에 그 꿈이 실제론 자신과 비선 실세 최순실만의 것이었다는 사실만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실각했다. 슬로건의 성공 조건은 다양하지만 결국 가장 중요한 건 구호를 현실로 바꿀 정치인의 능력이다. 그런 후보를 잘 골라내는 것도 유권자의 몫이다. 그게 정치권의 슬로건 전쟁을 허망한 ‘말잔치’가 아니라 준엄한 국민 앞의 약속으로 바꿔내는 길이다.

■잘된 슬로건은 ‘아류’를 낳는다

2012년 대선 당시 박근혜 전 대통령은 1997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성공작인 “준비된 대통령”을 차용해 “준비된 여성 대통령”(왼쪽)이란 슬로건을 내걸었다.
트럼프의 슬로건은 1980년 미국 대선에서 이미 로널드 레이건이 써먹었던 구호(가운데)다. 레이건의 슬로건 역시 더 거슬러 올라가면 로버트 케네디 대통령이 1960년 대선에서 사용했던 “위대함의 시대”(오른쪽)의 아류작이다.
▶정치광고, 열이면 열 이겨야 하는 싸움…총선 땐 ‘떴다방 광고기획사’ 생기기도>>카피라이터 정철이 말하는 슬로건의 세계
카피라이터 정철(56·사진)은 ‘문재인의 카피라이터’로 불린다. 2012년 총선과 대선에서 문재인 캠프가 사용한 ‘바람이 다르다’ ‘사람이 먼저다’ 등 슬로건을 만들었다. 2010년 서울시장 선거 당시 민주당 한명숙 후보의 슬로건 ‘사람특별시’도 그의 작품이다. 상업광고 카피라이터 30년 경력을 살려 정치광고 분야에서도 이름을 날리고 있는 그에게 정치 슬로건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해 물었다. - 정치광고와 상업광고는 어떻게 다른가. “접근 방식은 다르지 않다. 상품이 정치인이고 소비자가 유권자다. 다만 상업광고는 10개 중 3개만 성공해도 잘했다고 하는데, 정치광고는 그렇게 하면 망한다. 무조건 이겨야 하는 싸움이니까. 리스크가 큰 만큼 결과가 좋았을 때 보람도 크다.” - 선거철은 카피라이터들에게도 대목인가. “정치광고는 여야가 분명하고 진영 간 부딪침이 첨예한 영역이라 일반 광고대행사에서 어느 한쪽을 섣불리 맡기 어렵다. 총선이나 지방선거 때는 ‘떴다방’처럼 생기는 정치광고 기획사들도 있지만, 대선은 오히려 후보 숫자가 적어서 그렇진 않다.” - 카피라이터의 역할은 무엇인가. “10년 전만 해도 정치인이나 보좌관이 직접 슬로건을 써서 패턴이 엇비슷했다. 그런데 전문가들이 캠프에 결합하면서 말을 거는 방법이 달라졌다. 예전 같으면 ‘소득주도 성장’같이 했을 표현을 ‘지갑이 뚱뚱해지는 성장’처럼 쉽게 귀에 들어오고 그림이 그려지는 말로 바꾸는 것이 카피라이터가 하는 일이다.” - 아무래도 정치인들과는 감각이 다를 텐데. “‘광고쟁이’들은 본능적으로 도발적인 카피를 좋아한다. 그런 전략이 공격적인 모험을 해야 하는 후발주자라면 괜찮은데, 실수를 줄여야 하는 선두주자에게는 맞지 않을 수 있다. 정무 감각 있는 사람들이 위험하다고 하면 우리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 선거 전략에서 슬로건은 얼마나 중요한 위치인가. “메인 슬로건이 결정되면 그다음 모든 커뮤니케이션 활동은 그 슬로건을 ‘스타’로 만들기 위한 지원 과정이라고 보면 된다.” - 문재인 전 대표가 부산 총선에 출마했을 때 함께 부산에서 100일가량 숙식하며 작업하기도 했다고. “가장 많은 사람을 만나고 가장 많은 고민을 하는 건 결국 후보다. 후보와 지근거리에서 호흡해야 밀착된 메시지를 만들 수 있다.”

<김형규 기자 fideli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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