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의 공간>아픔과 좌절 속에서도 별을 노래하던.. '영원한 청년'의 거리

기자 2017. 2. 10.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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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세워진 연세대 핀슨홀은 윤동주가 생활하던 공간이다. 지금은 법인사무처와 윤동주기념관 등으로 운영되고 있다. 핀슨홀 아래쪽에는 윤동주의 대표작 ‘서시’ 시비가 자리 잡고 있다.
서울 종로구 창의문로 119번지의 수도가압장과 물탱크를 개조해서 조성한 윤동주문학관.

(66) 윤동주 ‘서시’의 서울 서대문구·종로구 일대

윤동주의 만 27년 2개월에 불과한 짧은 생애 중 연희전문학교에서 보낸 약 4년의 세월은 참으로 자유롭고 빛나는 별처럼 찬연하다. 그의 일생에서 이 시기가 없다면, 아예 ‘시인 윤동주’는 존재할 수 없다고 단언할 만하다. 윤동주는 학업에 충실하였고 최현배, 손진태와 이양하 등 당대의 뛰어난 스승들의 가르침을 받으며 민족의식과 우리말에 대한 자부심 그리고 문학에 대한 꿈을 한껏 키우게 된다. 평생의 벗들도 그곳에서 만났다. 생전에 시인으로 알려지지 않았던 윤동주가 오늘날 우리의 대표적인 시인으로 자리를 잡을 수 있게 된 것도 그들 덕분이다. 무엇보다도 어린 시절부터 천직이라 여겼던 시인으로서 창작에 전념할 수 있었으니, 한마디로 윤동주의 본격적인 시작활동은 연희전문 시절로부터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윤동주는 1938년 4월 9일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한다. 입학과 동시에 기숙사 생활을 했으니, 3층 지붕 밑 ‘천장이 낮은 다락방’을 배당받아서 고종사촌 송몽규 그리고 강처중과 함께 한방을 쓰면서 학창 생활을 시작한다. 윤동주는 산문 ‘종시(終始)’에서 그때의 기숙사 분위기를 “일찍이 서산대사가 살았을 듯한 우거진 송림 속, 게다가 덩그러니 살림집은 외따로 한 채뿐이었으나, 식구로는 굉장한 것이어서 한 지붕 밑에서 팔도 사투리를 죄다 들을 만큼 모아놓은 미끈한 장정들만이 욱실욱실하였다. 이곳에 법령은 없었으나 여인 금납구(禁納區)였다”라고 묘사했다.

당시의 기숙사 건물이 바로 연세대 교정 서쪽 편 낮은 동산에 자리를 잡은 ‘핀슨홀(Pinson Hall)’이다. 1922년 지어진 유서 깊은 이 벽돌 건물은 아담하고 간결한 전형적인 영국식 건물의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현재는 법인사무처로 사용되고 있지만, 2층에 시인의 그 시절 흔적을 모아놓은 아담한 ‘윤동주기념실’이 있다. 윤동주기념사업회는 앞으로 이 기념실을 확장할 계획이 있고 조만간 시인이 생활하던 3층 공간도 개방한다고 하니, 벌써 그 기대감이 크다.

건물 앞쪽 아래에는 윤동주 시비가 있다. 1968년 세운 이 시비에는 윤동주의 가장 유명한 시 ‘서시(序詩)’가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시인의 생애가 간략히 언급돼 있다. 시비 앞에 있는 돌 향로는 제 역할을 잊고 늘 누군가 갖다 놓은 꽃다발을 꽂는 화병으로 사용된다. ‘서시’는, 더 엄밀히 말하자면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서 서시의 역할을 하는 ‘무제시(無題詩)’지만, ‘또 다른 고향’과 ‘길’ 그리고 ‘별 헤는 밤’과 ‘간(肝)’ 등과 같은 시와 더불어 연희전문 시절의 마지막 무렵에 쓰였다(1941년 9월과 11월).

윤동주가 입학 후 처음으로 쓴 시는 ‘새로운 길’이다(1938년 5월 10일). 졸업 즈음에 완성한 비슷한 제목의 시 ‘길’에 비하면 그 깊이 면에서 다소 소박한 작품이지만, 이제 막 새로운 생활에 접어든 청년의 희망과 들뜸을 느낄 수 있다.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내일도….”

‘새로운 길’의 시비는 연희동 ‘안산(鞍山)공원’에 있다. 서대문구청에서 연복중학교 뒤쪽으로 약간 가파른 오르막길을 따라가면 ‘안산 자락길’이 나오고, 그 초입의 ‘만남의 장소’ 옆 이정표 사이에 큼지막한 자연석으로 만든 시비가 있다. “윤동주는 교실과 서재와는 구별이 없는 친구다. 그는 교실과 하숙방, 그리고 생활 전부가 모두 창작의 산실이었다”는 친구 유영의 증언(‘연희전문 시절의 윤동주’)이나 “연희 숲을 누비고 서강 들을 꿰뚫는 두어 시간 산책을 즐기고야 돌아오곤 했다”는 정병욱의 회고(‘잊지 못할 윤동주’) 등을 고려하면, 이 시비가 이곳에 있을 이유는 많다. 연세대 후문에서 이곳까지는 그리 멀지 않다.

시인의 아우인 윤일주가 작성한 ‘윤동주 연보’에는 윤동주가 연희전문 입학 이후 3년 동안 기숙사에서 생활한 것으로 되어있지만, 사실은 이와 좀 다르다. 윤동주는 2학년 때인 1939년 기숙사를 나와 신촌, 북아현동과 서소문 등에서 하숙생활을 했고, 3학년 때 다시 기숙사로 돌아갔다. 하숙집으로 이 지역을 선택한 것은 물론 통학의 편리함 때문이었다. 윤동주의 흔적은 아무 곳에도 남아있지 않다. 윤동주가 1939년 9월에 쓴 시 ‘자화상’에 나오는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는” 우물이 있었을지도 모를 하숙집터(합동 27-1번지)에는 이제 서울시 상수도사업본부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7, 8명의 하숙생이 들끓는 전문적인” 북아현동의 하숙집은 그 위치조차 알 수 없다. 자주 찾아갔다던 사촌 송몽규의 하숙집(북아현동 340번지)은 물론이거니와, 그 무렵 윤동주가 라사행과 함께 찾아갔다던 시인 정지용의 집(북아현동 1-64번지), 당대의 숱한 문인이 수시로 드나들었다는 ‘북아현동 기와집’ 터에도 지금은 다른 건물이 들어서 있다.

윤동주는 4학년 때인 1941년에는 이사를 많이 했다. 연초에 두 달쯤 신촌에서 하숙하다가 다시 기숙사로 돌아갔지만, 5월 초에 다시 정병욱과 함께 기숙사를 아예 나오게 된다. 정병욱은 이때 기숙사를 나온 이유에 대해 태평양 전쟁 발발 이후 일본의 혹독한 식량정책 때문에 기숙사의 식탁이 날이 갈수록 조잡해졌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기숙사를 떠나기로 작정을 했다”고 한다. 먼저 ‘누상동 마루터기 하숙집’에서 한 달을 보낸 후, 5월 그믐쯤부터 종로구 ‘누상동 9번지’ 소설가 김송의 집에서 하숙생활을 시작한다. 정병욱도 이 집에 대해 “오붓하고 가족적인 분위기에서” 가장 알차고 보람된 하숙생활을 하였다고 회상한다. 실제로 그곳에서 보낸 시간은 비록 3개월에 불과하고, 김송이 일제의 요시찰 대상으로 감시받고 있었지만, 윤동주는 이 집에서 어느 때보다 편안한 마음으로 시작에 전념하여 ‘또 태초의 아침’ ‘십자가’ ‘눈 감고 가다’ ‘돌아와 보는 밤’ 그리고 ‘바람이 불어’ 등 무려 9편의 시들을 쏟아낸다.

김송의 집터(현재는 옥인길 57)에는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 있고, 다만 이곳을 기념하는 ‘안내판’이 대문 옆 왼쪽 담벼락에 붙어있다. 제일 위쪽에 놓여있는 태극기 동판은 볼수록 새삼스럽다. 지난해 이준익 감독의 영화 ‘동주’가 상영된 이후, 서촌 일대를 방문하며 애써 이 끝까지 찾아오는 사람들이 부쩍 늘어났기 때문인지, 멀리서도 쉽게 찾을 수 있도록 아예 옆 벽에 ‘윤동주 하숙집’이라고 큼지막하게 쓰인 벽보도 고맙게 붙여놓아 이젠 어려움은 없다. 담벼락 위에 나란히 거꾸로 펼쳐 놓은 고운 빛깔의 우산 네 개가 얼마 전 내린 하얀 눈을 한껏 품고 있다. 약간 비탈진 골목길 너머 저 멀리 인왕산의 큼직한 바위들이 시원스레 한눈에 들어온다.

1941년 9월 북아현동 ‘전문적인 하숙집’으로 이사한 윤동주는 연희전문 졸업 기념으로 자선 시집을 내려고 계획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11월 20일 완성한 ‘서시’까지, 연희전문 시절에 쓴 19편 시들을 묶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을 붙이고 손수 제본해서 세 부를 만든다. 후배 정병욱이 받은 친필 시고집(詩稿集)만이 홀로 살아남아 마침내 1948년 1월 30일 윤동주의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되는 기적 같은 이야기도 바로 이곳에서 시작된다.

‘윤동주 문학관’은 뜻밖에 바로 이웃한 청운동 자하문 고개 근처에 있다(종로구 창의문로 119). 과거 인왕산 자락에 용도 폐기되어 버려져 있던 수도가압장과 2개의 물탱크를 개조해서 2012년에 조성한 것이다. ‘윤동주 시인을 닮은 비움의 공간’을 만들려고 했다는 것이 건축가의 의도라고 한다. 애써 그 뜻을 헤아려 이해해 보자고 노력은 해보지만, 그 전시 내용의 미흡함은 별개의 문제이며 ‘영혼의 가압장’ 같은 주장은 너무 주관적이다. 다만 ‘열린 우물’이라 이름 붙인 중정(中庭) 공간에서 바라본 하늘과 팥배나무 가지들, 사방 벽에 깊게 새겨진 물의 흔적은 그 강렬한 인상으로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듯하다. ‘닫힌 우물’에서는 윤동주의 생애와 작품 세계를 담은 영상을 수시로 볼 수 있다.

문학관 왼쪽 나무 계단을 조금 오르면 ‘윤동주 시인의 언덕’을 알리는 표지석과 ‘서시’가 새겨진 시비가 있다. 이 시비는 특이하게 비음(碑陰)에도 또 다른 시 ‘슬픈 족속(族屬)’을 새겨놓았다. ‘시인의 언덕’에서 성곽 너머로 바라보는 북악산과 서울의 전경은 그만이다.

2017년은 시인 윤동주의 탄생 100주년을 맞는 해이다. 시인의 기일(忌日)인 2월 16일 추모식을 시작으로 탄생일인 12월 30일까지, 한 해 내내 국내외에서 윤동주를 기리는 정례행사와 더불어 음악회, 학술대회, 전시회 같은 특별 행사들이 다채롭게 예정되어 있다고 한다. 개인적 욕심이지만, 2013년 2월에 잠시 전시되었던, 연세대 도서관이 소장한 윤동주의 육필 원고와 유품 그리고 도서들을 다시 만날 수 있는 기쁨을 간절히 바라본다. 물론 소장품의 훼손 위험 등의 이유로 일단 유보 상태라는 소식만 들려오고, 무엇보다 그것들은 영원히 윤동주의 시 정신을 기릴 우리 미래 세대에게 남겨줄 몫이니, 응당 그래야 한다고는 생각하면서도 어쩐지 그 기대감의 끈을 놓아버리기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무엇보다 이 특별한 해를 계기로 다들 윤동주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다시금 펼쳐볼 수 있었으면 한다. 특히나, 시인의 시대와는 물론 그 결이야 사뭇 다르지만, 또 다른 아픔과 좌절 속에서 지금 ‘괴로워’하며 혼란스럽게 방황하는 우리 젊은 세대에게 윤동주의 시는 늘 그랬듯이 따듯한 위로와 격려가 될 수 있으리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다짐하며, 민족과 시대의 모진 어려움을 온몸으로 품어가며 철저하게 내면화하여, 진실한 자기성찰을 바탕으로 순수하고 참다운 인간의 본성을 곱고 서정적인 우리말로 되새겨냄으로써, 마침내 그 아픔과 좌절마저도 어둠이 짙을수록 더욱 빛나는 별처럼, 찬란한 시(詩)들로 승화하여 노래한 윤동주. 이 ‘영원한 청년의 시’마저 없었다면, 아마도 지금 우리네 마음은 훨씬 더 가난하리라.

글·사진 = 박광수 문학저술가·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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