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포르쉐, 미니, 롤스로이스. 이들에겐 공통점이 하나 있다. 클래식 디자인이다. 신 모델을 출시해도 구형의 표정을 크게 바꾸지 않는다. 그래서 우스갯소리로 “포르쉐 911 디자이너는 놀면서 일하는 직업이다”라는 말도 있다. 하지만 큰 변화 없이 나날이 늘어가는 규제에 대응하는 게 훨씬 어렵다.
세상에서 가장 럭셔리한 브랜드 롤스로이스도 마찬가지다. 파르테논 신전을 형상화한 그릴과 네모난 눈매, 근엄한 실루엣 등 특유의 DNA를 강조한다. 그런데, 이들에게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는 남자가 등장했다. 바로 롤스로이스 디자인 총괄, 자일스 테일러(giles taylor)다. 2011년 재규어에서 건너와 롤스로이스에 합류했고, 2012년 7월부터 총괄 자리에 앉았다.

새 직장에서 가장 먼저 맡은 프로젝트는 2도어 쿠페 레이스(Wraith)다. 테일러의 전임자 이안 카메론(Ian Cameron)이 어느 정도 틀을 잡아놓은 상태였다. 미완의 쿠페를 완성하는 게 첫 번째 목표였다. 레이스는 롤스로이스의 영토 확장을 위한 첨병이자 테일러에게도 의미 있는 도전이었다.
결과물은 대성공이었다. 레이스는 롤스로이스가 품은 보수적인 색채를 벗어던졌다. 가령, 그릴의 크기를 줄이고 램프의 가장자리를 둥글게 매만졌다. 또한, 루프라인을 패스트백처럼 매끈하게 빚어 젊은 고객의 취향을 정 조준했다. 뿐만 아니라 고스트보다 휠베이스를 183㎜ 줄이고 V12 6.6L 가솔린 트윈 터보 심장을 품으면서 날렵한 달리기 성능까지 챙겼다.



매력적인 실루엣은 테일러의 전작에서도 드러난다. 14년 동안 재규어에 있으면서 XK 쿠페와 컨버터블, XJ를 빚었다. 직선보단 주로 곡선을 써서 풍만한 양감을 만드는 게 그의 장점이다. 특히 XJ는 대형 세단이면서 쿠페처럼 날렵한 겉모습으로 탈바꿈했다. 이와 같은 디자인이 권위적인 롤스로이스와 만나면서 시너지를 냈다.

테일러가 빚은 두 번째 작품은 던(Dawn)이다. 던은 새벽, 동이 틀 무렵을 뜻한다. 영혼, 유령으로 이름 짓는 여느 롤스로이스의 어두운 느낌과 사뭇 다르다. 긍정적이고 캐주얼하다. 1950년부터 1954년까지 단 28대만 생산된 ‘실버 던’을 밑바탕 삼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모델이다. 언뜻 레이스와 비슷해 보이지만, 외관 패널의 80% 이상을 다시 빚었다.

컨버터블이지만 지붕을 닫았을 때도 멋스럽다. 도어와 트렁크를 가로지르는 ‘스웨이지 라인’은 우아하면서 속도감이 물씬하다. 또한, 꽁무니로 갈수록 윈도우 벨트라인이 높다. 마치 근사한 재킷의 칼라처럼 뒷좌석을 완벽하게 감싼다. 롤스로이스는 “레이스가 꽉 맸던 넥타이를 풀었다면, 던은 넥타이를 잊었다”고 설명한다.

디자이너의 의도대로 ‘세상에서 가장 조용한 컨버터블’을 만들기 위해 소프트 탑 제작에 심혈을 기울였다. 가령, 지붕의 천을 총 6겹으로 빚었다. 천장을 열고 닫을 때 생기는 모터의 소음을 크게 줄였다. 그래서 롤스로이스는 지붕을 여는 과정을 ‘침묵의 발레(Silent Ballet)’라고 부른다. 또한, 속살엔 최상급 가죽과 롤스로이스 장인의 최신 목조 기술로 빚은 ‘캐나들(Canadel)’ 패널을 심었다. 자칫 느끼할 수 있는 소재와 질감은 크롬으로 균형을 맞췄다.

한편, 테일러는 세 번째 작품을 준비하고 있다. 장르는 SUV. 구체적인 정보는 베일에 싸였지만, 벤틀리 벤테이가, 마세라티 르반떼, 랜드로버 레인지로버 등과 경쟁할 최고급 SUV가 될 전망이다. 이제 레인지로버 앞에 붙은 ‘사막의 롤스로이스’ 수식어는 시한부를 선고받은 셈이다. 과연 현대적 롤스로이스는 어떤 형태로 흘러갈지, 앞으로의 변화가 궁금하다.
글 강준기 기자(joonkik89@gmail.com)
사진 롤스로이스, 재규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