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읽는 경제이야기] (38) 사라지는 세탁소, 영혼의 얼룩도 지우던 곳


동네에서 가장 부지런한 점포 세탁소

제가 태어나고 고등학교까지 살았던 동네도 버스에서 내려 한참을 올라가야 하는 달동네였습니다. 그곳에도 허름한 세탁소가 있었지요. 도대체 세탁소 아저씨와 아주머니는 언제 잠자리에 들고 언제 일어나시는 걸까요? 허겁지겁 등교할 때도, 실컷 놀고 집으로 돌아오던 한밤중에도 세탁소에는 희미한 형광등이 켜져 있었습니다. 달동네 세탁소는 아귀가 잘 맞지 않아 삐걱대는 미닫이문이었고, 유리창에는 세탁소라는 글씨가 큼지막했습니다.

양복과 원피스 외투와 군복… 온갖 옷들이 비닐을 뒤집어쓰고 천장에 빼곡히 매달려 있었고 산더미처럼 쌓인 세탁물에 발 디디기도 마땅치 않은 비좁은 곳에서는 시인의 묘사처럼 오래된 다리미가 연신 증기기관차처럼 흰 스팀을 뿜어냈습니다. 어수선한 구석 한 귀퉁이 선반에는 두툼한 건전지를 등에 짊어진 트랜지스터 라디오가 고무줄에 꽁꽁 묶인 채 온갖 노래를 토해내고 있었습니다.
어쩌다 어머니 심부름으로 세탁소에서 아버지 양복이나 어머니 정장을 찾아올 때면 말끔해진 옷들이 뿜어내는 휘발유 냄새가 저는 그렇게 좋을 수 없었습니다. 세상 구석구석에서 묻어온 온갖 때와 얼룩을 말끔히 털어낸 옷을 보고 있노라면 기분도 좋아지고, 예리한 주름을 잡은 바지를 보고 있자면 정말 제 마음도 쭈욱 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온갖 때가 묻은 세탁물을 그야말로 환골탈태 시키려면 세탁소 주인은 얼마나 많은 시간과 품을 들여야 할까요? 두 팔 벌리기도 힘든 비좁은 공간. 특히 여름날에는 한증막 같은 더위에 땀을 한 됫박은 쏟아내야 했으니 세탁은 고된 노동이었습니다. 그뿐인가요? 와이셔츠 한두 장까지도 집집마다 수거해가고 또 배달해주어야 하니 발품도 부지런히 팔아야 합니다.
시인은 주름투성이 바지를 말끔하게 다려 가지고 온 세탁소 아내의 얼굴을 쳐다봤겠지요. 아낙의 자글자글한 얼굴의 주름이 자신의 바지 주름이 옮겨간 것이라 생각하니 안쓰럽기도 합니다. 세탁물을 전해주고 아파트 계단을 내려가는 아낙의 발소리를 들으면서, 세상의 모든 구불구불한 길을 다 안고 있는 듯한 세탁소 풍경을 떠올립니다. 이 시를 읽으면서 저도 굴곡진 인간의 삶을 떠올립니다. 세상의 모든 삶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주름과 굴곡의 연속이니까요.
세탁소는 어느 업종보다 일 품이 많이 드는 고달픈 일이지만 생각보다는 수입이 많지 않습니다. 살림이 넉넉지 않은 주부들은 제 손으로 빨래를 할 수밖에 없고 아주 귀한 옷가지만 세탁소에 맡깁니다. 여기에다 세탁물을 맡겨놓고는 감감무소식인 사람들 때문에 골치를 앓기도 합니다. 또 인건비를 벌어들이는 일이다 보니 부부가 같이 꾸려가는 게 보통이고 아이를 기르는 일도 여간 벅차지 않습니다. 세탁소는 무엇보다 손님이 맡겨놓은 세탁물이 훼손되는 일이 없어야 하기 때문에 여간 신경이 쓰이는 일이 아닙니다. 달동네 언덕의 세탁소에서는 이런 일도 목격됐나 봅니다.

폭우가 쏟아질 경우 자칫 세탁물이 젖을까 주인아저씨는 지붕에 올라가 함석 지붕을 수리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시끄러운 함석에 망치를 내리치니 얼마나 시끄러울지요? 그 밑에서 아내는 쉴 새 없이 미싱을 돌리고 실밥을 뜯습니다. 고된 노동에 식사 한 끼 마음 놓고 할 수 없을 테니 아낙은 바싹 말라갑니다. 그녀의 손끝에서 쉴 새 없이 움직이는 바늘처럼.
시인은 이런 달동네 세탁소의 풍경이 안타까웠는지 인류 역사상 가장 장엄한 건축물인 그리스 아테네의 올림포스 신전이라는 칭호를 붙였습니다. 지붕에 올라 함석판을 망치로 두드리는 남편은 천둥과 번개를 마음대로 부린 제우스 신이었고요, 아낙은 제우스의 부인 헤라였거나, 지혜의 여신이면서 직물의 여신이기도 했던 아테네였겠지요.
그런가 하면 가지런히 놓여있는 세탁물을 좀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는 시인도 있습니다.

청소하는 아버지와 세탁일을 하시는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시인은 세탁소에 걸려 있는 셔츠나 반듯하게 접혀 있는 수건을 보면서 문득 오버랩되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늘 허리를 구부려 공손해야 하고, 마치 정물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말아야 합니다. 파김치가 되어 돌아온 집에서조차 마음껏 두 다리 뻗지 못하고 각이 접히는 세탁소의 옷들처럼 쪼그리고 자야 하는 신세를 떠올립니다.
마냥 순결하고 깨끗한 이미지로만 떠올리던 세탁소의 옷가지들이 전혀 다른 알레고리와 상징으로 다가옵니다. 문득 까칠하던 성격의 모서리도 깎이고, 거칠던 표면도 갈리고 세상의 규칙과 문법에 순응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현대인의 박제화된 삶에 대해 곰곰 생각하게 됩니다.
세탁기의 출현, 사라져 가는 세탁소
동네의 온갖 궂은 빨래를 도맡아주던 세탁소는 1970년대 가정에 세탁기가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서서히 쇠락해갑니다. 시장의 기능을 중시하는 자본주의론자와는 좀 다르게 다양한 법률과 사회적 관습 그리고 각종 제도를 통해 자본주의의 메커니즘을 들여다보는 경제학파를 흔히 '제도학파'라고 하는데요.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경제학을 가르치는 장하준 교수가 그런 학자입니다.

그는 신자유주의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신랄하게 파헤친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라는 저서에서 '세탁기야말로 인류사상 가장 획기적인 발명품'이라고 주장합니다. 흔히 인터넷이나 전기 에너지, 증기기관 등을 가장 혁명적인 발명품이라고 하지만 그는 세탁기의 발명으로 주부들이 가사 노동에서 해방되었고, 여성의 노동력이 사회로 유입되면서 세계 경제는 비약적으로 성장했다고 설명합니다. 실제로 5남매나 됐던 우리 집은 말할 것도 없고 대부분의 집에서 주부들은 빨래하다 볼일 다 봤으니 세탁기의 출현은 주부들에게는 구세주이자 복음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1858년 미국의 스미스가 세계 최초의 회전식 세탁기를 발명한 이후, 1907년 전기 세탁기가
제작되었고 1941년 미국 가정에서는 절반이 넘는 52%가 세탁기를 사용했습니다. 우리나라는 1969년 지금의 LG의 전신인 금성사가 '백조'라는 이름의 세탁기를 최초로 선보였습니다. 아무리 더러운 옷가지도 이 세탁기에 넣고 빨면 백조의 털처럼 하얗게 된다는 뜻이었나 봅니다.

세탁기 보급률은 1975년까지 6년 동안 1%에 불과했지만 이후 폭발적으로 늘었습니다. 1985년 26%, 1993년에는 91%를 기록하더니 1997년에는 99.9%가 됐습니다. 우리나라 가구 수가 2015년을 기준으로 약 1,870만 가구니까 무려 1,900만대 가까운 세탁기가 돌아가고 있는 셈입니다.
세탁과 헹굼, 탈수를 한꺼번에 그것도 순식간에 해치우는 세탁기는 편리하고 신속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런데 남편과 아이들 그리고 자신의 온갖 빨래를 한꺼번에 뭉쳐 넣고 쿵쾅거리며 돌아가는 세탁기를 보면서 한 주부 시인은 이런 재미있는 연상을 했습니다.

시인의 기발한 상상력에 절로 웃음이 나옵니다. 온갖 세탁물을 삼키고 우당탕탕 돌아가는 통돌이 세탁기를 시인은 무시무시한 외눈박이 짐승에 빗댑니다. 이 짐승은 남편의 술 취한 바지도 자신의 꽃무늬 원피스도 아이들 모자와 양말도, 그 옷에 묻어오는 온갖 삶의 흔적과 얼룩도 닥치는 대로 삼켜버립니다.
그리고는 말끔해진 옷가지를 베란다에 널면서 시인은 생각합니다. 가끔 천둥 번개가 치고 소낙비가 내리면 희끄무레하던 하늘이 파랗게 되니, 하느님도 외눈박이 뇌수처럼 지구를 통째로 넣고 돌리신다고. 요즘처럼 미세먼지로 온 국민이 고통을 받고 있는 때는 하느님이 좀 자주 지구를 통째로 돌려주셨으면 좋겠군요.
편의점의 세탁서비스로 설 땅이 더욱 좁은 영세 세탁소
대표적인 생계형 업종인 동네 세탁소를 위협하는 요인은 또 있습니다. 현재 전국에 무려 3만여 개 넘게 포진한 24시간 편의점입니다. 올 초부터 세븐일레븐은 서울 용산의 산천점을 시작으로 무인 세탁소를 운영하기 시작했습니다. 24시간 문을 여니까 바쁜 직장인들을 언제나 유치할 수 있고, 규모의 경제를 통해 세탁비를 동네 영세한 세탁소보다 줄일 수 있으니 위협적입니다. 세븐일레븐뿐 아니라 다른 편의점까지 세탁업에 뛰어든다면 가뜩이나 구석으로 몰리고 있는 동네 생계형 세탁소는 설 땅이 더욱 좁아집니다.
여기에다 '크린토피아'를 필두로 대규모 자본과 시설로 경쟁력을 확보한 이른바 프랜차이즈 세탁업의 성장도 동네 세탁소를 옥죄고 있습니다. 현재 프랜차이즈 1위 업체인 크린토피아는 지난 90년 창업한 이후 2,300개 가맹점을 거느리고 가격 인하를 무기로 재래 세탁소의 몫을 잠식해가고 있습니다. 물론 일부 세탁소는 가맹의 형태로 프랜차이즈 회사와 제휴할 테니 새로운 활로를 찾을 수도 있겠지만, 가맹의 우산 아래 들어가지 못하는 세탁소들은 골리앗과 힘겨운 생존 경쟁을 벌여야 합니다.

일본에서 시작해 우리나라에도 영토를 넓혀가는 무인 빨래방도 또 다른 복병입니다. 저도 20년 전 일본의 한 대학에 연구원으로 갔던 시절 집안 사정이 생겨 독신으로 살아야 했는데요. 동네에 있던 빨래방을 자주 이용했던 기억이 납니다. 일본어로는 '코인 란도리'라고 하는데 100엔이나 500엔짜리 동전을 집어넣으면 거대한 통돌이 세탁기가 빨래를 해주고 옆에 있는 건조기에서 말리는 시스템이었지요. 일본에는 벌써 만 7천 개의 빨래방이 전국에 있습니다.
고령화와 함께 독신 가구가 늘어나는 우리나라의 추세를 감안할 때 빨래방은 급속도로 늘어날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런 추세를 반영하듯 독립 세탁소는 점점 숫자가 줄어들고 있습니다.

1993년 2만 9141개였던 세탁소는 1998년 3만 6천353개로 늘었고, 2006년 3만 7200개로 정점을 찍었습니다. 그러나 2013년 3만 4천565개로 줄더니 2016년에는 2만 7천832개로 줄었습니다. 그러니까 10년 만에 만 개의 세탁소가 사라진 것입니다.
영혼도 세탁할 수 있을까?
말끔하게 세척되고 빳빳하게 다려져 나온 옷가지를 보고 있노라면 구겨진 영혼도 저렇게 세탁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종종 생각해보곤 합니다. 영혼을 세탁하는 데 필요한 세탁기는 어떤 것이고, 넣어야 할 세제는 또 무엇인가 곰곰이 생각해봅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선승이시면서 경북 봉화의 금봉암에서 선수행을 이끌고 계시는 고우 스님은 선(禪)수행을 세탁에 비유합니다.

옳고 그름을 가르고 싶어하는 분별심과 갈등, 집착을 모두 넣고 돌리면 말끔히 없어지는 세탁기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 세탁기 역시 몸과 정신 밖 어디에 있는 것이 아니고 다시 이 진흙탕 같은 몸과 마음속에 있으니 부단히 몸과 마음을 닦아야 할 노릇입니다.
표현은 쉽지만 담은 뜻은 결코 가볍지 않은 종교시를 쓰시는 이해인 수녀님은 세탁의 가장 고전적인 형태인 빨래를 통해 우울도 떨쳐내고 슬픔도 극복하고 미운 이도 용서할 수 있다고 합니다. 동네 세탁소가 사라지는 것을 한탄만 할 것이 아니라 가끔 손수 빨래를 해야겠습니다. 가진 것 변변치 않은 서민들이 부지런함 하나로 생계를 꾸려가는 동네 세탁소도 더는 사라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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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병걸기자 (kbslimb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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