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환의 과학세상] 과학보다 출제 의도가 더 중요해진 수능

법원이 생명과학Ⅱ 20번 문항의 지문에 심각한 오류가 있다는 수험생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교육과정평가원이 항소를 포기하고 법원의 판결을 받아들여서 6515명의 수험생들 모두를 정답 처리해주었다. 2014학년도 세계지리의 악몽을 되풀이할 수 없었던 평가원의 고육지책이었다. 그러나 번번이 난이도와 출제 오류 논란에 휘말리는 수능은 더 이상 망가질 수 없는 만신창이가 되고 말았다. 그런데도 교육부는 여전히 수능이 가장 공정한 평가라는 입장을 고집하고 있다.
폭발하는 수험생들의 불만
수능 문항에 대한 수험생들의 불만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 소위 조국 사태로 다양한 전형 요소를 활용하는 수시의 공정성에 도마 위에 오르게 되면서 나타나는 일이라는 분석도 있다. 수험생과 학부모들이 수능에 대해서 더욱 민감해질 수밖에 없는 형편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수능이 끝나고 나면 수험생들의 이의제기가 쏟아지는 것이 일상화되고 말았다. 올해는 무려 1014건의 이의가 제기되었다. 작년의 2배를 훌쩍 넘어서는 수준이다. 물론 수능을 출제한 교육과정평가원은 대부분의 이의제기에 대해 ‘이상 없음’이라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이의제기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전문학술단체의 의견도 고려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평가원의 출제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밝혀지기도 한다. 수능이 도입된 이후 지금까지 6개의 문항에 대해서 복수 정답을 인정해주었고, 오류의 정도가 너무 심각해서 수험생 모두를 정답으로 처리해준 경우도 3개 문항에 이른다. 과학도 예외가 아니다. 물리‧생명과학‧지구과학에서 출제 오류가 확인된 경우가 5번이나 된다.
물론 평가원이 손을 놓고 있는 것은 아니다. 출제위원의 구성을 다양화하고, 별도의 검토위원회를 구성해서 오류를 찾아내고, 난이도를 조절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런데도 출제 오류가 반복되고, ‘물수능’과 ‘물수능’을 널뛰듯 오르내리고 있는 것이 분명한 현실이다.
사실 객관식 문항의 출제에서 오류를 완벽하게 찾아내서 바로잡고, 난이도를 적절하게 조절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다. 특히 평소 객관식 문항의 출제에 익숙하지 않은 전문가들이 짧은 기간 동안 만들어내는 수능의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모든 수험생들이 출제자의 의도에 따라 문항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교육과정’과 ‘출제 의도’
수능의 출제를 ‘교육과정의 범위’로 한정하고, 교육방송(EBS) 수능 교재의 일정 비율 이상 반영하겠다는 교육부의 관료주의적인 정책도 수능 출제를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다. 사실 그런 정책이 ‘대학에서의 수학 능력’을 평가하겠다는 ‘수능’의 본질을 훼손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임의적‧관료주의적으로 정해놓은 틀 안에 공교육을 확실하게 가둬버리겠다는 교육부의 반교육적인 시도가 오히려 공교육을 황폐화시키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 사실은 올해 생명과학Ⅱ 20번 문항에 대한 평가원과 전문학술단체의 의견에서도 확인된다. 평가원의 입장은 명쾌하다. ‘교육과정의 성취기준을 준거로 학업성취 수준을 변별하는 것’이 수능의 역할이라고 한다. 그런데 과학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문항으로도 수험생의 학업성취 수준을 변별할 수 있다는 주장은 황당한 억지일 수밖에 없다. 평가원이 자신들이 숨겨놓은 출제 의도를 파악하는 능력을 학업성취 수준으로 착각하고 있다는 뜻이다.
‘출제 의도’에 따라 지문에 주어진 정보로 문제를 해결한 학생을 역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어처구니없는 의견도 있었다고 한다. 평소 수능에 대해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고, 수능의 출제에도 직접 참여할 수밖에 없는 과학교육 분야의 전문가들이 공개적으로 밝힌 의견이 그랬다고 한다. 교육학 분야의 전문가들에게는 절대 기대할 수 없는 황당한 궤변이다. 수능은 출제 의도에 상관없이 창의적인 문제 해결 능력을 공정하고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어야만 한다.
과학 교육이나 수능의 현실과는 거리를 두고 있는 전문가들의 학술단체인 한국유전학회의 의견도 역시 부끄러운 것이었다. 유전학회는 지문에 제시된 조건이 완전하지 않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전학회는 ‘기존 정답 유지’와 ‘전원 정답 처리’에 대한 판단은 ‘유보(혹은 의견 없음)’하겠다고 한 발 물러서버렸다. 지문에 포함된 명백한 오류를 외면하고 정답을 찾을 수도 있기 때문이라는 주장은 어처구니없는 것이었다. 눈을 감고, 길을 돌아서 간다고 지문에 포함된 오류가 진리로 둔갑하는 것은 절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수능에 전혀 익숙하지 않은 해외 전문가의 평가는 전혀 달랐다. 집단유전학 분야의 세계 최고 석학으로 알려진 스탠퍼드대의 조너선 프리처드 석좌교수의 평가는 명쾌했다. 문재의 문항이 ‘터무니없이 어렵고, 사실은 풀 수 없는 문항’이라는 것이다. ‘고등학교 시험에서 이렇게 어려운 문항이 출제된다는 것은 놀랍고 인상적’이라는 의견도 밝혔다.

사실 교육부와 평가원은 교육과정 내 출제 원칙을 지나칠 정도로 엄격하게 고집했었다. 특히 대학의 논술고사에서는 교과서의 ‘탐구생활’에 소개된 내용도 용납하지 않았다. 2017년에는 2년 연속 교육부의 강력한 지시를 무시했다는 이유로 연세대를 비롯한 3개 대학에게 공개적으로 불이익을 주기도 했다. 연세대의 경우에는 35명의 입학정원을 정지시켜버렸다. 당시 법원도 교육부의 손을 들어주고 말았다.
결국 평가원이 ‘교육과정’을 핑계로 들고 나왔던 것은 어처구니없는 자가당착이었던 셈이다. 생명과학II 20번 문항의 지문은 ‘하디‧바인베르크 평형만 다룬다’는 2015년 개정 교육과정을 명박하게 벗어난 것이기 때문이다. 교육과정을 벗어난 지문으로 교육과정 내에서의 성취수준을 변별할 수 있다는 주장은 억지일 수밖에 없다.
수능이 공정하고 정의로운 평가 수단이라는 환상은 이제 버려야 한다. 정부가 시행하는 획일적‧관료주의적 객관식 평가로 모든 수험생의 수학 능력을 평가하는 일은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은 것이다. 수능이 실제로 수험생들의 학습 부답을 줄여주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학생들에게 출제자가 숨겨놓은 출제 의도를 찾아내는 무의미한 훈련을 강요하고 있다는 현실을 절대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더욱이 수많은 선택과목으로 쪼개진 현재의 수능은 과거 학력고사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왜곡된 평가 방식이다. 서로 다른 선택과목의 성적으로 공정하게 비교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는 ‘표준변환점수’도 사실은 교육적으로는 물론 통계적으로도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사과’와 ‘고등어’의 맛을 수평적으로 비교하겠다는 시도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것이다.
많이 늦었지만 이제라도 겉으로만 그럴 듯한 수능의 대안을 찾는 일을 시작해야 한다. 다른 나라의 제도를 베껴오겠다는 시도는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다. 당장 모두가 만족하는 완벽한 제도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버려야 한다.

※필자소개
이덕환 서강대 명예교수(화학·과학커뮤니케이션). 대한화학회 탄소문화원 원장을 맡고 있다. 2012년 대한화학회 회장을 역임하고 과학기술,교육,에너지,환경, 보건위생 등 사회문제에 관한 칼럼과 논문 2500편을 발표했다. 《같기도 하고, 아니 같기도 하고》 《거의 모든 것의 역사》를 번역했고 주요 저서로 《이덕환의 과학세상》이 있다.
[이덕환 서강대학교 화학·과학커뮤니케이션 명예교수 duckhwan@sogang.ac.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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