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 경성] '프로 개미' 김기진의 이중생활

‘英佛 對 獨逸 마침내 선전포고!’
1939년 9월4일 각 신문은 주먹만한 활자로 영국 체임벌린 총리가 전날 독일을 상대로 선전포고를 했다는 내용을 톱기사로 실었다. 세계2차대전 발발을 알리는 기사였다. 이 암울한 소식에 만세를 부른 사람들이 있었다. 주식 투자자들이었다. 월요일 개장과 함께 주식시장이 폭등했기 때문이다.
‘독폴란드전쟁으로 주식시장에서는 열광적 폭등을 보였는데, 영국이 드디어 독일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하였으므로 구주제이차대전이 벌어진 만큼 하룻밤을 지낸 4일의 주식시장은 폭등을 연출했다. 명치정(町)주식시장에서는 동신(東新)이 174원에서 뛰어 한꺼번에 25원이 올랐고, 종방(鐘紡)이 21원80전이 뛰어 184원90전, 조신(朝新)이 4원40전이 뛰어 35원40전에 시작된 후 파란만장이었다.’(조선일보 1939년9월5일 ‘포성에 놀란 주식’)

‘동신’은 도쿄취인소 신주(新株), ‘조신’은 조선취인소 신주를 뜻하는데, 각각 도쿄·조선의 증권거래소 주식을 가리킨다. 당시 주식거래소는 주식회사였고, 증시에 상장돼있었다. ‘동신주’는 조선 주식 거래량 절반을 차지하는 명치町(명동) 주식시장 최고의 블루칩이었다. 이 주식이 하루 아침에 174원에서 199원으로 14% 폭등해버렸다. 당시 증거금10%만 내면 주식 거래를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진 돈의 10배까지 주식을 사고 팔 수있었다. 동신주에 투자한 사람은 하루만에 최고 14배 수익을 거뒀으니 만세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2차대전 발발하자 주식 폭등
동신주 폭등에 환호한 투자자 중엔 조선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카프·KAPF) 출신 시인 겸 평론가인 김기진(1903~1985)도 있었을 것이다. 김기진은 당시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 사회부장이었다. 30대 중반이었으나 조선일보와 시대일보를 거친 중견인데다, 카프 활동 때문에 좌익 낙인이 찍혀있었다. 김기진은 1933년 조선일보를 그만 둔 뒤 금광 개발에 뛰어들었다가 빈털터리가 됐고 좌익 사건으로 경찰에 끌려가 곤욕을 치렀던 터였다.
이래저래 지쳤던 김기진은 ‘모가지에 달린 개패를 떼버린다’는 심정으로 매일신보에 입사했다. 그는 색다른 조건을 내걸었다. 직위는 상관없지만, 낮에는 출근 안하고 밤에 만드는 조간편집에만 출근하겠다는 조건이었다. 매일신보 부사장인 이상협과는 시대일보에서 함께 일한 인연이 있어 거래가 가능했다.
‘낮에는 명동에 있는 주식취인소에 나가앉아서 투기를 해볼 결심이었던 까닭이다. 정어리 공장도 해보았고, 금광도 해보았고 했지만, 이런 것은 막대한 자본과 전문적 기술과 10년 이상의 세월을 요하는 거창한 기업이지만, 주식매매만은 큰 자본이 필요치 않고 오직 총명한 판단만으로 짧은 시일내에 일확천금을 할 수 있는 일이니까 이것을 해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김기진, 나의 회고록 12, 세대 1965년9월)


◇오전엔 명동 주식장 출근, 밤에는 신문 1면 편집
‘그래서 나는 날마다 아침 9시5분전에 중매점에 나가 앉아서 그날 아침 일본 오사카 시장에서의 기부시세를 받아가지고 경성취인소에서 시세가 정해지는 것을 보았다. 며칠동안 이렇게 공부해 가지고 10주, 20주씩 청산시장의 동신주만을 가지고 팔았다 샀다하는 연습을 해가면서 오후3시에 후장의 매매가 끝나면 신문사로 출근하는 것을 규칙적으로 되풀이했다.’
김기진은 나름대로 주식 공부를 하고, 연습까지 했다. ‘대표적 주가의 오르고 내리는 고저 운동의 법칙만 알아낸다면 과학적 방법으로 일확천금할 수있다는 신념이 있었던 까닭이다.’ 소액투자로 시작한 김기진은 5년간 ‘동신주’만 사고팔았다. 일본 전역에서 수십만명이 거래하는 것인만큼 특정 개인이 가격을 좌우할 수 없고, 일본을 대표하는 주식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주식의 운동은 미묘한 것이어서 연구하면 할수록 취미진진한 것’이라고 할 만큼 주식에 흠뻑 빠졌다. 원금의 15배까지 벌어본 적도 있지만, 5년 뒤 결산은 신통찮았다. ‘1935년봄부터 1940년 여름 동신주 상장이 일본 전국에서 금지될때까지 5년동안 나는 비가 오거나 눈이 오거나 하루도 빼놓지 않고 열심히 취인소 근방에서 살았는데 결국 돈을 벌지는 못했다.’
◇조선의 ‘주식왕’ 조준호
당시 조선의 ‘주식왕’으로 알려진 인물이 조준호다. 대한제국 고위관료 출신 갑부 조중정의 맏아들로 태어나 도쿄 주오대 법학과를 졸업한 조준호는 스물둘이던 1925년 시대일보에 1만원을 출자해 전무로 신문사 경영에 참여했다. 동갑내기 김기진이 같은 신문사 일선 기자였다. 시대일보는 이듬해 경영난으로 문을 닫았다. 조준호는 미국과 브라질을 둘러보고, 영국 유학까지 마친 뒤 1929년 사업을 재개했다. 조선윌사석유회사(1930)와 동아이발기구 주식회사(1931)를 설립하더니 서른 한살이던 1934년 동아증권을 세워 주식거래에 뛰어들었다.
증권사는 설립 첫해부터 조선취인소 최고의 중매점으로 떠올랐다. 조선취인소 거래액 10% 이상이 동아증권을 통해 이뤄졌을 정도다. 1936년 한해에만 20만원(현재 약 200억원)을 벌었들였다. 1935년엔 인천에 미두 중매점까지 열었다. 조준호는 주식으로만 300만원 이상의 부를 축적했다고 한다.
월간지 ‘조광’(1940년 10월)이 ‘하여간 근자에 와서는 기업계의 ‘호ㅡ프’라는 말이 나오면 어쩐지 곧 조준호를 연상하곤하는 것이 이 방면의 습속이 되어버리도록 그의 이름은 ‘포풀라’해졌다’고 쓸 만큼 신흥 기업가로 이름을 날렸다. 조준호는 1957년 명동 사보이호텔을 세워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조준호의 처남은 세살 아래로 조선의 수재로 꼽히던 이강국이었다. 조준호는 경성제대 법학부를 졸업한 이강국의 독일 유학 비용을 대고, 귀국하자 동아증권 이사로 앉혔다. 이강국은 해방 후 건국준비위원회 서기장과 조직부장, 민주주의민족전선 사무국장으로 활동하다 1946년말 월북했다. 북조선위원회 외무국장 등을 지내다 박헌영·이승엽과 함께 미제 간첩으로 몰려 1956년 처형당했다.
◇주식 실패로 음독한 청년
변변한 정보 없이 주식판에 뛰어든 개미들이 순탄할 리 없다. 신문엔 투자에 실패한 이들의 자살 기사가 더러 났다.
‘만소(滿蘇)국경에 풍운이 급박한 요사이 앞 길을 잡을 수 없는 주식에 발을 들이밀었다가 실패를보고 청산가리 자살을 한 청년이 있다. 부내 관철정(貫鐵町) 남산관(南山舘)에 하숙하고 있던 황금정2정목 199번지 ‘마루다마’주식취인점원 한수봉(28)군은 19일 오후3시쯤 하숙으로 돌아와 방에 들어간 채 소식이 없음으로 저녁 때 주인이 문을 열어본 즉 벌써 절명되어 있었다. 종로서에서 검시한 결과 만소국경에 급박한 풍운을 반영하야 궤도를 잃은 주식에 손을 댔다가 약 2000여 원의 손해를 본 것을 비관한 나머지 무서운 독약 청산가리를 마시고 각오의 자살을 한 것인 듯하다고 한다.’(조선일보 1938년 7월21일 ‘주식에 실패코 청년음독자살’)
중일전쟁으로 전황이 불안해지면서 증시가 요동칠 때 잘못 판단한 대가로 목숨까지 잃은 것이다. 이런 사건이 많았던지 언론에선 일확천금을 꿈꾸며 주식에 뛰어드는 사람들에게 따끔하게 경고하기도 했다.
‘투기 시장에서 수십만 수백만의 자금이 없이 큰 성공을 해보랴거든 사람 노릇 해가면서 꿈꾸어서는 안된다. 부모처자를 생이별하고 알몸으로 제 한몸이 되어 아무 거리낌이 없이 휘둥그라게 한 후에 수십원이든지 수백원을 만들어가지고 발을 들여 놓는데 그날부터는 아주 마음을 지독하게 먹어야 한다. 부모처자까지 떼놓는 터이라 취인소 문전에서 돌베개하고 세상을 떠날 최후의 비통한 장면까지 새각한 사람이라야 한다. 왜 그래야 하느냐 하면 투기에는 끈기가 經이 되고, 배포 큰 것이 緯가 되어갸 하는 까닭이다.’(이건혁, ' 朝盛暮滅의 取引狂사태, 일확천금은 가능하냐?’, ‘조광’ 1936년1월)
필자는 ‘그럴 용기가 없는 사람은 행여 투기적으로는 투기 시장에 발을 들여놓지 말라!’고 으름장을 놨다.
◇조선취인소, 2005년에 철거
‘동학개미’, ‘서학개미’란 유행어가 익숙할 만큼 주식 투자는 동네 마트 쇼핑 하듯 흔한 세상이 됐다. 투기보다는 투자, 저축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게 달라졌다지만 아슬아슬하기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듯하다.
김기진이 드나들던 명동 주식장의 조선취인소 건물은 2005년 헐렸다. 1922년 ‘경성주식현물취인소’ 건물로 완공된 지 83년만이었다. 경성주식현물취인소는 1932년 인천 미두취인소와 통합, 조선취인소가 됐다. 해방 이틀전인 1945년8월13일까지 영업을 이어갔다.
1956년 설립한 대한증권거래소 건물로 쓰였으나 1979년 거래소가 여의도로 옮겨가면서 상가로 쓰이다 철거의 운명을 맞았다. 정부가 근대문화재 등록을 예고했으나 소유자가 전격철거해버렸다. 그 자리엔 2008년 상가와 사무실, 오피스텔이 있는 지상 10층 복합건물이 들어섰다. ’한 방’을 꿈꾸며 주식장에 몰려들던 ‘경성 개미’들의 환호와 한숨도 찾아볼 길 없게 됐다.
◇참고자료
전봉관, 럭키경성, 살림, 2007
전봉관, 황금광시대, 살림, 2005
김기진, 나의회고록12, ‘세대’, 1965년9월
김기진, ‘나의 인생과 나의 문학-예술과 실업의 두 갈랫길’, 김팔봉문학전집2, 문학과지성사, 1988
이건혁, ' 朝盛暮滅의 取引狂사태, 일확천금은 가능하냐?’, ‘조광’ 1936년1월
‘米豆軍의 흥망성쇠기’, ‘조광’ 1939년 9월
‘현역인물론-조준호’, ‘조광’ 1940년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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