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세주의는 불행 가득한 세상 속에서 삶을 긍정하는 통찰


■ 서동욱의 지식카페 - (25) 염세주의
삶 파괴하는 태만·복수심·폭력을 가슴 아프게 여기는 마음이 있기에 문학·음악·철학에 담아내는 것
쇼펜하우어는 결핍이 인간을 노예로 만든다고 했지만, 오히려 살아가는 에너지 주는 긍정적 힘 될 수도
세상에 살아 있다는 것 자체에 대한 슬픔이 넘친다. 당나라 시인 이하(李賀)는 스물일곱에 죽었다. 시인 이상은이 이하의 누이에게 들은 그의 죽음의 경위를 전한다. 이하가 죽음을 앞두고 있었을 때 갑자기 붉은 옷을 입은 사람이 나타나 공문(公文)을 보여줬다. 그는 하늘에서 온 사람이었다. 공문에는 상제가 백옥루(白玉樓)를 지었는데, 거기 붙일 글을 쓰기 위해 이하가 당장 와야 한다는 명이 쓰여 있었다.
“저는 가고 싶지 않습니다.” 이렇게 말하며 이하는 울었다. 그러나 상제의 명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천상은 즐겁고 고되지 않을 걸세.” 붉은 옷을 입은 자가 말했다. 그러곤 이하의 방 창문에 먼지가 솟고 마차 바퀴 구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하는 죽었다.
790년에 태어나 중당(中唐)에 활동한 이 불행한 시인의 시구를 고등학교 시절 벽에 사인펜으로 써놓고 살았다. “장안에 한 젊은이 있으니/스무 살에 마음은 벌써 늙어버렸네… 지금 벌써 길은 막혀 버렸으니/백발을 기다릴 필요 어디 있으랴.”(이동향 역) 책상 앞에 앉아 출구 없는 세상의 기록인 저 시구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던 학생은 어떻게 세월의 파도를 타고 빠져 죽기에 알맞은 소용돌이들을 지나쳐 여기까지 흘러 왔는가? 그저 신기하다. 이하는 이미 마음이 죽은 사람이었다. 모함하는 방해꾼들 때문에 관직(당시의 유일한 출구)을 얻어 세상으로 나갈 길이 막힌 그는 그저 염세와 색정과 귀신들이 만들어내는 환상 사이를 오가며 살았다. 이렇게 쓰기도 한다. “슬피 울며 초사(楚辭)를 배우고/몸이 병드니 서글프고 쓸쓸하기 그지없네/쇠약한 얼굴에 머리카락 세어가고/나뭇잎은 비바람에 소리 내어 우네.”(송행근 역) 이십 대에 머리카락이 세어가는 이하는 초사를 손에서 놓지 못했다. 초사의 많은 부분은 멱라수(汨羅水)에 몸을 던져 자살한 굴원의 비가(悲歌)가 차지한다. 이하는 그 자신의 시만큼 어두운 노래에 빠져 있었다.
세상을 버리고 싶은 이들이 있다. 사랑 때문에 그렇게 되기도 한다. 해결할 수 없이 어두운 곳에 숨어들어야만 하는 부정한 사랑에 빠진 트리스탄은 말한다. “사랑의 밤이여,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잊게 해다오.”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2막의 노랫말이다.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그들을 휘감고 있는 정념에 지쳐 오로지 세상으로부터 빠져나갈 궁리만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나를 죽게 내버려 두오” “이 세상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주오.” 세상을 버리고 싶어 하는 이런 말들이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이중창에는 차고 넘친다.
자신의 과오 때문에 염세에 빠진 맥베스의 경우도 있다. 이 셰익스피어의 인물은 말한다. “난 태양이 지겨워지기 시작한다/그리고 우주가 이제 무너졌으면 좋겠다.”(최종철 역) 또 리어왕의 고통스러운 삶에 대해 켄트는 이렇게 말한다. “그는 이 험악한 세상이란 형틀 위에/자기를 더 오래 묶어 두려는 사람을/미워하실 겁니다.” 세상은 그저 벗어나야만 하는 잔혹한 형틀인 것이다.
예술에 깃든 염세의 정서는 말러에 이르러 궁극에 다다른다 해도 좋을 것이다. 말러 말년의 두 작품, ‘대지의 노래’와 ‘9번 교향곡’에서 우리는 세상에 지치고 세상을 저버리고 싶어 하는 이의 정서와 마주한다. 이 곡들에 대해 나 자신은 객관성을 잃어버리고 밀착해 있으니, 다른 사람들의 표현을 빌려 이 곡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좋겠다. 철학자 아도르노는 그의 저작 ‘말러’에서 ‘대지의 노래’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그의 고독은 도취된 가운데 절망과 절대 자유의 열락 사이에서 엎치락뒤치락하고 있으니, 벌써 죽음의 지대 안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이정하 역) 그러고는 아도르노는 이 음악을 “자기파괴의 도취” “자포자기의 충일” “공허가 그 자체로 음악이 되는 것” 등의 말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9번 교향곡’이 있다. 이 곡의 4악장은 세상에 대한 어떤 미련도 없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된 채로 소멸한다. 지치고 지쳐 울음도 슬픔도 회한도, 눈물 자국마저 남지 않고 세상의 모든 불은 꺼져버린다. 그저 이젠 아무것도 없고 분노도, 안식도 없는 우주는 눈을 감는다. 다 사라진다. 이 작품에 대해 음악 평론가 파울 베커는 쓰고 있다. “사람을 지쳐 주저앉게 만드는 음악이고, 도대체 이 세상 사람들이 들으라고 만든 음악이 아니다. 그는 죽음과 그 너머의 것들에 관해 이야기한다. 말러 본인도 그 곡으로 인해 죽었다.”(이정하 역)
깊은 신앙을 지닌 이도 고통에 못 이겨 세상에 태어난 것 자체를 저주한다. 이토록 지독한 염세의 언어를 들어본 적이 없으리라. “어찌하여 나를 모태에서 나오게 하셨습니까? 차라리 그 누구의 눈에도 뜨이지 않고 숨져 태어나지도 않았던 듯이 모태에서 무덤으로 바로 갔다면 좋았을 것을.”(‘욥기’, 10:18-19, 공동번역)
무엇보다도 염세의 정서는 철학 안으로도 들어선다. 세상에 대한 혐오를 우리는 헤라클레이토스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왕족이었으나 인간을 혐오해 산속에 들어가 풀을 먹으며 연명했다. 그러나 염세적인 인생관을 노골적으로 피력하고 있는 본격적인 염세주의자라 할 만한 사람은 에게 바다의 케오스(Ceos)섬 출신 프로디쿠스다. 그는 소크라테스와 비슷한 시기인 기원전 5세기 무렵 활동한 철학자다. 케오스섬의 주민들 자체가 염세적 성향에 젖어 있는 사람들이었다. 플라톤의 저작으로서 후세에 영향력을 끼쳐왔지만 사실은 위작임이 밝혀진 ‘악시오쿠스’가 프로디쿠스의 생각을 전하고 있다. 우리는 삶의 악독함을 피하기 위해 죽음을 열망해야 한다. 죽음이 두렵다고? 그건 잘못된 생각이다. 왜냐하면 죽음은 살아 있는 것에도, 죽은 것에도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살아 있는 것에 관심이 없는 까닭은 그것이 죽음과 상관없이 여전히 살아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죽은 것에 관심이 없는 까닭은 그것이 더 이상 살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죽음은 살아 있는 것도, 죽은 것도 공격하지 않는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고, 삶의 고통을 종결짓는 길로 죽음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논변의 미숙함과는 별도로, 저런 사상은 인간이 머나먼 옛적부터 삶을 혐오해 왔고 철학 속으로 들어가 그 혐오를 표현해 왔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로마의 철학자 역시 삶을 씁쓸해하고 있다. 루크레티우스는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에서 말한다. “오, 가련한 인간의 정신이여… 어떠한 삶의 어둠 속에서, 얼마만 한 위험 속에서 이 짧은 삶을 영위하고 있는가!”(강대진 역)
염세주의를 생각하면서 근대의 쇼펜하우어를 피해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모든 것의 근본에는 ‘의지’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 의지란 자유롭게 의도한 바를 행하는 자유의지 같은 것이 아니다. 의지라는 말은 쇼펜하우어에게서 맹목적인 충동을 가리킨다. 우리 삶은 이 맹목적인 의지의 지배를 받는 노예 상태다.
쇼펜하우어는 대표작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인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날마다 새로이 생기는 무거운 요구에 시달리며 자신의 현존을 유지하기 위해 대체로 일평생 걱정하며 살아간다.”(홍성광 역) 여기서 ‘무거운 요구’라 불린 맹목적 의지는 늘 굶주린 채로 먹을 것을 찾아오라고 인간을 부리는 거지왕 같다. “모든 의욕의 기초는 결핍, 부족, 즉 고통이다. 따라서 인간은 이미 근원적으로 또 그의 본질로 인해 이미 고통의 수중에 들어가 있다. 이와는 달리 의욕이 너무 쉽게 충족돼 곧 소멸되면서 의욕의 대상이 제거되면 인간은 무서운 공허와 무료함에 빠진다.” 두 가지 비관적인 방향이 제시되고 있다. 맹목적인 충동을 다 만족시켜 주지 못해 늘 삶은 허기와도 같은 고통을 겪는다. 반대로 이 충동이 쉽게 충족되는 경우엔? 삶은 좌표를 잃고 무료함에 빠지게 된다. 욕구가 충족되지 못하는 데서 오는 고통, 그리고 더 이상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데서 오는 권태와 무료함. 인생은 어디로 가든 이 두 가지 나락으로 굴러떨어진다.
그래서 그는 말한다. “참된 행복, 즉 삶과 고뇌로부터의 구원은 의지의 완전한 부정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 의지의 부정과 함께 “모든 이성보다 높은 평화, 대양처럼 완전히 고요한 마음, 깊은 평정, 흔들림 없는 확신과 명랑함”이 나타난다고 말한다. 그런데 의지를 부정할 수 있을까? 의지의 부정은 그 부정을 목표로 삼아 노력하는 의지를 여전히 필요로 하지 않을까?
쇼펜하우어의 비관주의, 즉 인간은 ‘결핍을 근본으로 하는 의지’의 노예며 그로 인해 인생의 모든 고통이 생겨난다는 생각에 우리는 동의하지 않을 수 있다. 의지는 늘 고통스러워하는 결핍이 아니라, 봄이 오면 풀이 자라고 대지가 더 뜨거워지면 열매가 생산되는 것과 같이, 우리가 자연의 일부로서 가지고 있는 생산력, 살아나가는 힘, 삶의 기본을 이루는 긍정적 힘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쇼펜하우어의 제자를 자처했지만, 쇼펜하우어와 정반대로 의지(힘의 의지)를 긍정했던 니체처럼.
쇼펜하우어처럼 염세주의를 인간의 타고난 충동이 겪는 결핍 탓으로 돌릴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러기엔 염세주의는 훨씬 심오하다. 염세주의는 삶에 대한 하나의 위대한 관점, 삶을 긍정하는 자라면 가질 수밖에 없는 통찰이다. 왜냐하면 현실이란 삶을 긍정하기보다는 반대로, 가벼운 쾌락에 욕심내며 장님처럼 사는 태만, 복수심과 시기심을 만족시키려고 남의 삶을 파괴하는 폭력 같은 것으로 가득 차 있으니 말이다. 따라서 삶을 긍정하는 자라면, 삶을 파괴하는 이 현실 앞에서 염세의 눈에 눈물을 담고 슬퍼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봤던 저 예술가들의 슬픈 시와 음악이 그렇듯 말이다.
서강대 철학과 교수
■ 용어설명
염세주의와 염세주의자들 : 염세주의(pessimism)는 말 그대로 세상을 불행하고 비참하게 바라본다. 그것은 일상적 태도이기도 하며, 예술적 개성이기도 하고, 철학적 입장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그런 염세적 성향은 본문에서 다뤘던 중국 시인 이하(790∼816)의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염세적 경향과 더불어 귀신이 등장하는 환상적 제재, 낭만적 특성을 지닌 독특한 시를 남겼다. 보기 싫은 현실에 침을 뱉는 방식이 이하에게는 환상을 선택하는 일이었다. 철학에서는 역시 본문에서 다룬 쇼펜하우어(1788∼1860)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가 대표적으로 염세주의를 담고 있다. 이 작품은 대중적으로도 성공을 거뒀는데, 유럽에서 1848년 혁명 실패 후 좌절이 이 책의 염세주의와 호응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말러(1860∼1911)의 경우 더 무엇을 말하랴. 어려서부터 보헤미아의 장송행진곡에 익숙했던 이 예술가의 귀는 수많은 불행을 겪으며 화살이 과녁을 찾듯 염세의 정점을 향해 음표들을 모아갔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두 번의 세계 대전을 앞두고 황혼으로 접어드는 유럽 정신의 만가이기도 하다.
[ 문화닷컴 | 네이버 뉴스 채널 구독 | 모바일 웹 | 슬기로운 문화생활 ]
[Copyrightⓒmunhwa.com '대한민국 오후를 여는 유일석간 문화일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구독신청:02)3701-5555 / 모바일 웹:m.munhwa.com)]
Copyright © 문화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8학군 아내의 충격적 사생활… 아들 얘기 들은 남편 ‘눈물’
- 동거남의 딸 성폭행 방관한 엄마…“쓰레기도 아깝다”
- 송해 “이상용, 전국노래자랑 후임 MC 포기했다”
- “항공사 회장 숨겨진 아들” 속여 배우지망생과 성관계
- 싸이월드의 메인넷 토큰 ‘싸이도토리’ 25일 정식 상장…가상화폐 시장 새 바람 부나
- “한국 확진자 급증 이유 있다”…日언론이 본 원인은?
- “도경완 아부능력 타고 났어” 장윤정 또 남편 폭풍 디스
- 3.6㎞ 한탄강 절벽길·소금산 스카이타워… 아찔한 여행이 열렸다
- 비만의 ‘역설’… 대장암 재발 위험 낮고 전립선암 생존율 높아
- “대장동 로비 폭로 협박에 120억 뜯겨” 정영학, 정재창 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