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피, 신의 숨. 자연 만물은 본시 하나였다

한겨레 입력 2021. 9. 23. 18:36 수정 2021. 9. 29.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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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심정] 신동흔의 치유적 신화읽기]자연창조 신화의 생명적 일원론

미만한 신성의 증거 , 대자연

신화는 신성의 이야기라고 했다. 그리고 신성은 우리 안에도, 밖에도 있다고 했다. 우리 밖의 신성에 대해 증거가 있느냐고 물으면 당연히 그러하다고 답하겠다.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광대한 대자연에서 미물까지, 자연 만물 모두라고 답하겠다.

지금 창밖에는 가을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다. 어젯밤까지만 해도 달이 휘영청 떠있던 하늘이었다. 열대야에 잠을 설쳤던 것이 한두 달 전 일인데 지금은 몸에 으스스 한기가 스며든다. 자연의 일이란 얼마나 놀라운지. 인간의 경험과 지식으로, 또는 과학기술로 그 흐름을 미리 헤아려 대비한다지만, 새 발의 피이고 빙산의 일각일 따름이다. 지진과 태풍, 해일과 홍수 같은 대자연의 위력 앞에 인간은 한갓 미물일 따름이다. 대자연만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작은 것들이 그 이상으로 무섭다. 바이러스의 위력에 온 인류가 이태째 흔들리고 있지 않은가. 

자연이 곧 신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수많은 신들은 자연의 표상이다. 제우스와 토르는 벼락과 천둥의 신이고, 아폴론과 해모수는 태양신이며, 포세이돈과 사해 용왕은 바다의 신이다. 달과 별, 산과 강, 비와 바람과 물과 불, 모두가 신이다. 바위와 나무, 돌 같은 것들도. 나무에 오색 끈을 매달고서 엎드려 절했고, 돌을 모아 쌓고서 두 손을 모았다. 그들 없이는 한순간도 존재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이다. 

세계 신화는 자연에 미만(彌滿)한 신성의 유래를 자연 만물 탄생의 역사에서 찾는다. 그 역사는 신령하고 놀라운 것인 동시에 낯설고 두려운 것이기도 하다. 자연은 신이 전해준 선물인 한편으로 신의 희생적 죽음에 따른 산물이기도 하다. 그 역사는, 엄중하다. 

태초의 큰 신, 만물을 만들다. 낳다.

많은 사람들은 태초에 전능한 신이 위대한 창조주로서 자연 만물을 만들어낸 것으로 여긴다. 일련의 계획에 따라 착착 완수된 대창조의 역사. 히브리 창세기의 영향으로 널리 퍼진 신화적 이미지다. 신화는 신이 첫날에 빛이 생기라 하자 그대로 되어 밤과 낮이 나뉘고, 둘쨋날 창공이 생기라 하자 물이 갈라지며 하늘이 생겼다고 한다. 이어서 땅이 모습을 드러내 풀과 나무가 자라고, 하늘에 해와 달과 별이 뜨며, 바다와 하늘과 지상에 물고기와 새들과 길짐승이 자리잡는다. 그 정점은 여섯째 날의 인간 창조였다. 신의 모습대로 인간이 만들어지고 자연 만물은 그에게 선물로 주어진다. 거룩한 안식일의 평화까지 그야말로 완벽한 창조다. 대자연과 뭇 생명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는 태초의 낙원 에덴동산. 그 원형적 유토피아의 이미지는 강한 힘으로 마음을 잡아끈다.

지만 태초의 평화는 영속할 수 없는 바였다. 잘 알듯이 이 세상은 험하고 복잡한 곳이다. 하늘과 땅, 또는 음(陰)과 양(陽)으로 표상되는 대극의 기운이 간단없이 부딪쳐 얽히는 격동의 공간. 아담과 이브가 욕망에 이끌려 선악과(善惡果)를 먹음으로써 에덴동산이 닫힌 일은, 인간이 자연 만물 가운데서 부대끼는 하나의 미물이 된 일은 필연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정확히 말하면, 태초의 낙원은 현실적 실체라기보다 하나의 신화적 이데아 같은 것이었다고 봄이 어울린다.

종교적 가공이 상대적으로 덜한 신화들에서, 자연 만물 탄생의 역사는 더 자연적이면서도 극적인 형태로 표현된다. 인도 신화에서 세상 만유를 낳은 것은 브라흐마의 ‘생각’이었다. 그의 명상 속에서 뭇 신이 나오고, 인간과 귀신이 나오며, 새들과 동식물과 사물들이 나온다. 자연 만물이 신의 피조물이 아닌 ‘자식’이 되는 관계다. 비슷한 내용을 이집트 신화에서도 볼 수 있다. 신화에서 바람의 신과 비의 신 같은 자연신들은, 그리고 갖가지 초목과 동물, 새와 벌레, 물고기, 인간 남녀 등은 태초의 창조신 라(레)의 ‘생각’에 의해 창조된다. 여기서 생각은, 브라흐마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본원적인 섭리 내지 기운에 해당하는 무엇이라고 보면 틀림없다. 자연 만물은 그 자체 신의 현현인 셈이다. 

그리스 신화는 자연의 표상에 해당하는 여러 신들의 탄생 과정을 더 계기적이고 역동적인 형태로 서술한다. 태초의 거대한 혼돈으로부터 가이아(대지)와 닉스(밤), 에레보스(어둠), 타타루스(지하세계), 에로스(욕망) 등이 생겨나며, 가이아가 우라노스(하늘)를 낳은 뒤 그와 결합해서 외눈박이 키클롭스족과 괴물 헤카톤케이로스족, 거인신 티탄족 등을 낳는다. 가이아와 우라노스가 낳은 기괴한 자식들은 크고 거친 야생의 자연을 표상하는 존재로서 성격을 지닌다. 그들이 더 많은 자연신들을 낳고서 사라지면서 세상 만물은 새로운 질서를 갖춰나가게 되니, 진화론적이고 형성적인 창조 서사에 해당한다. 갈등과 투쟁의 요소를 포함한, 역동적인 창조 서사이기도 하다. 

이들 모든 신화에서 눈여겨봐야 할 한 가지는 자연 만물의 생명적 연결성이다. 신의 피조물로 만들어졌든 신의 자식으로 태어났든, 이 세상 자연 만물은 모두 같은 뿌리를 가진 혈족으로서 성격을 지닌다. 그들은 신의 기운을 간직한 채로 살아 있으며,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하나의 세계를 이룬다. 그 속에는 물론 인간도 포함된다. 신화에서 인간은 여타 자연물과 구별되는 특수한 창조물로 말해지기도 하지만, 별도의 딴 세상으로부터 온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이미 세계 여러 신화에서 인간이 흙과 물로, 또는 돌이나 나무, 옥수수와 벼 등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말해지고 있음을 본 바 있다. 신화에서 자연은 인간의 아버지이고 어머니다. 또는 형제자매다. 거대한 뿌리로 연결된. 한시도 끊어져 존재할 수 없는.

태초의 큰 신, 쓰러져 자연이 되다.

세계 신화 속의 자연창조 서사는 평화롭고 순탄한 것보다 극적이고 격렬한 것이 더 많다. 그리스 신화에서 오래된 신의 죽음과 새로운 신들의 탄생을 말하고 있거니와, 신의 죽음과 해체는 여러 창조신화의 두드러진 내용을 이룬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신의 시체라는 이미지다. 쓰러져 허물어진, 또는 갈가리 찢긴 거대한 신의 시체…… 생각만으로도 두려움이 느껴지는 그것은 그 뒤에 어떻게 되었을까? 신들의 시체는 사라지지 않는다. 자연 만물로 거듭 난다. 일컬어 사체화생(死體化生) 화소다. 창조신화를 이해하고 또 이 세상의 체계를 이해함에 있어서 중대한 의미를 지니는 요소다. 

사체화생 화소는 전세계 수많은 신화에서 확인된다. 먼저 메소포타미아의 바빌론 신화. 대양의 신 티아마트는 수많은 신들을 낳은 큰 어머니였는데, 어느 날 젊은 신 마르두크의 희생물이 된다. 마르두크가 뱃속에 집어넣은 바람과 화살에 의해 쓰러져 몸이 두 동강 나고 머리가 산산이 바수어진다. 그녀의 갈라진 두 몸은 하늘과 땅이 되고, 타액은 구름과 바람과 비가 되며, 독(毒)은 안개가 된다. 두 눈에서는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이 흘러나온다. 그렇게 태초의 여신은 그 자체로 자연 만물이 된다. 우리가 그 안에서 숨쉬고 있는 대자연은 신의 몸이다. 사람들의 생명의 젖줄이 된 두 강을 이룬 여신의 눈물은 피눈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신화적 이미지는 ‘선물’보다 훨씬 강렬하다. 자연은 우리의 소유가 아니다. 경건한 존숭의 대상이다. 

북유럽 신화에서 티아마트에 해당하는 존재는 이미르다. 니플헤임과 무스펠의 대극이 만나면서 생겨난 거대한 첫 생명. 남자도 여자도 아니고 모두이기도 했던 태초의 거인 이미르는 자신의 후손이기도 한 보르 신의 세 아들 오딘과 빌리, 베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그가 죽어야 세상이 생겨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미르의 거대한 주검은 무엇이 되었을까? 홍수처럼 흘러나온 피는 바다를 이루고, 몸은 굳어서 땅이 되며, 뼈는 산과 절벽이 된다. 부서진 뼛조각과 이빨은 바위와 돌과 모래가 되고, 머리카락과 털은 나무와 풀이 되며, 두개골 속의 뇌수는 하늘을 떠가는 구름이 된다. 일부 신화는 이미르를 흉한 괴물처럼 묘사하지만, 그럴 리 없다. 세상이 가히 감당할 수 없었던 태초의 크나큰 신성, 그가 곧 이미르다. 그 신성은 자연 만물 속에, 살아 있다. 오딘이나 토르에 앞서 우리는 그에게 경배해야 하는 것 아닐까? 

사체화생 신화로는 타히티 신화도 빼놓을 수 없다. 타히티 신화에서 죽어서 자연물이 된 존재는 창조신 타아로가다. 태초의 알을 깨뜨려 세계를 이룬 타아로가는 제 몸을 갈기갈기 찢어서 자연 만물이 된다. 그 살은 땅이 되고 척추는 산맥이 되며 깃털은 초목이 된다. 내장은 바닷가재와 새우와 뱀장어가 되고, 피는 무지개와 황혼이 된다. 하늘에 피어나는 무지개와 황혼이 창조신의 피라는 것은 얼마나 장엄한지! 무지개를 낳은 비는 신의 눈물이고, 황혼을 이루는 태양은 신의 심장일지도 모른다. 크나큰 대자연만이 아니다. 사람들이 잡아서 먹는 바닷가재와 새우 같은 미물 또한 신의 몸이다. 어찌 그렇지 않을까. 그것 없으면 살 수 없는 신성한 생명인 것을! 아메리카의 휴런족 신화에서 하늘 여신의 눈물로 적셔진 대지 여신의 주검에서 옥수수와 콩과 호박넝쿨이 움텄다고 하는 것도 신화적 의미가 이와 다르지 않다. 내가 조금 전에 먹은 밥과 호박과 고구마, 신의 몸이었던 터다. 하늘의 눈물을 먹고 자라난. 맛없다는 투정은, 또는 배부르다는 푸념은 얼마나 값싼 사치인지……

인도 신화에서도 하나의 인상적인 사체화생 서사와 만날 수 있다. 인도 신화는 브라흐마의 생각에 의한 만물 탄생을 말하는 한편으로, 천 개의 머리를 가진 원시 거인 푸르샤의 희생을 통한 자연 생성을 말한다. 죽어 쓰러진 푸르샤의 눈은 해가 되고 마음은 달, 머리는 하늘이 되며, 배꼽에서 대기가 나오고 겨드랑이에서 사계절이 생겨난다. 그 몸은 갖가지 계급의 인간이 되고 몸속의 기름은 동물이 되었다고 한다. 대기와 사계절의 유래 외에, 마음이 달이 되었다는 내용이 마음을 잡아끈다. 마음과 마음의 통함일까? 자연물 외에 인간과 동물 또한 푸르샤의 한 몸이 변한 것이라는 내용도 인상적이다. 모두가 신의 동질적인 현현이라는 말이다. 거기서 굳이 계급을 가르며 차별을 행하는 자, 천벌을 받을지언져.

중국 신화 속의 반고 이야기는 전세계 사체화생 서사의 결정판이라 할 만하다. 태초의 알 속에서 일만 팔천 년 동안 잠을 자다가 깨어나 천지개벽을 이루어낸 반고는 팔과 다리로 하늘과 땅을 떠받치고 다시 일만 팔천 년을 자라난 끝에 결국 노쇠해져서 쓰러져 죽는다. 그렇게 죽은 반고의 몸은 무엇이 되었을까? 그의 피는 대양이 되고 눈물은 강이 되며, 팔다리는 산맥이 되고 살은 땅이 된다. 뼈와 이빨은 흩어져 바위와 광물이 되고, 털은 초목이 된다. 머리털은 수많은 별이 되고 두 눈은 달과 해가 된다. 그의 마지막 숨은 바람이 되고 목소리는 천둥이 된다. 기후 현상을 포함한 자연 만물 모든 것이 태초의 창조신으로부터 나온 셈이다. 다른 지역 신화와 비교하면, 반고 신화는 신이 자연사에 해당하는 방식으로 늙어 쓰러졌다고 하는 점이 눈길을 끈다. 무위자연(無爲自然)을 연상시키는 생명적 순환의 면모다. 

반고 신화의 이설 가운데는 인간 탄생에 대한 특이한 서사도 담겨 있다. 반고의 몸으로부터 또한 인간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반고의 죽은 몸에 작은 벌레들이 생겨나 기어다녔는데 바람이 이 창조물들을 수태시키자 그들이 인간을 낳았다고 한다. 여와가 흙으로 인간을 빚었다는 창조론적 서사가 많이 알려져 있지만, 나로서는 반고의 몸에서 자연 만물과 인간이 함께 생겨났다는 진화론적 서사가 더 마음을 잡아끈다. 한국 신화에서 금벌레 은벌레가 인간 남녀로 자라났다고 하는 것과 내용이 통한다는 점도 그렇지만, 인간을 포함한 자연 만물의 일원적인 연결성에 대한 사유가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신령한 생명적 연결성이다. 무엇 하나 귀하지 않은 바 없는. 그것이 세상 만유의 존재적 본령인 것 아닐까? 모두가 함께 신의 숨을 쉬고 있는 것이. 그것이 어울려 세계의 큰 숨을 이루는 것이. 

잠시 나가서 바람을 호흡하고 들어와야겠다. 반고의 마지막 숨을. 아니 영원히 새로운 숨을. 

<산천굿> 신화 속의 생명적 이데아

한국 신화를 관심 깊게 살펴보게 되면서, 자연창조에 관한 내용을 이리저리 찾아보았었다. 그리고 실망했었다. 자연 만물의 탄생에 대한 신화적 서사와 만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뒤섞여 하나였던 하늘과 땅이 갈라지면서 세상이 생겨나는 사연은 장엄했지만, 하늘의 청이슬과 땅의 흑이슬, 지상의 황이슬이 어울려 생명적 기운을 펼쳐내는 사연은 계시적이었지만, 거기까지였다. 창세신화에서 인간 이외에 산과 강과 호수, 바위와 돌과 흙, 각종 동물과 식물 등에 대한 구체적 유래담을 볼 수 없는 것은 지울 수 없는 아쉬움이었다.

한국 구전설화에서 자연산천 생성에 대한 서사는 주로 전설 속에 담겨 있다. 산이나 바위, 호수 등의 유래를 전하는 여러 이야기들이 있다. 그 가운데 창조신화와 관련이 깊은 것은 마고할미나 노고할미, 설문대할망 등으로 불리는 대모신(大母神)에 얽힌 이야기들이다. 그 거구의 여신이 몸을 움직이는 데 따라 산과 강, 골짜기 등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설문대할망은 산과 오름, 섬 등을 만들기에 앞서 하늘과 땅을 갈랐다고도 한다. 설문대할망은 물장오리에 빠져 죽었다거나 죽을 쑤던 솥에 떨어져 죽었다고도 하는데, 그 죽을 먹은 아들들이 오백장군 바위절벽이 되었다고 하는 데서는 사체화생 신화의 면모도 보게 된다. 다만 대략 거기까지다. 자연 만물이 곧 여신의 화신(化身)이라는 것은 ‘상상 속의 진실’에 가까운 무엇이다. 

사체화생 서사와 관련해서, 제주도 구전신화 자료 속의 청의동자가 새롭게 눈에 들어왔다. 신화는 땅에서 솟아난 청의동자의 머리 앞뒤로 두 개씩의 눈이 있었으며 천지를 가른 신이 그 눈들을 뽑아서 하늘에 걸자 두 개씩의 해와 달이 되었다고 말한다. 눈들을 가지고 있었으니 살아 있는 생명체였을 것이다. 원시 거인에 해당하는 태초의 푸르른 생명체. 그의 눈들은 해와 달이 되었다고 하거니와, 나머지 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신화는 따로 사연을 전하지 않지만, 그 몸은 산과 바다와 강이 된 것이 아닐까? 또는 구름과 바람과 바위와 돌 같은 것이 되고, 갖가지 동물과 식물이 된 것이 아닐까? 

매우 설득적인 추론이라고 여기고 있지만, 상상 차원의 일이다. 텍스트에 그 내용이 직접 담겨 있지 않다는 점은 못내 아쉬운 일이었다. 그러던 중 뒤늦게 만난 어느 신화자료에서 나의 눈은 둥그렇게 커졌으니, 그것은 함경도 <산천굿>이었다. 이 신화의 이본인 최복녀본 ‘산천도량’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들어 있다.

그때에 붉은선비는 선생님을 하직하신 후에 선간 구경을 가는구나. (…) 일광산에 들어가니 나무들도 유명하다. 뿌리는 아흔아홉이요, 높이는 구천 길이라. 가지는 열두 가지요, 잎은 삼백육십 잎이 되옵시고, 꽃이라도 유명하다 두 포기가 피었는데 한 포기는 거기 두고 한 포기는 떼어내어 하늘에다 띄우시니 이 천하에 피었구나. 월공산에 들어가니 유명하다 이 꽃은 밤에 피는 꽃이로다. 한 포기는 거기 두고 한 포기는 하늘에다 띄우시고. 화덕산에 들어가니 불이라도 서말 서되가 있더구나. 반은 거기 두고 반은 이 천하에 띄우시고. 수용산에 들어가니 물이라도 서말 서되 있더구나. 반은 거기 두고 반은 이 천하에 띄우시고. 금하산에 드러간니 금이라도 두 쌍이 있습니다. 한 쌍은 거기 두고 한 쌍은 이 천하 너른 벌에 팔도 산에 띄우시고. 노루산에 들어가니 노루가 두 필이 있습니다. 한 필은 거기 두고 한 필은 이 천하 너른 벌에 팔도산에 띄우시고. 고사리산에 들어가니 고사리 두 쌍이 있습니다. 한 쌍은 거기 두고 한 쌍은 떼어다가 이 천하 너른 곳에 팔도 산에 띄우시고. 식목산에 들어가니 나무라도 두 쌍이 있습니다. 한 쌍은 거기 두고 한 쌍은 떼어다가 이 천하 너른 벌에 팔도 산에 심으시고. 꽃동산에 들어가니 꽃이라도 두 쌍이 피었는데 한 쌍은 거기 두고 한 쌍은 이 천하 너른 벌에 띄우시고.

주인공인 붉은선비가 하늘로 올라가 선간(仙間)을 구경하는 대목인데, 내용을 보면 단순한 경치 구경이 아니다. 이 세계가 창조되고 운행되는 원리가 그 안에 함축돼 있다. 선간 세계는 일광산과 월공산, 화덕산 수용산, 노루산, 고사리산, 식목산, 꽃동산 등 여러 산들로 구성돼 있는데, 그 산들에 무엇이 있느냐면 이 세상 자연 만물의 원형태가 있다. 일광산 우주목에 두 개의 해가 있고, 월공산에 두 개의 달이 있으며, 화덕산과 수용산 등에 시원적인 불과 물, 광물(금), 동물(노루), 풀(고사리)과 나무, 꽃이 있다. 쌍을 이루고 있는 그들의 한 쪽을 이 천하에 옮겨서 발현한 것이 곧 지상의 자연 만물이 된다. 위 대목에는 빠져 있지만, 인간도 예외는 아니다. 이야기 속의 붉은선비와 영산각시는 천상선간으로부터 온 존재였는바, 거기 ‘인간의 산’도 존재할 것이다. 자연 만물 뭇 생명의 근원이 되는 곳. 산천굿의 저 선간을 일컬어 ‘생명적 이데아’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 신화에서 마음을 강하게 잡아끈 것은 자연 만물의 생명적 연결성에 대한 사유였다. 해와 달부터 노루와 고사리까지 세상 만유의 근원은 하나이며 서로 나란히 연결돼 있다는 것. 일원적이고 수평적인 연결성이다. 본원적 생명계의 현상적 발현으로서 자연 만물은 ‘그림자’가 아니다. 하나의 생명적 실체다. 어느 것 하나 신의 기운과 섭리가 서리지 않은 바 없는. 그것은 거대한 신의 몸이다. 신의 피이고 숨이다. 

2019년 11월에 돈화문 국악당에서 무박 2일로 25시간 넘게 펼쳐진 함경도 망묵굿 장면을 잊을 수 없다. 젊은 만신 이찬엽은 수많은 신들의 내력담을 한숨과 눈물을 섞어서 가없이 펼쳐나갔다. 그가 <산천굿>을 펼쳐낼 때의, 예의 선간구경 대목을 펼쳐낼 때의 그 벅찬 감동이라니! 웅혼한 창세의 서사가, 신령한 생명적 연결의 서사가 눈앞에 생생히 펼쳐지는 그 시간은 오롯한 ‘신화의 시간’이었다. 참고로, 이찬엽 만신이 전승하는 선간구경 서사는 최복녀의 것보다 더 길고 섬세하다. 그의 선간에는 금하산과 함께 은하산도 있으며 말의 산(상마산)과 소의 산(우렁산), 새의 산(조산, 수리산) 등도 있다. 그리고, 말해진 바가 다는 아닐 것이다. 흙과 모래의 산도 있고, 물고기의 산과 곤충의 산도 거기 함께 존재할 것이다. 자연 만물이라 부르는 모든 것들의 시원이…….

시원적 생명계로서 <산천굿> 속 천상선간의 이미지는 천지혼합 상태로서의 태초의 혼돈과는 많이 다르다. 천상계 속에 갖가지 생명의 산(山)들이 어울려 있는 형국이니 하늘과 땅이 생명적 조화를 이루고 있는 모습이다. 세상 만유가 아름다운 시원적 조화를 이뤄내고 있는 곳. 말하자면 그것은 한국 식의 ‘에덴동산’이라고 할 만하다. 그곳은 우리가 나온 곳인 동시에 세상을 떠난 뒤에 돌아갈 곳이기도 하다. 그것은 사라진 낙원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도 어딘가에 실재하는 엄연한 유토피아다. <산천굿> 구술 말미에 이찬엽 만신은 다음과 같은 축원을 올렸는데, 저절로 두 손을 모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탈 저 탈 벗기시고, 일천 탈도 거두시고 일만 탈도 거두시고, 이 길 저 길 나지 말고 선간길 내어 가옵소서. 학을 타고 승천하여, 신선이 되고 도사가 되고 성인이 되어 가옵소서.

이 탈 저 탈 일천 탈 일만 탈, 탈이 하 많은 세상이다. 그것을 다 털어내고서 생명의 본향인 천상선간으로 돌아가 평안히 깃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것은 저절로 되는 일일 리 없다. 이런저런 탈들에 휘둘리고 휩쓸려서 이 길 저 길 다른 길로 가기 십상이다. 신화 속의 붉은선비만 해도 그러했다. 하늘에 올라 본원적인 생명적 섭리를 생생히 목도했음에도 그는 이를 자기 것으로 육화하지 못한다. 인간 중심의 문명적 아집에 휩싸여 자연에 함부로 손을 댔다가 자연신의 분노를 사서 죽을병에 걸리고 만다. ‘산천 동티’로 표현되는 그 병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모든 오만과 독선을 내려놓고 자연산천으로 들어가 무릎을 꿇는 일이었다. 신령한 자연의 일부로 돌아가는 일이었다. 그렇게 신의 몸과 하나가 되자 반전이 펼쳐진다. 죽을병은 사라지고 붉은선비는 한 명의 신이 된다. 신화적 역설이다. 

참고로 <산천굿>에는 사체화생 서사에 해당하는 내용도 포함돼 있다. 신화는 붉은선비의 무리한 개입으로 인해 죽어 쓰러진 자연신 ‘일학이’의 타버린 몸이 팔도 각산의 영(靈)이 되고 나무과 꽃과 돌의 영이 되었다고 한다. 또는 물에 깃들어 물고기가 되었다고 한다. 죽어도 다시 살아나 뭇 생명의 시원이 되고 양식이 되는 신의 몸……. 갸륵하다. 감동적일 정도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거기 눈물이 깃들어 있다는 사실이다. 일학이는 쓰러져 죽기 전에 붉은선비와 영산각시 앞에서 눈물을 줄줄 흘린다. 그 눈물은 바빌론 신화 속 티아마트의 눈물이나 휴런족 신화 속 여신의 눈물과 다른 것일 리 없다. 신의 희생 앞에 경건해지지 않을 때, 천상선간은 없다. 이 탈 저 탈에 휘둘리는 허튼 육신과 미망(迷妄)이 있을 따름이다. 

자연의 말소리를 듣기 위하여

한국 신화에서 자연 만물의 생명적 일원성에 대한 서사는 단지 <산천굿>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창세신화 자료인 <창세가>와 <셍굿>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미륵님 시절에는 나무 돌 짐승 무엇이나 막론하고 다 말을 하였습니다.

그때 그 시절에는 새가 말을 하고 나무들이 걸음 걷고 까막까치 말을 하고, 이런 시절입니다.

신화는 태초의 미륵 시절에 짐승과 새와 나무 돌까지 모든 자연물이 살아 움직이면서 말을 했다고 한다. 말을 한다는 것은 그들이 살아 있는 주체였음을 단적으로 나타낸다. 그것은 사람하고 통하는 말이었을지니, 인간과 자연 만물은 본시 나란히 소통하는 사이였던 터다. 원형적인 생명적 연결성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연결성은 끊어지고 만다. 인간이 나무를 잘라서 불태우고 짐승을 잡아서 구워먹기 시작하면서 벌어진 단절이다. 신화는 그때부터 자연 만물이 말을 잃게 되었다고 하거니와, 진실을 말하자면 그들이 말을 멈춘 것이 아니라 인간이 그들의 말소리를 듣지 못하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오로지 자기들만의 언어를 내지르게 되면서…….

자연 만물의 본연적 공생이 허물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스스로 죽어서 자연으로 거듭났던 신은 지금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까? 그 눈에서 다시 피눈물이 흐르고 있는 것 아닐까? 인간이 모르는 사이에, 자연 만물은 아픔과 억울함으로 비명을 지르고 있는 것 아닐까? 여럿인 동시에 하나인 거대한 신체(神體)는 바야흐로 다시 한번 크게 죽을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닐지. 이 세계에 하나의 큰 재앙일 수밖에 없는 그 시간이 시나브로 다가오고 있는 것은 아닐지. 

나는 느낀다. 자연 만물로 화한 신들이 우리에게 계속 말을 건네고 있다는 것을. 그 목소리가 실망과 무력감으로 아득히 잦아들기 전에 다가가 자연의 말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또는 먼저 말을 걸어야 한다. 그 첫 마디는, ‘고맙다’거나 ‘사랑한다’ 쪽이면 안 될 것 같다. 미안하다고, 잘못했다고 말해야 할 것 같다. 섣불리 손을 내밀어 감싸 안기보다 몸을 낮추고서 그들의 손 내밂을 구해야 할 것 같다. 쓰러져 죽은 신들의 눈물을 생각한다면. 말을 잃어버린 존재가 돼버린 만물의 소외를 생각한다면. 

바라건대, 세상 만유 속의 천상선간이 차락차락 살아나서 하나의 큰 숨결로 이어지기를! 

신동흔 / 건국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 한국문학치료학회장

*** 이 시리즈는 대우재단 대우꿈동산과 함께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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