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세자가 '양극성 장애'를 앓게 된 결정적인 이유

비뚤어진 부성으로 인생이 망가진 한 남자가 있습니다. 세상 가장 엄한 아빠, 그러나 이에 반해 유약했던 아들의 관계는 결국 아버지가 아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결말로 이끌었습니다.

바로 영조와 사도세자의 이야기입니다.

왕이 되는 과정부터 통치 초기까지 흔들렸던 왕권을 본인의 실력과 카리스마로 일으켜 세운 입지전적인 인물 영조.

상대적으로 왕권이 강력했던 시기에 태어난 사도세자.

결국 아들은 아버지의 강고함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어쩌면 흔한 재벌 2세 콤플렉스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왜 이렇게까지 부자 사이가 벌어지게 되었던 것일까요? 이 결국은 아버지가 아들을 뒤주에 가둬 죽이는 지경에 이르렀을까요? 둘의 관계를 제대로 확인하기 위해서는 사도세자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죠.

사랑하는 내 아들아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사도세자는 조선 제21대 국왕인 영조의 두 번째 아들이었습니다. 영조는 정실 왕비에게서는 후사를 보지 못했는데요. 후궁에게서만 2남 12녀를 두게 됩니다. 그런데 첫째 아들이었던 효장세자는 9살의 어린 나이에 요절했죠. 이후 둘째이자 마지막 아들이었던 사도세자가 7년 뒤 태어납니다. 당시 영조 나이가 마흔하나였으니 당시 기준으로는 노년에 아들을 다시 안을 수 있었던 것이죠. 당연히 영조의 기쁨은 엄청났습니다.

“삼종(효종·현종·숙종)의 혈맥이 끊어지려고 하다가 비로소 이어지게 되었으니, 돌아가서 여러 성조(聖祖)를 뵐 면목이 서게 되었다. 즐겁고 기뻐하는 마음이 지극하고 감회 또한 깊다”
- 영조 11년 1735년 1월 21일

아들이 귀했던 영조였기에 후속 작업을 서둘렀습니다. 곧바로 아들을 중전의 양자로 들여 원자로 삼았고 이듬해 왕세자로 책봉해버렸습니다. 조선 역사에서 가장 빠른 기록이었죠. 영조의 아들 사랑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가는 부분입니다.

어린 시절 사도세자는 아버지의 사랑에 보답이라도 하듯 총명한 모습으로 아버지를 기쁘게 했습니다. 만 2세 때부터 글자를 읽을 줄 알았다고 전해집니다. ‘왕’이라는 글자를 보고는 아버지를 가리켰다가 ‘세자’라는 글자를 보고는 자기를 가리키기도 했죠. 자식을 키워본 사람이라면 알 겁니다. 3살 나이에 글자를 읽을 줄 안다니. 자식이 얼마나 이쁘게 보였을까요?

“『효경』에서는 ‘문왕(文王)’이라는 글자를 읽었다. 글씨도 쓸 수 있었다. ‘천지왕춘(天地王春)’이라는 글자를 쓰자 대신들이 서로 다투어 가지려고 했다.”
- 영조 13년(1737) 2월 14일
“종이 12장에 두 자씩 써서 영의정 이광좌(李光佐)를 비롯해 입시한 대신들에게 나눠 주었다.”
- 영조 13년(1737) 윤9월 22일

사도세자는 결혼도 빨랐습니다. 8세 때 세마(정9품)였던 홍봉한의 동갑내기 딸과 혼인을 했는데요. 혼인 상대는 그 유명한 혜경궁 홍씨였습니다. 사도세자는 홍씨와 결혼을 하고 7년 뒤 첫아들인 아들을 낳았지만, 아버지가 첫아들을 잃었던 것처럼 2년 만에 아들을 잃었습니다. 이후 같은 해 다시 둘째 아들을 낳았고, 그 아들이 바로 정조가 되죠.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 | ⓒsbs드라마 <비밀의 문>

사도세자는 어릴 때부터 군사놀이를 즐겨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병서도 즐겨 읽었는데요. 그만큼 무예도 뛰어났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사도세자가 24세 때 장수와 신하들이 무예에 익숙하지 않은 것을 걱정하여 『무기신식(武技新式)』이라는 책을 엮었을 정도로 관심을 넘어 능력도 어느 정도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무예에 대한 관심 때문인지 이때부터 학문과는 조금씩 멀어지게 되는데요. 때문에 아버지와의 갈등도 시작되죠.

ⓒsbs드라마 <비밀의 문>
이래서야 전교 1등 하겠냐 말이야

자수성가의 아이콘 영조는 자신이 스스로 실천했던 엄격한 규율을 아들에게도 요구하게 됩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던 것이죠. 이미 아들이 9살 무렵부터 아버지를 만나는 것 자체를 두려워해야 했으니, 갈등은 꽤 오래 누적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세자의 나이를 생각해 보면 아동학대로도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지속적인 아동학대는 사도세자가 아는 것도 제대로 답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이런 아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아버지는 아들을 도리어 다시 혼내는 상황이 반복되었던 것이죠. 사도세자가 정상적으로 아버지를 사랑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갖기란 불가능한 상황으로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영화 <사도>

영조는 신하들이 보는 자리에서까지 어린 나이었던 아들을 불러놓고 화를 내거나 “이게 다 너 때문이다”라는 식으로 말하기도 했는데요. 심지어 자연재해에 대해서도 “세자가 덕이 없어서 그렇다”고 말하는 식이었습니다. 이 정도면 사도세자가 병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영조가 병이 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죠.

둘 사이에는 큰 장벽이 있었는데요. 바로 성격이었습니다. 한중록에 기록된 아버지와 아들의 성격을 보면, 아버지는 꼼꼼하면서도 급한 성격이지만 아들은 과묵하고 행동이 느렸다고 기록되어 있죠.

그야말로 상극인 성격이었습니다. 아버지가 묻는 말에 아들이 머뭇거리며 대답하면 성격 급한 아버지로서는 아들이 답답하다고만 생각되었던 것이죠.

자꾸 이런 식이면 나 왕 안 할래

하지만 진정한 갈등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제부터가 진짜 갈등의 시작인데요. 바로 사도세자가 대리청정으로 정무에 직접 관여하는 시점입니다. 세자가 14세 때인 영조 25년(1749)에 시작된 대리청정은 영조와 사도세자 관계의 중요한 변곡점이었습니다.

원래 대리청정이라 함은 훌륭한 군주가 되기 위한 훈련을 목적으로 하기에 아버지와 아들 모두에게 기회였습니다. 영조도 이를 노리고 아들의 기질을 사전 훈련 차원에서 확인하고자 했던 것이었죠.

하지만 사도세자의 입장은 조금 달랐습니다. 대리청정 시작되기 전 이미 이상한 전조 현상이 있었기 때문이었죠. 대리청정이 시작되기 전까지 영조는 다섯 차례에 걸쳐(재위 15년 1월, 16년 5월, 20년 1월, 21년 9월, 25년 1월)의 양위 의사를 밝혔었습니다. 이른바 ‘양위 파동’이죠. 그때 사도세자 나이가 각 4, 5, 9, 10, 14세였습니다.

어린 세자는 ‘양위 파동’ 때마다 긴장하고 두려워하면서 아버지에게 철회를 애원해야 했습니다. 심지어 대리청정이 시작된 뒤에도 세 번의 ‘양위 파동’이 있었으니, 세자의 스트레스가 극에 달할 수밖에 없었죠.

영조는 ‘양위 파동’을 통해 신하들의 충성을 검증하고자 했습니다. 이를 통해서 왕권을 강화하고 정치적인 안정을 찾으려 했던 것이죠. 조선에서는 정국전환용으로, 혹은 신하들에게서 기선을 제압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양위 파동’을 이용하고는 했습니다. 영조도 마찬가지였죠. 실제로는 양위 의사 없음을 왕도 알고, 신하도 알고, 아들인 사도세자도 알고 있는 겁니다.

ⓒ영화 <사도>

그럼에도 아들과 신하는 양위를 만류해야만 긴 우여곡절 끝에 다시 제자리도 돌아오는 거죠. 이 과정을 사도세자는 4살 때부터 주기적으로 겪어야 했던 겁니다. 결국 사도세자는 20세 무렵 부왕을 극도로 두려워하는 정신적 질환에 걸렸던 것으로 보입니다. 대리청정 후로는 아버지가 아들을 더욱 질책하는 자리가 많아졌죠.

상황은 악화일로를 걷게 됩니다.

사도세자는 어떤 병을 앓고 있었을까?

사료에 기록된 사도세자의 상태를 현대 정신의학적 관점으로 해석해보면 ‘양극성 장애’로 진단할 수 있습니다.

‘양극성 장애’란 과하게 기분이 들뜨는 조증과 가라앉는 우울증의 감정 상태가 불규칙적으로 반복되는 질환인데요. 사도세자는 이 질환을 매우 어린 나이부터 앓았을 것으로 보여 집니다.

사도세자는 13세~14세까지 우울 증상과 불안 증상 등과 함께 환각 증세 같은 정신병적 증상을 보이는데요. 17세~19세까지는 ‘불안 증상’이 더 심해지는 상황으로 이어 집니다. 이후 20세~21세에는 우울감, 기분과민성, 흥미 저하, 의욕저하 현상이 나타나며 기분장애로 인한 정신 기능 저하 등이 겹쳐지면서 우물에 투신하는 등의 자살 시도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22세가 되면 폭력적이고 충동적인 모습까지 나타나기 시작하는데요. 판단력 저하와 함께 조증까지 얻게 되었죠.

이 시기부터에 사도세자는 특별한 이유 없이 내관과 나인 여러 명 죽이기도 했습니다. 25세~26세 때 이러한 폭력적인 행동은 더욱 두드러지는데요. 조증과 우울증 증상을 번갈아 보이기도 했습니다.

ⓒ영화 <사도>
“소조께서는 날이 흐리거나 겨울에 천둥이 치면, 또 무슨 꾸중이나 나실까 근심하시고 염려하여 일마다 두렵고 겁을 내므로, 사악하고 망령된 생각이 다시 들어 병이 점점 깊어지는 징조가 드러났다”
- 한중록, 영조24년(1748년)의 기록
“늦은 밤에 정신이 어둑하시어 ‘뇌성보화천존이 보인다’ 하시고 무서워하시며, 이로 인하여 병환이 깊이 드시니 원통하고도 서럽다.”
- 한중록, 영조24년(1749년)의 기록
“나는 원래 남모르는 울화의 증세가 있는 데다, 지금 또 더위를 먹은 가운데 임금을 모시고 나오니, (긴장돼) 열은 높고 울증은 극도로 달해 답답하기가 미칠 듯합니다. 이런 증세는 의관과 함께 말할 수 없습니다. 경이 우울증을 씻어 내는 약에 대해 익히 알고 있으니 약을 지어 남몰래 보내 주면 어떻겠습니까.”(1753년 또는 1754년 어느 날)
“나는 한 가지 병(病)이 깊어서 나을 기약이 없으니, 다만 마음을 가라앉히면서 민망해할 따름입니다” (1756년 2월 29일 21세 때 사도세자의 편지)
“어머님의 병환을 뵈러 가셨다가 아무런 잘못하신 일도 없이 그렇게 되셨으니, 섧고 원통하여 ‘자살하련다’ 하시고 겨우 진정은 하셨다”
- 한중록, 영조31년(1755년)의 기록
“경모궁께서 소리 높여 ‘(중략) 저런 놈들을 무엇에 쓰리요!’ 하고 다 쫓으시니, 그 지나치신 거동과 모습이 어떠하셨겠는가?”, “그 날 그 일을 지내시고 가슴이 막히셔서 청심환을 잡숫고 기운을 내시며 ‘아무래도 못살겠다’ 하시고서, 저승전 앞뜰에 있는 우물로 가셔서 떨어지려 하시니, 그 놀라운 상황과 위태로운 모습이야 이를 것이 어디 있으리요. 가까스로 구하여 덕성합으로 나오시게 했다”
- 한중록, 영조32년(1756년)의 기록
“6월부터 화증이 더하셔서 사람 죽이기를 시작하셨는데, 그 때 당번내관 김환채를 먼저 죽여 그 머리를 들고 들어오셔서 나인들에게 효시하시매, 내가 그 때 사람의 머리 벤 것을 처음 보았으니, 흉하고 놀라움에 어찌 이를 수가 있으리요. 사람을 죽이고야 마음이 조금 풀리시는지, 그 때 나인 여럿이 상하시매”,
- 한중록, 영조33년(1757년)의 기록
병에 걸린 아들을 죽음으로까지 몰고 간 아버지

이른바 ‘임오화변’으로 불리는 사도세자의 죽음은 그의 나이 28살에 일어났습니다. 세자의 비리를 영조에게 알렸던 나경언이라는 관료가 무고 혐의로 참형에 처해지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문제는 그 사건으로 인해 사도세자의 정신병적 행동들을 자세히 알게 되었죠. 그리고는 아버지는 아들을 세자 자리에서 폐한 뒤 서인으로 삼고, 뒤주에 가두어 버립니다. 아들이 뒤주에 가두고 아버지는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왕으로서의 업무를 봅니다.

ⓒ영화 <사도>

9일 뒤 결국 아들은 9일 만에 세상을 떠났죠. 아버지는 아들의 장례 절차를 빠르게 진행합니다. 그리고는 곧장 세손을 동궁으로 책봉합니다. 그리고 세손에게는 “아비를 추숭하지 말라”고 엄포를 놓죠.

아버지와 아들은 그렇게 죽어서까지 화해하지 않았습니다. 그걸 지켜 손자의 마음이 어땠을지 짐작조차 가지 않죠. 그의 나이 11살이 때 아버지가 할아버지의 고집으로 죽었던 것이죠.

그 어린 나이에 할아버지에게 아버지를 살려 달라고 매달려야 했던 그의 마음은 성인이 된 이후에도 치유가 되었을까요? 살아생전 할아버지를 바라보던 그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우리가 알았던 영조와 정조의 모습과는 조금 다른 할아버지, 아버지, 그리고 손자의 이야기였습니다.

*책 <세상에서 가장 짧은 한국사>를 참고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