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간식 '호떡', 알고 보니 오랑캐 음식!?

벌써 겨울입니다. 길거리에 겨울 간식을 파는 가게들이 문을 열기 시작합니다. 호호 불어먹는 호빵부터 붕어빵, 그리고 꿀 한가득 머금고 기름에 눌려 튀겨진 맛있는 호떡까지.

퇴근길, 그리고 하굣길의 허기진 배를 채워주는 든든한 간식들이 모습을 드러낸 겁니다. 카드생활에 익숙한 우리들에게도 현금을 준비해야 할 이유를 주는 음식들이죠.

너무 뜨거워 입천장이 다 까지게 호떡을 한 움큼 입에 넣다 보니 문득 궁금증이 폭발합니다. 호떡은 왜 호떡인가. 호빵이랑 다르게 생겼는데 왜 똑같이 “호”로 시작할까? 

둘 다 뜨거워 ‘호호’ 불어서 먹으라고? 그럼 왜 붕어빵은 호어(漁)빵이 아닐까?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어 기어코 호떡의 역사를 파헤치게 만들죠. 여러분도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오랑캐의 음식이라는 뜻, 호(胡)떡

호떡에 붙은 “호”는 호빵 앞에 붙은 “호”와는 다릅니다. 호빵에 붙은 “호”야 말로 ‘호호 불어서 먹는다’는 뜻의 의성어 “호”입니다. 

호떡과는 다른 계열인 겁니다. 그럼 호떡 앞에 붙은 “호”는 무슨 뜻일까요? 놀랍게도 이것은 한자입니다. 

바로 오랑캐 호(胡)를 의미하는 것이죠.

ⓒtvN <수요미식회>

그렇습니다. 호떡은 오랑캐들이 먹는 음식이라는 뜻입니다. 이 음식이 언제, 어디에서 왔는지는 여러 가지 ‘썰’이 난무합니다만, 이름에서부터 강하게 풍기는 느낌이 있죠. 바로 중국 어딘가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그 느낌 말입니다. 

한 ‘썰’에 의하면 호떡은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으로 들어왔다가 한국으로 유입된 음식이라고 말합니다. 중국에서도 한인들의 음식이 아니라, 중국인 입장에서도 오랑캐(胡)였던 지역에서 먹던 음식이라는 겁니다. 

중국에서는 호떡을 후삥(胡餠)이라고 부르는데요. 이 ‘썰’에 의하면 호떡의 기원은 소병(燒餠)이라는 음식입니다. 원래 소병은 소를 넣은 밀가루 반죽을 화덕에서 굽는 중앙아시아 지역 음식이죠.

밀이 주 식재료였던 중앙아시아 지역의 다양한 민족들은 밀가루를 반죽해 화덕에 구워 먹었습니다. 호떡은 중국인들이 한나라를 거쳐 당나라, 그리고 송나라 때까지 유행을 타며 즐겨 먹던 음식입니다. 오랜기간 중원에서 불던 호풍(胡風)의 상징과도 같은 음식이었죠. 

식민지 조선의 화교들, 간식의 트렌드를 바꾸다

그럼 한국 땅에서는 언제부터 이 호떡을 먹었을까요? 

대부분의 ‘썰’에서는 1880년대 말 임오군란으로 조선 땅을 밟은 청군과 함께 들어온 음식으로 이야기합니다. 청나라가 망하고, 조선도 일본에 강제 병합되었지만, 호떡은 조선 땅에서 중국인 노동자들에 의해 전국적으로 퍼져 나가게 되었죠. 

1920년대 조선은 중국인 노동자 숫자가 급격히 늘어나게 됩니다. ‘세계대공황’의 여파가 일본을 거쳐 중국 땅에도 미치게 되었고 중국인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찾아 그나마 상황이 나았던 조선 땅으로 밀려오게 되었던 겁니다. 중국인 노동자, 즉 ‘화교 노동자’들이 늘어나면서 이들을 상대로 한 호떡 장사가 전국 곳곳에서 성행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호떡의 모습은 지금의 호떡과는 달랐습니다. 애초에 화덕에서 굽는 소병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밀가루 반죽 속에는 고기나 채소가 들어갔죠. 하지만 점점 호떡 가게들은 조선인의 입맛에도 맞는 음식을 팔아야 했습니다. 

결국 호떡 가게들이 살아남기 위해 던진 승부수는 조청, 꿀, 설탕 등의 달콤함이었습니다. 자고로 간식은 달아야 하거늘, 고기나 채소 따위가 들어갈 틈을 줄 수 없었던 것이죠. 

인천 제물포 지역에서 팔기 시작한 현재 한국 스타일의 호떡은 점차 세를 확장합니다. 한번 유행을 타자 드디어 경성 땅으로까지 들어오게 된 것이었는데요. 경성에서 화교들이 주로 모이는 명동의 중국 대사관 주변이나 종로 거리를 장악해 나갑니다. 스타일을 바꾼 호떡은 1940년대 경성에 150여 개의 호떡 가게가 생겼을 만큼 성행하게 됩니다. 

경성 땅을 밟다 못해 열풍과도 같은 트랜드를 만들어 낸 호떡 가게들은 전국으로 발을 뻗어나갑니다. 주로 중국인 노동자들이 많은 항만도시를 중심으로 차이나타운을 거점에 두고 유행을 만들어 갔죠. 호떡집 앞에 길게 늘어선 행렬을 보고 “호떡집에 불났다”라고 표현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습니다. 

오죽했으면 당시 조선인이 발간하는 잡지에서 배고프면 “우동집이나 호떡집에 가지 말고 설렁탕이나 장국밥집에를 가라”(1922년 11월호 잡지 「개벽」)고 할 정도로 중국인 노동자들의 음식이 조선인들의 입맛을 사로잡았던 겁니다. 

간식 팔아 돈을 번 화교들이 밟은 다음 스텝

식민지 시기 중화요리집은 크기에 따라 단계가 있었습니다. “대형 중화요리점”으로 불리는 곳은 종업원이 족히 20~30명을 넘겼죠. 서울의 아서원(雅叙園), 인천의 공화춘(共和春)이 대표적인 곳이었습니다. 이곳에서는 베이징 요리와 광둥 요리같은 고급 요리를 내었죠. 

“중화요리음식점”이라고 불리던 중형 식당들은 대형음식점에 비해 규모가 작았습니다. 종업원의 숫자도 10명 이하였고, 메뉴의 느낌은 지금 우리가 흔히 동네에서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중국집’ 수준이었죠. 

가장 아래 단계에 있던 중화요리집이 바로 “호떡집”이라고 불리던 곳이었습니다. 이곳은 대부분 주인이 혼자 영업을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가난한 중국인 화교들은 바로 이 “호떡집”으로 장사를 시작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KBS1 <김영철의 동네 한바퀴>

하지만 ‘호떡집에 불이 나기 시작’하면서부터 이야기는 달라졌죠. 간식으로 짭짤하게 돈을 번 화교들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는 다 계획이 있었는데요. 바로 중국 음식점으로의 확장이었습니다. 

당시 잡지에는 “작년의 호떡 장사가 금년의 요리옥 영업자 되는 것도 또한 무리가 아니요.”(1927년 2월 「별건곤」 잡지)라고까지 표현했을 정도였습니다. 차이나타운을 중심으로 호떡집이 중·대형의 중화요리집으로 ‘발전적 해체’를 단행한 겁니다. 여러분들 주변의 ‘노포 중국집’의 역사를 훑어보신 적이 있나요? 혹시 모르죠. 그 노포의 1대 사장님도 호떡 장사로 시작하셨을지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