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카피바라
[경향신문]

평화롭고 아늑한 농장에 낯선 동물들이 찾아온다. 커다란 쥐의 생김새를 한 ‘카피바라’다. 원래 살던 곳에 사냥꾼들이 몰려들자 헤엄쳐 도망왔다. 농장에 사는 닭들은 카피바라 무리에게 엄격한 규칙을 요구한다. 소란스럽게 굴지 말 것, 물 밖으로 나오지 말 것, 먹을거리에 손대지 말 것, 규칙에 대해 불평하지 말 것. 하지만 어느 날, 카피바라가 개에게 공격받는 병아리를 구하면서 닭과 카피바라 사이의 벽은 무너져내리기 시작한다. 우루과이 작가 알프레도 소데르기트의 그림책 <카피바라가 왔어요>의 줄거리다. 소데르기트는 타자에 대한 경계와 배제, 그러나 우연한 기회에 경험하는 작은 연대, 이로 인해 달라지는 약자들의 삶을 동화로 그려냈다.
카피바라(Capybara)는 남아메리카에 분포하는 설치류다. 파라과이의 원주민 언어이자 스페인어와 함께 공용어로 쓰이는 과라니어로 ‘초원의 지배자’라는 뜻을 갖고 있다. 현존하는 설치류 중 가장 몸집이 큰 만큼 꽤 어울리는 이름이다. 카피바라는 물과 육지를 자유로이 오가며 잠수와 수영에 능하다. 온순하고 친화력이 좋은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어떤 동물과도 쉽게 친해지고, 사람과도 잘 어울린다. 걸그룹 블랙핑크 멤버 제니와 함께 뮤직비디오에 등장하기도 했다.
이런 카피바라가 아르헨티나의 부촌에선 ‘공적’이 되고 있다고 한다. 영국 가디언에 따르면, 부에노스아이레스 북쪽의 부촌 노르델타에 카피바라들이 출몰해 잔디를 망치고 교통사고를 유발하자 일부 주민들이 사냥용 소총까지 꺼내들고 대응에 나섰다. 그러나 환경단체들은 노르델타가 카피바라 서식지인 습지를 파괴하고 건설된 만큼, 노르델타가 카피바라의 생태계에 침입한 것이라고 비판한다. 여기에다 계급 문제까지 섞여들고 있다. 노르델타가 아르헨티나에서 가장 유명한 ‘게이티드 커뮤니티(Gated Community)’여서다. 게이티드 커뮤니티란 외부인 출입을 차단하는 폐쇄적 주택단지를 가리킨다. 소셜미디어에는 카피바라를 계급투쟁의 선봉으로 묘사하며 응원하는 글도 올라온다고 한다. ‘동물계의 핵인싸’ 카피바라가 생태와 환경, 격차와 불평등이란 인간사회의 핵심 이슈를 온몸으로 일깨우고 있다.
김민아 논설실장 ma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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