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 다니다 보면 일에 치이고, 사람에 치이기 부지기수다. 양심에 손을 얹고 단 한번도 회사 욕을 한 적 없는 사람은 대한민국 전체에서 열 손가락에(!) 꼽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사실 속상한 마음을 시원하게 털어놓을 곳은 마땅치 않다. 친구에게 회사 사정을 하나하나 다 설명하면서 털어놓을 수도 없고, 직장 동료에게 말하기엔 혹시나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가 될까봐 두렵다.
같은 회사·직무·직급의 사람들과 익명의 가면 뒤에서 자유롭게 고충을 나눌 수 있는 직장인 익명 커뮤니티가 활성화된 까닭도 여기 있다. 시장조사전문기업 엠브레인 트렌드모니터가 지난 9월 전국 만 19세~59세 직장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직장인 익명 커뮤니티' 관련 인식 조사를 실시한 결과, 전체 응답자 4명 중 1명(25.3%)은 커뮤니티를 실제로 이용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그런데 해우소 역할을 해온 직장인 커뮤니티가 최근 회사 내 골칫거리로 새롭게 부상한 이유는 무엇일까.
직장, 직무, 직급.. 세부화된 커뮤니티

블라인드, 리멤버, 잡플래닛은 직장인들이 익명으로 회사 얘기를 털어놓는 대표적인 플랫폼이다. 블라인드는 회사 이메일 인증을 거쳐야만 사용할 수 있는 익명 커뮤니티 앱(애플리케이션)이다. 게시물 및 댓글을 작성할 때, 회사 이름 외의 개인정보는 나타나지 않는다. 회사 이야기 외에도 재테크·연애·쇼핑 등 다양한 주제의 게시판이 마련된 것이 특징이다. 운영사 팀블라인드에 따르면 2013년 서비스를 시작한 블라인드는 올해 3월 기준 가입자 수가 430만 명을 돌파했다.
명함관리 앱 리멤버는 같은 직무 사람들끼리 소통할 수 있는 '리멤버 커뮤니티' 기능을 지난해 3월 추가했다. 직무, 직급, 사업군 등 회사와 관련한 라운지가 중심이고 다른 사적인 분야의 커뮤니티 기능은 최소화한다. 직장 평판 사이트 잡플래닛은 가입 조건으로 직장에 대한 평가를 남겨야 한다. 상호 소통이 가능한 커뮤니티 형식은 아니지만 익명으로 남겨진 평가에는 회사의 속사정이 속속들이 드러난다. 2020년 12월 기준 잡플래닛의 기업 평판 정보는 527만 건을 기록했다.
이외에도 대학생 익명 커뮤니티 앱인 에브리타임 내 '졸업생 게시판'을 통해 대학 동문들과 사회의 고충을 나누거나 네이버 카페 '팀장클럽' 등 같은 직급·직무의 사람들끼리 개별적인 커뮤니티를 형성하기도 한다. 엠브레인 설문 결과 전체 응답자 2명 중 1명(47.9%)은 요즘 직장인들에게 직장인 익명 커뮤니티가 반드시 필요한 존재라고 대답했다.
대나무숲 넘어 HR 관리까지
직장인 커뮤니티는 직장생활을 하며 쌓인 감정을 해소하고, 의견을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공간이 된다. 엠브레인의 조사에 따르면 실제 직장인들이 커뮤니티에서 주로 작성한 게시물은 ▶복지제도 문제(39.7%, 중복응답)▶이기적인 동료 및 임직원(35.9%)▶차별적인 대우(29.5%) 등에 관한 것들이었다.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는 윤모씨(25)는 "회사에 대한 불만을 지인들에게 말하는 것보다 회사 사람들이랑 익명으로 말하니 더 공감이 가고 위로받는다"라고 밝혔다.

나아가 회사명을 밝히고 글을 쓸 수 있는 앱 블라인드에는 고발성 게시글이 종종 올라온다. 지난 2014년에 조현아 전 대항항공 부사장의 '땅콩 회항' 사건 또한 블라인드를 통해 처음 알려졌다. 한편, 지난 8월 블라인드에는 카카오 임직원 10여 명이 사내에서 '술판'을 벌였다는 폭로글이 올라왔다. 이는 사실로 판명돼 관할 지자체인 성남시는 방역법 위반으로 해당 임직원들에게 과태료를 부과했다. 단순히 불만을 제기하는 것을 넘어 사내 부조리를 제기하는 공론장이 된 것이다.
기업은 익명 커뮤니티에 올라오는 임직원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 조직 문화를 개선하는 데 참고하기도 한다. SK텔레콤, 네이버 등은 올해 초 익명 커뮤니티에서 성과급 논란이 불거지자 공식적으로 최고경영진과의 대화 자리를 열어 대응했다. 황희승 잡플래닛 대표는 2019년 DBR와의 인터뷰에서 "잡플래닛 콘텐츠에 관련 키워드가 언급되는 빈도나 맥락을 파악해 (기업의) 위기 징후를 감지한다"며 "많은 기업이 리뷰를 추적 관찰하면서 다수의 임직원이 공통으로 언급한 불만 사항에 대해 개선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고 밝혔다.
기업들은 골머리 앓는 '커뮤니티 리스크'

순기능에도 불구하고 익명 커뮤니티가 가지는 고질적인 문제는 직장인들의 커뮤니티에서도 어김없이 벌어진다. 구성원들이 자유롭게 의견을 내는 과정에서 근거없는 '카더라'가 기정사실처럼 여겨지는 것이 대표적이다. 회사내 특정인을 묘사하면서 비난한다거나 사내 인물 간의 불륜 관계 등을 전달하는 식이다. 지난 6월 블라인드에는 기업 로비에서 여성간 머리채를 잡고 실랑이를 벌이는 사진이 올라왔는데, 사실 관계가 파악이 안 된 당사자들의 신상 정보와 과거사 등이 무분별하게 퍼진 바 있다.
기업 입장에서도 평판 관리에 애먹는 것이 사실이다. 회사 이름을 단 익명의 작성자의 의견이 회사 전체를 대변하는 것처럼 보여서다. 지난 1월 KBS 직원으로 추정되는 이용자는 블라인드에 "밖에서 우리 직원들 욕하지 마시고 능력되시고 기회 되시면 우리 사우님 되세요"라고 조롱하는 글을 올렸다. 두달 뒤에는 3기 신도시 지역에 대한 한국토지주택공사(LH) 직원들의 투기 의혹이 제기된 가운데 LH 직원이 “아니꼬우면 (LH로) 이직해라”는 글을 써 파장이 일었다. 여론이 악화되자 KBS와 LH는 공개적으로 사과했다. 한편 회사 대외비로 취급되는 조직 문화, 근무 환경이 공유되기도 한다.
이에 기업들은 익명 커뮤니티를 검열하거나 이용 자체를 막는 경우도 있다. 잡플래닛에 올린 리뷰 작성자를 찾기 위해 인사팀이 전 직원을 잡플래닛에 로그인시키거나 블라인드 앱 가입을 막기 위해 회사 차원에서 블라인드 가입 메일을 차단하는 식이다.

하지만 '커뮤니티 리스크'가 두렵다고 이용을 막는 것은 근본적인 대책이 아니다. 임직원들이 솔직하게 소통하는 창구 기능을 활용만 잘하면 기업에 '입에 쓴 약'으로 쓸 수도 있어서다. 마이크로소프트 미국 본사는 신규 입사자 교육 자료로 기존 직원들이 블라인드에서 토론한 내용을 활용해, 직원들이 오해할 수 있는 부분에 대한 회사의 입장을 충분히 설명한다. 문성욱 팀블라인드 대표는 DBR에 쓴 기고문에서 "기업에 존재하는 불합리한 요소에 대한 비판적 의견은 기업이 건설적인 방향으로 성장하기 위한 필수 과정"이라고 강조했다.
제작 조지윤
디자인 조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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