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식, 입이 저지르고 입이 해결하는 죄 [박상진의 우리 시대의 단테 읽기 ④]

박상진 부산외대 이탈리아어과 교수 2021. 12. 17. 2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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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울수록 모자라는 욕망, 나눌수록 늘어나는 공유..무엇을 택할 것인가

[경향신문]

대식가들은 지옥과 연옥에서 고통받는다. 단테와 베르길리우스가 지옥의 셋째 고리에서 일정하게 내리꽂히는 비를 받아먹으며 진흙탕 속에서 뒹구는 대식의 죄인들을 내려다보고 있다(왼쪽, 조반니 스트라다노 ‘탐식가들’). 연옥에서는 대식의 죄를 씻는 말라비틀어진 영혼들이 갈증과 굶주림을 단테와 베르길리우스에게 호소하고 있다(오른쪽, 귀스타브 도레 ‘대식의 죄’).
나는 셋째 고리에 있다. 무겁고 차가운,
저주받은 영겁의 비, 규칙과 성격이
결코 새로워지지 않는 비가 내린다.
거대한 우박과 구정물, 그리고 눈이
어두운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고
이를 받아들이는 대지는 악취를 뿜어낸다.
([지옥] 6곡 7-12행)

■대식의 죄인들이 진흙탕에서 뒹굴다

단테는 지옥의 셋째 고리에 내려가 영원토록 변함없이 쏟아지는 비, 우박, 구정물, 눈이 뒤섞인 진흙탕에서 뒹구는 대식가들을 발견한다. 세상에서 먹는 일에만 몰두하다 죽은 자들이다. 뱀 껍질에 머리가 셋 달린 개 케르베루스가 사납게 짖어대며 세 개의 아가리로 이들을 물어뜯고 찢어발긴다. 세상에서 음식을 게걸스레 입에 처넣었던 이들의 거친 동작이 케르베루스에게 고스란히 옮겨지고 있는 중이다. 이제 케르베루스는 대식의 상징이 되어, 일찍이 대식가였던 이들을 대식의 제물로 만든다.

케르베루스와 똑같이 개처럼 울부짖는 이들의 몸이 찢겨나가고 피가 튄다. 세상에서 먹었던 음식을 토하고 배설하여 진흙탕은 참을 수 없는 악취를 풍긴다. 곤죽이 된 이들의 몸은 진흙탕과 구분되지 않아 세상에서 배 속에 넣었던 음식과 비슷한 상태가 된다. 살아 있을 적에 누렸던 먹는 즐거움이 사실은 짐승의 속성이었음을 다른 세상에서 절실하게 깨닫는다.

음식을 먹고 소화시키고 필요 영양소를 추출하고 찌꺼기를 배출하는 대사(代謝) 기능은 몸을 떠받치는 기본이다. 이 순환이 잘되면 기분이 좋지만, 대식은 몸의 쾌적한 질서를 무너뜨린다. 대식가들이 벌을 받는 현장은 바로 망가진 몸 상태를 그대로 재현한 것이다. 거기서 인간의 고귀함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인간의 고귀함은 지성과 윤리로 완성되지만, 그 출발은 생명이 시작되고 유지되는 몸이다. 몸이 맛의 노예가 될수록 마음은 빈곤해지고, 많이 먹을수록 영혼은 신에게서 멀어진다. 살면서 더 관심 갖고 실천해야 할 문제들에 앞서 먹는 일에 급급하다면, 그리하여 세상과 적절한 관계를 맺지 못한다면, 인간의 고귀함은 허물어질 수밖에 없다.

■음식은 입으로 들어가고 말은 입에서 나온다

단테는 지옥에 떨어진 대식가들 사이에서 피렌체의 부유한 은행가이던 차코(Ciacco)를 발견했다. 너무 먹고 마신 나머지 실명했다고 한다. 한쪽은 굶주리고 있고, 한쪽은 지나치게 먹고 있다. 권력·자본·자원을 독차지하려는 ‘대식의 욕심’은 아이의 굶주린 모습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몸이 맛의 노예가 될수록 빈곤해지는 마음…부패한 권력도 바로 ‘대식의 욕망’에서 기인
음식을 넣는 대신 말을 내보내는 입…‘말하는 일’로 좋은 공동체를 도모하는 것이 정치와 문학
단테가 말하는 ‘천국의 다이어트’는 의로운 일에 굶주리기…소유 제한·공공성 확장에 중점

단테가 지옥의 대식가들 사이에서 발견한 차코(Ciacco)는 피렌체의 부유한 은행가였다. 너무 많이 먹고 마셔서 실명했다고 한다. 돼지를 뜻하는 ‘차코’라는 이름은 경멸적인 별명일 가능성이 크다. 그가 죽기 전에 살았던 피렌체를 “달콤한 세계”나 “평온한 생활”이라 부르며 아무리 그리워해도 지금 당하고 있는 끔찍한 고통에서 빠져나갈 가능성은 영원히 없다.

한편, 연옥의 여섯째 고리에서 대식가들이 당하는 고통은 지옥의 대식가들과 다르다. 지옥의 물이 진흙탕을 만드는 반면, 연옥의 물은 향기롭고 깨끗하게 흘러내린다. 지옥의 대식가들은 진흙탕을 채운 구정물과 배설물을 들이켜는 반면, 연옥의 대식가들은 물과 과일을 눈앞에 두고도 먹지 못한다.

한쪽은 너무 먹어야 하고, 한쪽은 너무 못 먹는다. 상반된 형벌을 당하는 그들의 공통점이라면 입을 말하는 데 사용한다는 점이다. 지옥의 그들은 세상의 정치를 말하고 연옥의 그들은 문학을 말한다. 정치가와 시인은 말을 절제하고 세련해야 한다. 정치는 사람을 말로 설득하는 기술이 필요하고, 문학은 말로 세상을 묘사하고 소통시키기 때문이다. 입은 음식을 넣어 대식의 죄를 저지르지만, 또한 말을 내보내 좋은 공동체를 도모한다.

이처럼 단테는 대식의 죄를 먹는 일에 더해 말하는 일에 관련하여 다룬다. 말을 하기 위해서는 호흡이 필요하다. 호흡은 대사와 더불어 생명 유지의 필수 요소다. 단테는 사랑의 정령이 안에서 불러주는 대로 받아적는 것을 창작의 원리로 삼았는데, 이때 불러주는 행위는 곧 호흡을 뜻한다([연옥] 24곡 52-54행). 단테는 호흡으로 시를 쓰고, 독자에게는 음식을 잘 소화하듯 자기 시를 읽으라고 한다([천국] 10곡 22-27행). 잘 소화된 시가 좋은 공동체의 양분이 되기를 염원하면서.

■암늑대의 허기진 목구멍을 보라

지옥에 떨어진 대식가들이 너무 많이 먹어야 하는 끔찍한 형벌을 받는 것과 대조적으로 연옥에 오른 대식가들은 너무 못 먹어 뼈에 가죽만 걸치고 먹을 것을 갈망하는 고통을 겪고 있다. 그들은 거꾸로 박힌 나무에 주렁주렁 달린 과일을 올려다볼 뿐, 따먹지를 못한다. 그래도 연옥은 먹을 것을 눈앞에 두고도 먹지 못하는 고통을 거쳐 죄를 씻고 나면 천국으로 오르는 희망의 장소다. 그렇기에 그들은 고통을 참아낼 이유가 있다.

그런데 우리 시대 지구 반대편에서 뼈와 가죽만 남은 아이들 사진을 보면 그들이 고통을 참고 참아 마침내 천국으로 향하는 연옥에 살고 있다는 생각은 도무지 들지 않는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우리 주변에도 끼니를 거르는 노인, 어린이, 노숙자들이 있다. 이생망. 이번 생은 망했다. 이번 생은 이렇게만 이어지다 끝나고 말 것이다. 이들은 진흙탕을 짐승처럼 뒹구는 지옥의 형벌과, 먹지 못해 말라비틀어지는 연옥의 형벌을 한꺼번에 받고 있다. 다만, 이들은 죄가 없다. 그러니 그야말로 이생망이다.

기아는 지금 우리에게 닥친 긴급한 문제다. 그 원인은 부패한 정치와 기후변화다. 부패한 정치는 폭식을 일삼는 사람과 굶어죽는 사람을 뚜렷이 구분하여 양산하고, 기후변화는 이미 골이 깊은 양극화 문제를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 기후변화에 대응하는 재정, 자원, 능력이 부족한 나라는 정치 부재로 인한 부패와 폭력에 휩싸이고, 거기서 오는 피해를 고스란히 되돌려 받는 기후 난민의 숫자는 계속 불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식량 증산보다 기후변화에 단호하게 대처하는 정의로운 정치력이야말로 기아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다. 공동체의 분열과 정치의 실종은 기본적으로 대식의 욕망에서 기인한다. 권력과 자본, 자원을 독점하고 배제하려는 욕망이다. 단테는 먹고 나면 전보다 더 큰 허기를 느끼는 암늑대의 허기진 목구멍으로 대식의 욕망을 묘사한다([지옥] 1곡 99행). 아이의 굶주린 목구멍과 극적으로 대조되는, 끝이 보이지 않는 그 시커먼 목구멍!

■천국의 다이어트는 나눔과 돌봄이다

단테가 연옥에서 만난 한 영혼은 이런 진술을 남긴다.

“오, 인간 족속이여, 공유의 배제가
당연한 곳에 어찌하여 마음을 두는가?”
([연옥] 14곡 86-87행)

공유라는 개념은 사회의 한정된 재화와 용역을 함께 누린다는 의미다. 자본과 노동이라는 기본 토대부터 병원, 철도, 공원, 도서관과 같은 공공시설과 그에 관련된 공무 행위까지 포함한다. 공유하지 않으면 재화와 용역은 한 곳으로 집중되어 지식과 부와 권력이 편중된다.

위 인용문에서 연옥의 영혼은 그렇게 편중된 사회에 미련을 두지 말라 하는데, 이는 반어법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공유가 이루어지지 않는 사회를 교정하려는 마음을 버리지 말아야 한다. 이런 면에서 베르길리우스의 다음 발언은 솔깃하다.

“너희의 욕망은 함께 나눠서
몫이 줄어드는 곳에 초점을 맞추니,
질투는 호흡하는 바람통을 움직인다.
그러나 최고 천구(天球)의 사랑이
너희의 욕망을 위로 들어 올린다면,
가슴에 그런 두려움은 없을 것이다.
‘우리 것’이라 말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각자가 갖는 선도 더 많아지고
저 수도원에서 자비가 더 타오를 테니.”
([연옥] 15곡 49-57행)

한정된 지위와 재화, 명예, 권리는 나누면 나눌수록 줄어든다. 인간의 욕망은 나눌수록 줄어드는 자기 몫에 몰두하기 때문에 더 많은 몫을 차지한 누군가를 질투할 수밖에 없다. 욕망과 질투는 암늑대의 허기진 목구멍처럼 결코 채워지지 않으며, 따라서 자기 몫을 탈취하기 위한 폭력과 대립은 필연적이다. 반대로 천국(“수도원”)의 지위, 재화, 명예, 권리는 나누면 나눌수록 늘어난다. 더 많은 몫을 차지하는 경우는 있을 수 없고, 자기 몫에 집착할 필요도 없다. 서로 주고받는 관계가 지속되면서 각자의 몫이 증식되는 것이 선의 본성이기 때문에, 거기서 생겨나는 욕망은 질투를 일으키지 않는다. 이것이 단테가 생각하는 공유, 천국의 다이어트다.

나눌수록 늘어나는 공유의 이치를 우리는 어떻게 구현할 수 있을까. 2011년 미국의 타임지가 공유경제 개념을 ‘세상을 바꾸는 10가지 아이디어’에 포함시킨 이래 플랫폼 기업들이 번창했지만, 한계와 부작용도 적잖다. 단테가 말하는 공유는 공유경제와 비슷하면서 다르다. 공유경제는 과잉 생산, 과다 축적된 재화를 나눠 소비하자는 쪽인 반면, 단테의 공유는 부족한 재화를 함께 소유하자는 쪽이다. 전자는 개인이나 사회가 소유한 부의 나눔을, 후자는 처음부터 공동으로 소유한 부의 나눔을 목표로 한다. 단테의 공유 개념은 소유 개념을 크게 제한하고 공공성을 더욱 확장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대식가들이 먹고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아 지옥에 처박혔다면, 천국의 다이어트는 기분 좋은 포만감을 준다. 천국의 포만감은 원활한 대사 과정을 통해 몸을 항상 최적의 상태로 유지하려는 생명의 느낌이다. 지나치게 먹어 비만과 질병에 찌든 몸이 정치적 분열과 탐욕, 불평등에 시달리는 잘못된 세상을 닮았다면, 항상 최적화된 상태를 지향하는 몸은 공유와 정의의 공동체를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올바른 의지를 낳는다. 대식을 권하는 먹방의 포로가 될 것인가, 아니면 의로운 일에 굶주리는 천국의 다이어트로 삶을 도모할 것인가. 설사 의로운 만큼 굶주린다 해도, 대식의 죄를 짓지 않게 되니, 분명 행복하리라([연옥] 24곡 151-154행).

▶박상진



영국 옥스퍼드대 문학박사. 이탈리아 문학 및 비교문학 전공. 미국 하버드대와 UC버클리 방문교수를 지냈고, 현재 부산외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신곡> <데카메론> 등의 역서와 <단테 ‘신곡’ 연구> <사랑의 지성: 단테의 세계, 언어, 얼굴> <단테> <단테가 읽어주는 ‘신곡’> <A Comparative Study of Korean Literature: Literary Migration> 등의 저서가 있다.

박상진 부산외대 이탈리아어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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