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균연령 81세' 할머니들 손끝에서 태어난 폰트가 사랑받는 이유

[JOB화점X핸드메이커] '칠곡할매서체' 이야기

또박또박 정성껏 눌러 쓴 글자. 조금은 삐뚤빼뚤하지만 포근한 정감이 느껴지는 글씨체 ‘칠곡할매서체’. 고운 글씨체의 주인공은 김영분(74), 권안자(76), 이원순(83), 추유을(86), 이종희(87) 씨다. 평균연령 81세인 할머니 다섯 분은 경상북도 칠곡군에서 성인문해교육을 통해 한글을 배운 어르신들이다.

어르신들은 폰트 제작을 위해 4개월을 투자했고, 한 사람당 2000장이나 되는 종이에 글씨 연습을 했다. 권안자 할머니는 한 번 연습할 때마다 열 장씩 글씨를 썼고, 이종희 할머니는 볼펜 7자루가 다 닳도록 연습했다. 

장시간 글씨 쓰기는 팔팔한 젊은이에게도 쉽지만은 않은 일. 할머니들은 늦게나마 깨우친 한글에 마음을 담았다. 경상북도 칠곡군은 할머니들의 글씨체를 디지털화한 폰트를 무료 제공하고 있다(칠곡군 홈페이지에서 ‘칠곡할매서체’를 검색하면 된다).

가독성보다는 ‘아날로그 감성’ 충만, 가슴 따뜻해지는 글씨체

문해학교는 한국전쟁 이후 또는 각자의 사정으로 배우고 싶어도 배울 수 없었던 교육의 기회를 어르신들께 제공하는 사업으로, 칠곡할매서체는 이 성인문해교실 참가 할머니들에 의해서 탄생하게 됐다. 네모 반듯한 폰트처럼 가독성이 뛰어나지는 않지만 사람 냄새 나는 매력 덕에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되고 있다. 

칠곡할매서체를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곳은 역시 칠곡군이다. 칠곡군에서는 할매들의 글씨체를 적용한 다양한 현수막을 만나볼 수 있다. 

지역 서체를 알리기 위해 가장 노력을 쏟는 이들은 지역민들과 공무원이다. 칠곡의 음식점을 운영하는 한 소상공인은 고객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메모에 이 칠곡할매서체를 적용했으며 배달하기 전 음식을 담은 상자에 본 메시지를 꼭 붙인다고 한다. 실제 이 서비스를 시행한 이후부터 매출도 증가했다고. 

할매 글꼴 활용에서 가장 두각을 드러냈던 사례는 경주 황리단길 입구에 있는 경주공고의 외벽 광고판이다. 경주공고는 지난 3월 칠곡할매서체 5종 중 권안자체를 적용한 ‘지금 너의 모습을 가장 좋아해’라는 글판을 제작해 학교 외벽에 설치했다. 뒤늦게 한글을 배우신 어르신들의 학구열과 노력, 열정이 그대로 담긴 폰트 사용은 학생들에게 귀감이 되기에 충분하다.

배우고 싶어도 배울 수 없었던 세월 지나…

칠곡할매서체에 대한 관심과 인기가 유난히 더 높은 것은 우리네 정겨운 할머니의 마음을 느낄 수 있어서인지도 모른다. 지난 2019년 2월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칠곡 가시나들’에 할머니들이 한글 배우는 과정이 담겨 있다. 영화 속에서 할머니들은 난생처음 한글을 배운 뒤 시장을 지나가다 만나는 간판을 읽으며 떨어진 자음을 맞춰보기도 하고, 배움이 주는 기쁨과 설렘을 만끽한다.

영화 '칠곡가시나들' 공개 스틸 /단유필름

굴곡진 삶을 살며 배우고 싶어도 배울 수 없었던 어르신들의 세월, 그리고 그 세월을 뛰어넘는 용기가 느껴지는 칠곡할매체. 충주시 우리한글박물관은 지난 1월 5일부터 칠곡할머니 글꼴로 제작한 표구를 상설 전시하고 박물관을 찾는 관람객에게 공개하고 있다.

“칠곡할머니 글꼴은 해방이후 할머니들의 굴곡진 인생은 물론 성인문해교육 성과와 한글의 역사가 담겨 있는 귀중한 자료입니다. 앞으로 박물관 관람객과 한글학회를 대상으로 칠곡 할머니 글꼴 홍보와 보급을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김상석 우리한글박물관장)

글=윤미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