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면에 번지는 검정 먹..어둠 있어 꽃이 더 빛나죠"

전지현 2021. 8. 24.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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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년 수채화 외길 정우범 화백 인터뷰
한국인 사랑하는 오방색으로
작고 약한 풀꽃밭 그린 후
먹으로 중후함과 무게감 더해
붓으로 안료를 툭툭 쳐서
종이에 스며드는 염색 기법
물에 약한 수채화 단점 극복
정우범 `Fantasia(고성)`. [사진 제공 = 선화랑]
오방색 수채화 꽃밭에서 검정 먹이 점점 몸집을 키우고 있다. 희한하게도 먹이 화면을 어둡게 만드는 게 아니라 꽃을 더 부각시킨다. 밤에 핀 꽃처럼 아름답다.

서울 선화랑 개인전 '환타지아'에서 만난 수채화 대가 정우범 화백(75)은 "먹의 중후함이 꽃의 화려함을 북돋아 무게감 있는 판타지아를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3년 전부터 수채화에 먹을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행복, 소망, 사랑 등 글씨를 넣던 수준에서 화면 비중이 커졌다. 먹은 검은 여백이나 오래된 성벽이 된다. "서당 훈장이었던 부친 영향으로 자연스레 먹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졌어요. 한민족이 사랑하는 오방색 중 하나인 흑색은 아주 정직하고 진실한 것을 의미해요. 품위 있고 심오한 색상이죠."

이번 개인전에서는 하얀 여백을 둬서 흑백 대비를 강조했다. 오방색으로 작은 들꽃들을 흐드러지게 그린 것도 특징이다. 오방색은 황(黃), 청(靑), 백(白), 적(赤), 흑(黑)색이다. "예부터 오방색이 악귀를 물리치고 부귀를 가져온다고 믿어왔죠. 오방색이 들어가면 그림이 강하면서도 화려해져요. 여기에 무한한 깊이를 가진 흑색, 순결과 소박을 의미하는 흰색으로 화면의 균형을 잡죠."

전시장에는 그가 오랫동안 고집해 온 꽃 수채화의 정점을 보여주는 작품 27점을 펼쳤다. 1985년 화실을 얻은 후 36년간 수채화만 그려왔다. 오랜 내공으로 수채화 종이가 가진 취약점인 변색과 탈색도 극복했다. 거친 유화 붓을 짧게 잘라 만든 갈필붓으로 안료를 묻혀 물에 적신 고급 수제 종이 표면을 톡톡 쳐서 스며들게 한다. 안료가 염색되듯이 종이에 착색되는 그만의 기법이다. "색을 종이의 모세혈관까지 침투시키는 방법이에요. 물감이 종이 깊이 스며들면 색감이 풍부하면서도 깊이 있고 무게 있는 그림으로 되죠. 그래서 어느 화가가 제 그림을 보고 '선생님 수채화는 평면화가 아니라 입체화'라고 말했어요."

미술 시장에서 더 인기가 많은 유화는 왜 안 했을까. "유화는 끈적하고 기름기 있는 색감 때문에 육류처럼 다가오고, 수채화는 식물성이어서 더 담백해요. 수채화가 내 마음에 먼저 들어와 교직(광주교대부속초등학교 미술교사)에 있을 때도 스케치북과 수채화 물감을 들고 야외로 다녔어요."

그는 유화가 더 오래 지속돼 수채화보다 비싸다는 편견을 반박한다. "유화 물감은 100년도 못 가서 균열이 일어나지만 수채화에는 금이 가지 않아요. 다만 수채화 물감이 흘러내려 바닥에 두고 그려야 해서 더 어려워요. 영국 국민 화가 윌리엄 터너가 '나는 수채화가 어려워서 유화를 그린다'고 말했을 정도죠. 중국에서는 치바이스 수묵화가 서양 유화보다 더 비싸요."

인물화·정물화·풍경화를 폭넓게 소화하던 그는 2007년 터키 여행에서 황홀한 야생화 꽃밭을 본 후 줄곧 꽃을 그려왔다. "이것이 바로 지상 낙원이구나, 이런 그림을 그려 주변 사람들에게 행복과 즐거움, 평안함을 줄 수 있겠구나 생각했어요. 제가 풀꽃을 보고 자란 산골(전남 무안군 몽탄면) 출신이어서 어린 시절 추억도 떠올랐고요."

그렇게 '꽃 화가'가 된 후 14년간 화면에 무수한 꽃을 피우고 있다. 같은 소재를 반복하는 게 싫증 나지 않을까. "전혀 지겹지 않아요. 김창열 화백이 물방울을 수없이 변주시켰듯이 얼마든지 한 가지 소재로 무궁무진한 변화를 가져올 수 있죠. 들국화, 채송화, 분꽃, 맨드라미, 달개비 등 꽃 종류도 어마어마해요." 장미나 작약처럼 화려한 꽃에는 거리감이 느껴져 작은 야생화를 주로 그린다. 연약한 사람들이 떠올라서다. 전시는 9월 18일까지.

[전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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