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모의 실록 속으로] 태종이 세종을 넘지 못하는 결정적 이유
비판 신하 숙청·귀양.. 홀로 국정 챙기다 "왕 노릇 힘들다" 눈물도
세종은 부왕 약점 극복.. 언로 열고 인재들 재능·창의성 발휘케 해
태종은 왜 세종만큼 업적을 내지 못했을까? 태종실록 강독을 진행하는 올가을 내내 품게 된 의문이다. 그런데 태종실록을 읽고 함께 토론하면서 새롭게 발견한 사실은 태종과 세종이 매우 비슷하다는 점이다. 우선 두 사람은 책을 국정 운영에 잘 활용했다. 세종은 1419년 4월 ‘시경’의 날씨 관련 대목을 인용하며 ‘요즘 기후가 고르지 않은데 정치를 잘못해서 그런 것 아닌가?’라고 물었다. 태종도 이와 비슷하게 1414년 6월 ‘’문헌통고’를 보니 나라에서 사면(赦免)을 하자 비가 내린 적이 있다’면서 사면령 검토를 지시했다. 이 외에도 왕이 신하들과 책을 함께 읽거나, 책 속 지식을 정책 결정에 활용한 사례는 무수히 많다.
다음으로 태종과 세종은 ‘토의 대왕’이었다. 세종의 즉위 제일성이 ‘의논하자’였고, 경연(經筵)이라는 세미나식 어전회의를 월 5회 이상 개최한 것은 알려져 있다. 태종 역시 재위 중반인 1415년 6월에 “오랫동안 비가 오지 않으니 인사(人事)에 잘못이 있지 않은가 싶다”면서 전국의 관리들로 하여금 ‘시정(施政)의 득실과 민생의 질고(疾苦)에 대해 모조리 개진할 것’을 요청했다.[求言]

사흘 뒤인 6월 17일에 140여 조항의 진언(陳言)이 올라왔다. 왕은 올라온 진언에 대해서 육조와 승정원의 관리로 하여금 시무(時務)에 절실하지 않은 것은 제외시키고, 실행 가능한 중요 안건 4가지를 뽑아 토의하게[擬議·의의]했다. 토의하는 방식이 인상적인데, 먼저 왕이 안건별로 질문하면 담당자가 요약 보고했고, 그 뒤 ‘집중 토의’를 거쳐 왕이 최종 결정했다. 다시 5일 뒤인 6월 22일에는 지방의 감사와 대소 관리가 올린 진언 200여 통이 올라왔다. 이 중 33조항이 토의되었는데, 이날 실록에는 조항마다 ① 의견 올린 사람 이름과 주요 내용[陳言·진언], ② 토의해 내린 결론[議得·의득], ③ 왕의 최종 결정[從之·종지/不允·불윤]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왕이 구언(求言) 요청을 하고, 관리들이 그 요청에 응해 수백 개의 정책 제안을 신속하게 올리며, 주요 사항에 대해 어전에서 토의한 후, 담당자의 계목(啓目: 실행 방안) 검토를 거쳐, 왕이 최종 결정 후 시행하게 하는 것을 보면, 흡사 선진 국가의 입법 과정을 보는 듯하다. 옥스퍼드대 파이너(S. E. Finer) 교수는 ‘정부의 역사’라는 책에서 ‘군주정에서도 활발한 토론의 정치(forum in the palace)가 이뤄졌다’고 지적했는데, 태종과 세종 시대의 토론이 그 적절한 예가 될 수 있다.
이처럼 지식 경영과 정책 수렴을 잘한 결과, 태종 시대는 ‘먹을 것이 풍족하게’ 되었다. 고려 말 80만 결이던 (평안·함경도를 제외한) 전국의 경작지가 태종 시대에 들어 120만 결로 증가했다. 서울과 지방의 창고가 가득 차서 물로 주변을 에워싸 쥐의 침입을 막아야 할 정도였다. 하지만 태종 시대는 ‘족식(足食) 단계’를 넘어서지 못했다. 국방은 1410년 경원전투 패배에서 보듯이 여전히 불안정한 상태였다. 태종이 희망했던 ‘먹을 것이 풍족하고 병력이 충분하며 백성이 정치를 믿는’ 나라는 세종 때에 이르러서야 성취되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여러 원인 중에서 나는 인재를 모조리 자기 밑에 두려는 태종의 통치 방식을 꼽는다. 태종은 신하들의 강한 비판을 참지 못했다. 왕명을 거슬러 어전회의를 기록한 사관 민인생을 귀양 보냈다(1401년 7월). 왕권 도전 세력으로 판단된 사람은 가차 없이 숙청당했다. 재위 초반 공신 이거이 제거에서 시작해 중후반 민씨 형제 사사(賜死)까지 재위 기간 내내 ‘공안 정국’은 계속되었다. 왕이 오래전 기억을 되살려 어떤 사람을 좌표 찍으면 언관과 대소 신료들이 들개 떼처럼 덤벼들어 공격했다. 태종을 왕위에 오르게 한 이숙번조차도 예외가 아니었다(1416년 6월).
총애받는 사람만 전폭 지원받는 상황에서 인재들이 왕의 생각을 뛰어넘는 창의력을 발휘하기란 어려웠다. 육조의 판서들이 정승을 건너뛰어 왕에게 직접 보고하면서 대소 업무가 모두 왕에게 쏠렸다. 그가 종종 ‘왕 노릇 하기 싫다’며 눈물을 흘리며 고통을 하소연한 것은 그런 맥락이었다. 다행히도 태종에게는 대안이 있었다. 재위 말년 충녕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과감히 세자를 교체하고 전격 전위를 단행한 것은 그야말로 ‘신의 한 수’였다. 세종은 부왕의 시행착오를 반복하지 않았다. 그는 부왕이 닦아놓은 기반 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인재들이 속마음을 열고 자유롭게 대화하고, 각각의 에너지를 나랏일에 쏟게 했다. 부왕 시대의 일인 중심 국정 운영을 벗어났다. 의정부 재상들의 경륜을 국가 경영에 반영했으며, ‘나랏일은 곧 내 책임’이라는 소명 의식을 갖고 일하게 했다. 태종이 발탁하고 키운 장영실⋅정인지⋅황희 등이 세종 시대에 이르러서 각각의 재능을 꽃피운 것은 이유가 있었다. 무엇보다 ‘재위 기간에 단 한 명도 정치적인 이유로 사람을 죽이지 않음’으로써 정치에 대한 신뢰를 회복시켰다. 대선을 몇 달 앞둔 때라 그런지 태종과 세종 이야기가 그저 옛날 일로 여겨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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